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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학살 자행한 황제는 성당에 “못 들어갑니다”
- 반 다이크,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
392년,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그의 치세가 379년부터 사망하는 395년까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치세 말기에 시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은 다시 동ㆍ서로 분리되고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강력한 그리스도교 부흥 정책은 이후 중세기를 예고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부흥시킨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대성당 출입을 금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사건을 다룬 것이다.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안톤 반 다이크(Antoon van Dyck, 1599~1641)가 그린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다.
안톤 반 다이크
작품은 1824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측이 개인 수집가로부터 구입하였다. 저자 반 다이크는 오늘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개인 공방을 운영할 만큼 패기 넘기는 화가였다. 그러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를 만나면서 공방을 접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루벤스가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점차 스승을 넘어서는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스승이 격정적이고 화려하다면, 반 다이크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세련되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 베네치아 화풍을 연마하며 데생에 구애받지 않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구도와 선미한 색채로 성경, 신화, 역사적 사건 등을 넘나들며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보였다. 1620년 10월, 반 다이크는 21살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영국과 유럽 대륙을 오가며 초상화 작가로 활동하다가,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초상화 분야에서 그는 과거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영국 화단은 물론,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반 다이크가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1619~1620년)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몇 해 전(1617~1618년)에 스승이 그리는 것을 보며 도와준 적이 있었다. 당시 스무 살의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거기서 특징적인 디테일에 주목한 바 있었다. 두 작품은 너무도 비슷해서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다음으로 공경받는 인물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인 286년부터 약 1세기가 넘는 402년까지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시절의 밀라노는 제국의 힘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는 두 파로 나뉘어 부딪히고 있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한 차례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는 계속해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혼돈의 시대에 세례도 안 받고, 성직자 신분도 아닌 암브로시오가 집정관으로 양 진영의 중재자로 나섰다가 양쪽의 만장일치로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아리우스파를 설득하여 정통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도록 하는 한편 전례와 성직을 공고히 하고, 교회의 사회봉사에 힘썼다. 전쟁 중에 발생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교회를 적극 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380년,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을 옹호하며, 자신이 병환 중에 바치던 니케아 신경을 모든 신자가 바치도록 칙령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칙령에서 황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보편적 그리스도인’이라며, ‘가톨릭’이라는 말을 했다.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381년, 황제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의 집회를 금했다. 그리고 모두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히 금하고, 동ㆍ서로마에서 비그리스도교 의식을 모두 금하는 것은 물론, 제국의 전역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테살로니카 학살
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은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있었다. 주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진압하던 로마군 수비대장 하나가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분노한 주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까지 내려 흙탕물에 집어 던지며 모욕을 가했다.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군대를 보내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민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며 황제를 만류했지만,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테살로니카 주민 7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주교의 말을 무시하고 부활절에 측근들을 대동하여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문 앞까지 나와 들어가려는 황제를 막았다. 단호한 주교의 태도에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해 성탄절,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성당을 찾았고, 주교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막았다. 진정한 회개와 통회, 보속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머리에 베옷을 두르고 땅에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을 주고, 성당 출입을 허락했다. 황제는 부활절에서 성탄절 전까지 성당 출입을 하지 못하다 성탄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지 불과 7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벌써 인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들은 주교의 권위가 황제를 누를 만큼 성장했다며 교권과 속권이 부딪힌 첫 번째 사례로 도래할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한다고도 하고, 멀리 ‘카노사의 굴욕’을 예견한다고도 평했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런 예단보다는 더 중요한 ‘교회가 국가 폭력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주민들의 권리, 그들의 주장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지 강자의 힘으로 찍어 눌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권을 옹호하고 나선 최초의 행동하는 성직자였다. 이후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더 먼 훗날, 교황이 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퇴색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어도, 그 출발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에 있었다.
작품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반다이크는 포르치아나 대성당의 현관에서 맞닥트린 두 사람의 긴장감 도는 순간을 포착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문 앞에서 손으로 황제를 저지하고 있다. 금색의 세련된 장식이 들어간 전례복을 입은 주교가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황제를 막아선 것이다.
형태와 구성이 자유롭고 붓질이 넓으며, 톤이 약간 어둡다. 주교의 심리를 묘사하는 듯하다. 인물의 구성과 자세, 귀티 나는 의상의 질감 표현과 대조적으로 시선 처리는 매우 극적이다. 황제는 간절하고 주교는 단호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표현이 탁월하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 자코포 주키의 ‘눈의 기적’
한여름에 눈 내린 기적의 언덕에 성모 마리아 대성전을 짓다
- 자코포 주키, ‘눈의 기적’, 1580년경, 피나코테크, 바티칸박물관, 로마.
로마에는 4대 대성전이 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전과 성모 마리아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성모 마리아 대성전은 서방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대성전이다.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외 사목 방문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 대성전을 찾아서 한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
바로 이 대성전을 짓게 된 동기가 오늘 소개하려는 작품에 담겨있다.
로마인들은 성모 마리아 대성전 건축과 관련한 역사, 기적, 전설 등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8월 한여름에 눈이 왔다는 것이다. 8월 4일과 5일 사이 밤에 눈이 내렸는데, 그것도 도시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이 세워진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만 소복이 왔었다고 한다.
이야기인즉, 4세기 말 로마에 요한이라는 한 귀족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도록 자식이 없자 재산을 물려줄 곳이 없어 부인과 상의 끝에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하나 지어 봉헌하고자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구체적인 장소를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부부는 꿈이 이상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리베리우스 교황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던 교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다 함께 마리아가 꿈에서 알려 준 장소로 가보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에스퀼리노 언덕, 지금의 대성전이 있는 자리다. 교황은 즉시 자신의 목장(牧杖)으로 눈이 내린 곳에 선을 그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라틴어로 ‘ad Nives’(앗 니베스)라고 한다. ‘눈’이라는 뜻이다.
이 기적 이야기는 매년 8월 5일, 대성전 광장에서 하얀 꽃잎을 뿌리는 행사로 기념한다. 로마인들은 대성전을 ‘리베리우스의 성모 마리아’라고도 하고, ‘앗 니베스(눈)’라고도 한다.
첫 공사는 352년, 귀족 요한의 봉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대성전의 모습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개축된 결과다. 교회사에서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한 공의회다. 신성과 인성을 갖춘 그리스도의 어머니, 곧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를 선포한 공의회다. 로마에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이 대성전은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432~440년, 성 식스토 3세 교황의 뜻에 따라 증ㆍ개축되어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코포 주키
그림을 그린 자코포 주키(Jacopo Zucchi, 1541~1590)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출신의 화가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활동했고, 매너리즘적인 화풍과 함께 과거의 고전적인 화풍을 추구하며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 화가였다. 조르조 바사리의 제자로 더 많이 알려진 화가다.
그는 바사리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바사리가 피렌체의 베키오 궁 내 프란체스코 1세 스투디올로와 500인실의 벽화를 그릴 때 참여하기도 했다. 1570년 12월 바사리를 따라 로마로 와서 성 비오 5세 교황의 요청으로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여러 소성당(성 미카엘, 성 베드로 순교자, 성 스테파노)들을 장식하는 데 참여했다.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 500인실의 벽화를 마무리하고, 1572년부터 로마에 정착해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추기경의 궁과 별장을 장식했다. 물론 로마 귀족들의 궁과 성당, 수도원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가 남긴 자취는 현재 로마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590년대 초에 그린 마지막 작품은 코르소가에 있는 루첼라이 궁(지금의 루스폴리) 갤러리에 있다. 그는 159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어머니
작품과 관련한 교회사적인 측면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가 선포된 에페소 공의회지만, 이것은 이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단 논쟁’과의 긴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 잡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두 황제 이후, 제국은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신앙은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혼선을 겪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이단 문제는 이미 박해 시대에도 등장한 바 있었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이 나왔지만, 박해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위협한 것은 안의 문제보다는 밖의 문제가 더 컸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이후 그 방향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이단이 “성자는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양자로 입양된 종속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와 그 뒤를 이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입장 논쟁이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후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거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오랜 갈등도 있었다.
쟁점이 된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Η Θεοτοκο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먼저 그분의 아들 예수님에 관한 신분부터 확실히 해야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그 둘은 신격과 인격으로 독립되어 있다(이성설, 二性說)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은 만나지만, 인성은 육신을 통해 만나는데, 그것도 그분이 죽음으로써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는 맞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성은 끝났기 때문이다. 인성이 끝나면서 마리아와의 관계도 끝났다고 본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두 위격 중 인간적 위격만 낳았다는 것(크리스토토코스, Χριστοτκο,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다.
이 주장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치릴로는 즉시 반대 이론을 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하나의 위격으로 단일하다고 반박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고 선언했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를 따라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받아들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는 단일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공의회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느냐 마느냐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교리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룬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을 확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재확인했고,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교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으로
그림이 소장된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크에는 자코포 주키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이 두 점 있다. 두 작품은 예외적인 서술과 활기를 주는 색상 표현으로, 기존의 매너리즘에서 보는 형광색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흰색 하나만으로도 위치와 명도로 다양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음영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극대화한다.
눈에 띄는 것은 원근법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관점이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저 멀리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가 위로 향한다. 마리아의 신분이 크리스토토코스에서 테오토코스로 승화되는 것을 표현한 것처럼.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7) 토마스 콜레의 ‘로마 제국의 멸망’
몰락의 불길로 뒤덮인 로마, 사람들 비명과 절규가 들리는 듯
- 토마스 콜레, ‘로마 제국의 멸망’. 캔버스에 유화(100×161㎝), 1836년, New York Gallery of Fine Arts 소장.
서로마 제국의 멸망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도록 유언했다. 서로마 제국은 이때 만들어졌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토인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였으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게르마니아 방위선이 무너져 국경지대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 치세에 이르러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과 같은 크고 작은 야만족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았고, 훈족의 아틸라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내부적으로는 군인 황제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훌륭한 장수들이 많이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야만족들을 막아줄 장수가 부족하게 되고, 이에 이탈하는 병사들이 많아져 결국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쓰기 시작했다. 특히 게르만 용병들에게는 이민족의 군대라는 지위보다는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5~9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향한 이민족들의 방대한 이동은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5세기에 접어들어 아시아 지역에서 발흥한 흉노족은 몽골 지역에서부터 서진하여 로마 제국의 변방까지 밀고 들어 왔다. 날렵한 기마병들을 처음 본 제국의 용병들은 기마병들에 밀려 제국의 영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이민족들이 서진한 이유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정치적인 이유를 들기도 하고, 최근의 헌팅턴 같은 교수는 기후 변화를 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로 인해 제국의 변방에 있던 게르만, 슬라브, 반달족, 동고트, 서고트 등의 여러 민족은 동-서 로마 제국의 방대한 영토에서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며 어떤 민족은 로마까지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결국 서로마 제국을 장악하고,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강제로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서로마 제국은 이렇게 멸망하였다.
서로마 멸망의 원인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조시무스는 “로마 제국이 망한 건 전통적으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즉각 반발했고, 설득력 있는 글과 설교로 맞섰다. 로마 제국 말기의 정치적인 무능과 사회-문화에 걸친 방대한 도덕적 해이를 그리스도교의 탓으로 돌리는 데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이다.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한 로마 황제의 폐위가 있기 오래전부터 로마는 거의 1세기가 넘게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았고, 쇠망의 길은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410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것을 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써서, 제국의 쇠퇴 원인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 이전, 이교 시대에도 멸망을 예견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갈리아족과 다키아족의 침입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고, 네로 황제의 로마 방화와 같은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화정 시대 말기에도 호라티우스는 “로마인들이 날이 갈수록 사악해져 간다”고 한탄했고, 네로 황제 시절, 세네카는 “이제 로마 제국은 병들어 남은 것은 사멸밖에 없다”고 했음을 상기시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공화정이 무너지면서부터, 그러니까 제국이 설립되면서부터 멸망은 예견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도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이교도들 때문에 제국이 망했다고 했다.5세기 초, 그리스도인 작가 살비아누스 역시 「신정론(De gubernatione Dei)」에서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은 죄악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로마 사회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 했다.
연작 ‘제국의 과정’
소개하는 그림은 ‘제국의 과정’이라는 제목의 5개 연작 중 하나로,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작품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토마스 콜레(Thomas Cole, 1801~1848)의 1833~1836년 작이다. 그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꽃을 피운 예술 운동 ‘허드슨 강 학파’의 설립자 겸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다. 허드슨 강 학파는 콜레의 작품들에서 보듯이, 주제의 폭이 방대하지만,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를 고수하며 사실적,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건축가의 꿈’, ‘인생 항해’‘,성경과 종교에 관한 ‘에덴동산’, ‘십자가와 세계에 관한 연구 시리즈’,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시작’, ‘귀환’, ‘과거’, ‘제국의 과정 시리즈’와 같은 것이 그 예다. 1829년 콜레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바 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로마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대표작인 ‘건축가의 꿈’도 그렇고, 소개하는 ‘제국의 과정’도 그렇다.
이 그림은 ‘제국의 과정’이라는 큰 주제 안에 ‘야만국가’, ‘목가국가 혹은 목자국가’, ‘제국의 완성’, ‘제국의 멸망’, ‘황폐’라는 5개 연작 중 하나다. 네 번째 해당하는 ‘제국의 멸망’은 앞에 있는 세 번째 ‘제국의 완성’과 뒤에 있는 다섯 번째 ‘황폐’와 같은 연장선에 있어 하나만 따로 떼어 언급하기가 곤란해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기로 한다.
우선 세 작품의 원근법과 시선이 거의 동일하다. 강을 중심에 놓고 제국이 세워지고, 멸망하고, 황폐화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 분위기도 ‘제국의 완성’에는 해가 뜨고, ‘멸망’에는 폭풍이 몰려오고, ‘황폐’에는 노을이 지고 있다. 똑같은 풍경을 각기 다른 시대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강변에는 로마로 추정되는 도시가 있고, 그것이 성장하고 쇠퇴한다는 내용이다. 감정은 강물의 움직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른쪽 배경에 있는 절벽과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큰 바위가 세 작품이 같은 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같은 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고 있다.
작품 속으로
이제 작품 ‘파괴(Destruction)’, 곧 ‘로마 제국의 멸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 번째, 다섯 번째 그림과 비교하면 극적이고 혼란스런 엄청난 행위들이 집약되어 있다. 벌어지는 행위는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한다. 강은 정면에 있고 물의 움직임은 거세다. 적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며 도시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도시를 불태우고, 시민들을 폭행하고 죽인다. 강에는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던져지고, 승리의 행렬을 잇던 다리는 끊어졌다. 사람들은 다리의 난간에 매달려 있다. 다리 위, 건물 위, 회랑의 기둥 위, 어느 곳 할 것 없이 인파로 가득하고, 모두 아우성이다. 사람들의 절규와 탄식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다. 기둥은 깨지고, 오른쪽의 큰 건물 뒤에서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불길은 곧 도시를 집어삼킬 것 같다. 바로 앞 오른쪽에는 그간 숭배해 오던 영웅의 동상이 몸통만 보르게제 검투사 같은 자세로 서 있다.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하려는 듯, 우람한 체구가 처량하기만 하다. 그림은 455년 반달족에 의한 로마 약탈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콜레는 기번과 달리, 로마 제국의 원인을 수많은 내부적인 원인에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외부적인 원인, 이민족의 침입에서 찾았던 것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8) 엘 그레코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
입고 있던 망토 잘라 헐벗은 걸인에게 주는 자선의 손길
- 엘 그레코(El Greco), ‘성 마르티노와 걸인’, 1597/1599, 미국 워싱턴 주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
성체성사와 나눔 실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성체성사’다. 성체성사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나눔’이다.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 시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도무스 에클레시에’(Domus Ecclesiae, 가정 교회)에 모여, 프라치오 파니스(Fractio Panis, 빵 나눔)로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이어갔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마지막 만찬)’에 깊이 내재된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에서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존재 이유를 상기해 왔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날, 주님께서는 만찬을 먼저 하지 않으셨다. 먼저 하신 것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이다. 순위를 알려주신 것이다. 이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선’을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동일시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고립된 어떤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보편적인 신앙 집단으로, 수는 적어도 온 인류 안에 흩어져 살고 있고, 그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앙인의 성소를 완성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이웃 사랑은 윤리적인 덕목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생명을 사는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가르친 탁월한 주교들이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 바로 같은 시대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와 투르의 성 마르티노다.
엘 그레코
이 작품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 마르티노와 걸인’이다. 1597~1599년 엘 그레코가 스페인 톨레도에 머물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Δομνικο Θεοτοκπουλο)로 스페인에서 40여 년 넘게 활동한 화가며 조각가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이탈리아식 표현이다. 그는 비잔틴 회화를 배우다가, 20세 무렵, 포스트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틴토레토, 조르조네 등 베네치아 학파의 색채의 풍성함을 배우고, 코레조를 통해 명암에 의한 서정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로마로 가서는 원색적인 느낌의 선명한 색채, 명암에 의한 극적인 대조,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듯한 인체 등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풍을 배웠는데,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며 신체를 조각처럼 묘사하는 법을 배웠다. 베네치아 학파와 미켈란젤로의 특징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577년 스페인 궁정에서 유능한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톨레도로 돌아왔지만, 펠리페 2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고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종교적인 주제의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는 종교개혁으로 힘든 시기에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반종교개혁의 이념이 반영된 작품을 그렸다. 그것이 ‘자선’ 혹은 ‘선행’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다섯 솔라(sola, ‘오직’이라는 뜻)’로 알려진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맞서, ‘세례의 물은 지옥의 불을 끄고, 자선은 연옥의 불을 끈다’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가르침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과 ‘성 마르티노와 걸인’(1597/1599)은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과 자선’을 실천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그에 대한 기적을 담은 내용이다.
성 마르티노
엘 그레코가 소개하는 성 마르티노(Martinus Turonensis, 316~397)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성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 태어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투르의 주교를 지냈기 때문에 흔히 ‘투르의 성 마르티노’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가리 솜버트헤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로마군 소속 기마 부대 보조군의 고위 장교로 이탈리아 북부 티치눔(오늘날의 파비아)에 주둔하는 바람에 마르티노는 어린 시절을 파비아에서 살았고, 성년이 된 후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마르티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술피키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 363?~420)가 기록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작품이 「성 마르티노의 생애」다. 그리고 후에 세 통의 친필 편지를 포함하여 자료들을 더 보충하여 「대화 (Dialogi)」(404)로 다시 한 번 성인을 세상에 알렸다. 성 마르티노의 제자이기도 한 만큼, 그가 소개하는 성인에 관한 미담은 많은 사람의 입으로 회자되었다.
가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이야기, 오랜 군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며 무장하지 않고 전쟁의 선봉에 서기를 자처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다는 이야기, 성소를 깨닫고 프랑스 투르 지방으로 가서 삼위일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지자였던 힐라리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아리우스파 이단을 극복하도록 한 이야기, 힐라리오가 투르의 주교로 있는 동안 그가 세운 수도원을 통해 지역 복음화에 일조한(361년) 이야기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가 여기에 소개하는 엘 그레코 그림의 내용이다. 마르티노가 로마 군인으로 갈리아에서 복무하던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아미앵의 성문에 이르렀을 때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을 만났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걸치고 있던 외투의 절반을 뚝 잘라 걸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자기가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옆에 있는 천사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에 불과한데,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잘라졌던 외투가 원래 모양대로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는 중요한 유물로 간주돼 그것을 관리하는 사제를 별도로 둘 정도였다. 그리고 이 ‘망토 지킴이’ 사제를 일컬어 작은 외투를 의미하는 단어 카펠라(capella)에서 파생된 ‘카펠라누(cappellanu)’라고 불렀다. 오늘날 경당 혹은 소성당을 말하는 영어 단어 채플(chapel)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마르티노는 세례를 받고 은수자,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371년에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제국의 신전과 제단, 우상 신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선행과 자선과 겸손함으로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교구 내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죄수와 이단자들에 대한 국가와 교회의 강력한 처벌에도 반대했다. 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가장 먼저 실천한 주교였다.
작품 속으로
이 작품은 성 마르티노가 망토를 잘라서 걸인에게 주는 순간을 묘사했다. 길쭉하게 왜곡된 것 같은 인물의 형태, 독특한 공간 배치, 극적이고 불안정한 색채와 강한 명암 대비로 인해 마치 조각처럼 보이는 가운데 강한 영성을 품어내는 듯한 이미지다. 매너리즘과 회화에서 조각 같은 이미지를 지향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공간 표현에서 원근법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배치한 것도 매너리즘의 특징 중 하나지만, 비잔틴 회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019년 가을,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대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찾아가는 성묘길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성 마르티노를 만난 것 같다. 순례자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여정에 투르(tours)가 있어 성 마르티노를 만나고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례의 여정 안에서 계속해서 그를 만나게 되고,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태생부터 순교 영성, 순례 영성, 자선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처럼.
엘 그레코는 대부분 화가가 ‘사랑’을 의미하는 붉은색 계열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초록색 톤으로 쓰고 있다. 초록은 ‘희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선’이야말로 일그러진 우리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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