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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5년 1기 –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God’s Love and Justice>
제8과 자유의지, 사랑, 하나님의 섭리
(Free Will, Love, and Divine Providence)예언의 신 보충자료
<2월 15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루시는 일은 자주 반복해서 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셨음을 증거하는 표를 얼마나 자주 세웠던가! 과거의 역사를 그들이 잊지 않도록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 사건들을 노래로 지어 부모들이 그 노래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들은 기념물을 만들어 그들의 눈에 띄도록 하였다. 그것들을 보전하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서 자녀들이 이 일에 관하여 물을 때에 전체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하심과 자비를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 10:32)라는 권고를 받는다. 주님께서는 이 세대의 자기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 사업의 과거 역사가 노유를 막론하고 백성들 앞에 자주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며,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인하여 그분께 찬양을 돌려야 한다. (6증언, 364-365)
◎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기에 적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낯선 사람의 음성과 분별해서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그 음성을 거짓 목자의 음성과 구별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그분의 음성은 또한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우리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거룩하지 못한 마음의 충동을 따르되 마침내 지각이 너무 혼란해져서 영원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단의 음성이 너무 변조되어 버리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우리의 심령이 그분에게서 분리되지 않으면 그 음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또 하나의 길은, 마음에 감명을 주는 성령의 호소, 곧 품성 가운데서 역사하게 될 호소를 통해서이다. (5증언, 512)
◎ 날마다 머리 아픈 일들이 젊은이와 늙은이들의 길을 둘러싸고 있다. 인내하고, 상냥하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는 도움을 받음으로써만 우리는 자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
아침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자녀들을 그 한 날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라. 여러 달이나 여러 해를 계산하지 말라. 그 날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단 하루만이 그대들에게 주어져 있다. 마치 그날이 지상에서의 마지막인 것처럼 그 시간 동안에 주님을 위하여 일하라. 그대들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 앞에 놓고 그분의 섭리가 지시하는 데로 수행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라. 그대들 자신의 계획 대신에 그분의 계획들을 받아들이되, 그것들의 수락은 이미 간직한 계획의 포기를 요구할지라도 그렇게 하라. 그리하면 생애가 거룩한 모본을 따라 차츰 꼴 지어지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빌 4:7)실 것이다. (7증언, 44)
<2월 16일/일, 우리의 주권자 하나님>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신의 성향을 따르고, 감히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며, 당신께서 밝히신 뜻과는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억지를 부린다. 주님은 이러한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단은 마치 에덴에서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인물들 편으로 다가와서 그들에게 인상을 끼친다. … 종교계는 도덕적 흑암의 장막으로 덮여져 있다. 미신과 독선이 남녀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들의 판단을 어둡게 하여 그 동료 인간에 대한 의무를 식별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문의 여지없이 복종해야 할 의무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러한 이들에게 그 소욕을 따르도록 허락하신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시 81:11~12). (3증언, 72~73)
◎ 실족하였을 때, 배반당하여 죄악 속에 빠졌을 때라도 그대는 기도할 수 없으며 주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 것이다. … 그분께서는 두 팔을 벌리시고 탕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분께 가라. 그리고 그대의 실수와 잘못을 말하라. 그분께서는 결코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고 그대의 신뢰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
침착함과 신뢰함이 그대의 힘이 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에게 오는 유혹의 강렬함과 그대가 그것을 저항하는 힘을 알고 계신다. 그분의 손은 고통 당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부드러운 동정으로 언제나 뻗치고 계신다. 시험을 받는 자에게 실망한자에게 그분은 내가 고통받고 죽은 것은 너를 위함인데 그대는 나를 신뢰할 수 없느냐? 하고 말씀하신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높임, 299)
◎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 고백과 일치된 생애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친절한 말과 예의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시는 사랑과 존경으로 피차간에 대하지 못함으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을 더럽힐 때, 아,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크게 모욕을 당하시는가!
땅에서 나온 권세들이 매우 강렬하게 격동하고 있다. 전쟁과 유혈이 그 결과이다. 도덕적 분위기는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는 일들로 오염되어 있다. 투쟁의 정신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도처에 편만하다. …
사물의 이면을 보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분께서는 큰 빛을 가진 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 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고 “불의를 좋아하”(사 66:3~4; 살후 2:11, 10, 12)기 때문이다. (8증언, 248~249)
<2월 17일/월, 전능하신 하나님>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온 하늘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인간 안에서 회복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 그분의 선물은 더 클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무한함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광대한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제공된다. 누구도 이기심을 가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광의 소망인 그리스도가 형성될 것이다. 구주께서는 자신이 위해 죽으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양자의 영인 성령을 받아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빛을 전할 수 있는 살아있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에 이기심이 한 가닥이라도 있는 한 그것을 승인하실 수 없다.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의 문이 닫히게 한 것은 분명 작은 범죄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죄는 그 양과 파급이 증가해 왔고 지금도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비는 끊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은 여전히 이 땅을 향해 흐르고 있다. (GC Bulletin, 1890년 10월 1일)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 정부의 기초인 그분의 율법을 폐지함으로 죄인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심판자이며 공의의 수호자이시다. 아주 사소한 경우라도 그분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그분의 율법을 없앨 수 없고, 가장 작은 항목도 없앨 수 없다. 율법의 공의와 도덕적 탁월성은 하늘 우주 앞에서 유지되고 입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룩한 율법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보다 더 작은 대가를 치르고는 유지될 수도 없다. (리뷰 앤 헤럴드, 1898년 11월 15일)
◎ 주님께서는 그 기도가 종종 세속적인 것과 섞이는 것을 알고 계시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것을 위하여 기도하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한 그 방법대로 그들의 요구를 성취시키지 않으신다. 그는 시험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필요한 바가 무엇임을 똑똑히 볼 수 있을 때까지 겸비의 길을 통과케 하신다. …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뜻에 복종시키고 통애하는 마음으로써 순종해야만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심령에 너무나 쓰게 보였으므로 마시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던 그 잔은 세상 죄로 인한 결과로써 하나님과 분리 되는 잔이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는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낸 복종의 정신은 하나님께 가납 되는 정신이었다. 영혼이 자신의 부족함, 무력함, 허무함을 느끼게 하자. 모든 힘을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러내자. 그러면 도움이 찾아올 것이다. (하늘에, 89)
<2월 18일/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주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저희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류 앞에 선과 악을 두시고 그중의 한편을 따르는 데서 초래될 확실한 결과를 명백히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초청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바로 심사 숙고한 후에 행한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품성을 보게 될 때 그분과 같이 되려는 강한 욕망이 일깨워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을 알고자 따라가게 되며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라는 말씀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청지기, 138)
◎ 하나님은 충분한 빛과 증거를 주셔서 사람이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강제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자유를 주셔서 선이나 아니면 악을 택하게 하신다. 사람이 만약 그의 판단력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거절하고, 한번 악을 택하면 두 번 째는 보다 쉽게 이것을 행할 것이다. 세 번 째는 더욱 열렬히 하나님에게서 물러 나와 사단의 편을 택하여 그의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가다가 마침내 죄 가운데서 굳어져서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거짓 것을 진리라고 믿기에 이른다. 진리를 거절한 그의 거절이 그 열매를 내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 무궁한 세월을 통하여 우리의 선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영생을 얻든지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중간 입장이란 있을 수가 없고, 두 번 째의 은혜의 기간도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같이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풍부한 기회와 특권을 마련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같이 우리도 이기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게 하기 위함이다. (화잇주석, 갈 6:7,8)
◎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되어 있다. 산들은 떠나고 언덕들은 옮겨지겠지만, 그분의 자비는 그 백성에게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요, 그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아니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분의 음성이 들린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렘 31:3),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사 54:8). 인간의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에 의심과 의문에 대한 모든 이유를 제거하시고 믿음으로 당신께 다다른 떨리는 손을 붙잡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주께서 보증과 안전을 증대하시고 주께 의뢰하는 것을 도우신다. … 예수께서는 맹세로서 당신의 약속을 확실히 하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당신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도록 주께서 이보다 더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분을 알기 위하여, 262)
<2월 19일/수, 하나님의 이상과 구제의 의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웨슬리 시대 직전에 영국에서 …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도덕률을 폐지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고, “선을 행해야 할 책임감”에서도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또한 다른 사람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범하는 악행은 참된 범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여길 것도 아니므로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로써 그런 죄를 끊어버릴 필요도 없다.”*고 하는 매우 두려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종의 가장 비열 한 죄, 곧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큰 위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만일 택함을 입은 자가 범한 것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죄로 간주하지 아니하신다”라고 역설하였다. …
이 괴상한 교리는 … 사단의 정신에서 온 것이며, 그는 죄 없는 하늘의 거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 율법의 정당한 제재를 없애 버리기 위한 그의 사업을 착수하였다. (쟁투, 260~261)
◎ 불충실한 농부들의 비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그들에게서 떠날 때까지 그들의 야심찬 욕망을 수행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무도 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임의로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굳게 하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저항하면 그 분명한 결과는 그들의 마음은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 년 이상 전에 하나님의 예지가 본 것을 예언했던 것을 인용하셨다. 예언이 그것을 성취하는 사람들의 성품을 꼴 짓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자리 잡은 성품이나 사탄의 가혹한 통치에 따라 자리 잡은 성품에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리뷰 앤 헤럴드, 1900년 11월 13일).
◎ 박해를 당한 사도 요한의 경험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위한 경이로운 힘과 안위의 교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음모를 방해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의 계책을 시련과 투쟁 가운데서 그들의 신앙과 충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작용하게 하신다. 흔히 복음 교역자는 핍박의 폭풍과 쓰라린 반대와 부당한 비난 가운데서 그의 사업을 수행한다. 그러한 때에 시련과 고통의 풀무에서 얻게 될 경험은 온갖 고통을 치르고라도 얻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께 가까이 이끄시고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과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라고 그들을 가르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대처하고 신임의 지위를 감당하고 그들에게 성취하도록 주어진 능력의 큰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행적, 574-575)
<2월 20일/목,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가 각 사람에게 와서 인간의 선천적인 약점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거짓말로 올무에 빠뜨리려 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땅을 먼저 통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사단과의 투쟁에 있어서 우리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뱀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무서워하고 낙담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신다. …
그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사단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셨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만 시험을 대항할 수 있었다. “기록되었으되”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벧후 1:4)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상황이나 자신의 약점을 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바라보라. 그 말씀의 모든 능력은 그대의 것이다. (소망, 122~123)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라고 구주께서 말씀하셨다. 승리하는 사업은 기쁨이 없는 사업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늘과 더불어의 교통을 의미한다. 그대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그대는 구하고 받을 수 있다. 그대는 무력한 심령을 그리스도께 올려놓으면서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방법들을 이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성과 신성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결합되었다. …
그 깊은 환난의 물결이 우리를 덮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죄악에서 깨끗이 씻음을 받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갖도록 하시며 그 시험을 통하여 더욱 순결하고 더욱 거룩하고 더욱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시련의 풀무에 들어갈 때에 이기심으로 어두워진 심령을 가지고 들어가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려운 시험을 참고 견딘다면 그 시험에서 나올 때는 신의 성품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환난을 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에 여호와께서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다. (하늘에, 279)
◎ 그리스도의 능력은 예수님을 따르는 각 사람이 그의 싸움에서 혹은 인생의 투쟁에서 위로와 소망과 기쁨의 면류관이 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진심으로 따르는 자는 전진하면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고 외칠 수가 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삼는 믿음, 곧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전적으로 인식하고 그대의 유일한 소망으로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조력자(예수님)를 붙드는 믿음이다. 그것은 실망함이 없는 믿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나의 신령한 능력은 그대의 것이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믿음이다. (그분을 알기 위하여, 166)
<2월 21일/금, 더 깊은 연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매일 생활에서의 종교” (4증언, 360–371)
H 형제여, 나는 그대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통해 성화되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 앞에 해야 할 큰 일이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대는 이 일을 행해야 하며, 늦출 시간이 없다. 그대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생애였음이 내게 보여졌다. 그대는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는 심히 부당한 취급을 받았으며 그대의 동기는 그릇 판단되었다. 그러나 그대의 실망과 재정상의 손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결국 그대의 유익이 되었다.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서 아직도 그대의 친절한 보호자임을 그대가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대의 시련과 당혹감들은 그대를 좌절시키는 경향을 가진 것들이었으며, 그대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때엔가, 그대의 눈이 열릴 수만 있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대를 그대 자신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음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대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했으며, 영원한 산보다 더 든든한 기반 위에 그대의 발을 옮겨 놓았다. 여기에서 그대는 빛을 보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새 믿음과 새 생명이 그대의 인생길에 솟아났다.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태평양 출판소에서 그분의 사업과 그대를 연결시키셨다. 그분은 그대를 위해 역사 하셨으며, 그대는 그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보게 될 것이다. 슬픔은 그대의 몫이었으나, 그대는 자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 중 많은 부분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대는 때로 매우 가혹했다. 그대는 급한 성미가 있는데 이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대의 생애에서 그대는 자아 신뢰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신을 잃고 의기소침하게 될 위험이 있다.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섭리로 그대는 구속주를 위해 그대의 능력을 완전히 쓰는 데 적합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대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그대는 그분의 길을 알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영의 지도하심을 따르려고 신실하고 겸손하게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는 정신을 길러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자신의 지혜와 소위 분별력을 크게 불신해야 한다. 그대의 상황은 이러한 조심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그는 기껏해야 제한된 능력만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출생시에 품성의 강하고 연약한 점을 모두 받았는데, 그것들은 긍정적인 결함이다. 이러한 특질들은 전 생애를 색칠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사람들을 이끌어 자아를 살피도록 한다. 진리는 그들의 잘못과 기존의 과오를 그들로 깨닫게 한다. 심령은 이 잘못들을 보고, 깨닫고, 알기 위해 열려져야 하며, 예수님의 도움으로 각자는 그것들을 극복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무리 부지런히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제한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섭리의 신비 가운데서 하나님의 길과 사업을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조금 전진하다가 그 밑바닥이나 해변에 닿지 못한다.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견실한 가치와 높은 조예를 지닌 사람은 그들 자신의 이해의 연약함을 즉시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는 사람, 가르치기보다는 배우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현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깊게 전진하는데 실패하는지! 그들은 표면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어려움을 보고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더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문제의 요점을 보기 위해 충분한 주의와 관심을 가지고, 또한 사려 깊고 기도하면서 연구함으로 그들 앞에 다가오는 중요한 문제들을 살펴보지 않는다. 그들은 충분히 주의 깊게 재어 보지 않은 것들을 말한다. 지적이고 솔직한 사람들이 자주 단호하게 물리쳐 버릴 필요가 있는, 그들 나름의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지적 능력이 열등한 사람들은 잘못 인도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정신적인 성향에 의해 습관이 형성되고, 관습과 감정과 의도들이 다소간 영향을 미친다. 때로 어떤 행동의 노선이 매일 같이 계속 추구된다. 판단해 봐서 옳아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의무보다는 감정이 지배권을 쥔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극복할 필요가 있는 품성의 날카로운 특질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심령을 겸손하게 할 것이다. 무력한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매닮으로써,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그분의 강함으로, 우리의 허약함을 그분의 인내하는 힘으로 보충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우리는 참으로 세상에서 빛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의 많은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시고, 그대를 향하여 오래 참으신다. 그대를 위해 행해진 하나님의 부드러움과 동정하는 사랑에 비추어, 그대는 자녀들에게 더욱 친절하고 관용하고 인내하며 용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거친 것과 잔혹함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에게서 떼어놓는다. 그대가 그들을 대하면서 압제적이며 성질을 부린다면 인내와 견딤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에 대해 교훈을 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준 품성의 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그들을 권면하고 교훈하며, 어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한다면, 그 목적은 잔인함이나 그들에게 전제군주처럼 보이는 것을 사용해서는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그대는, 아버지가 실수한 자녀들에게 나타내야 하는 온화한 사랑과 정직으로 그대가 그들을 권면하고 지도할 수 있을 때라야 그대는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자녀들이 그대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을 때, 그들의 잘못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고 그들을 위해 그들과 같이 기도하고 타이르는 대신에 그대는 감정이 폭발하여,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그대에게 정떨어지게 하여 종래는 그대에게서 그들을 분리시키게 될 길을 따르게 된다.
그대의 작은아들은 비뚤어졌고 그는 옳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심령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반역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을 비열하게 하고 거칠게 만들며 무례하게 할 뿐인 영향에 의해 감염되었다. 그는 그대에게 한 시험 거리이며, 회심하지 않는 한 그대의 인내심을 크게 고갈시킬 것이다. 그러나 잔혹함과 전제적인 냉혹함은 그를 개혁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정신이나 격정의 영향 하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를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자녀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대 자신을 제어해야 한다. 그대는 공의는 자비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가 자비와 부드러움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공의를 행할 때, 그대는 헛되이 수고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의 아들은 타락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는 현명한 훈육이 필요하다. 그대 자녀들의 환경이 어떠했는지, 좋은 품성을 형성하기에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긍휼과 사랑이 필요하다. 작은아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있다. 지성은 이제 형성되고 있으며, 애정은 그 인상들이 새겨지고 있다. 이 젊은이의 미래의 경력은 지금 그가 추구하고 있는 행로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덕이나 악으로 이끄는 길에 들어서고 있다. 나는 그 젊은이들에게 마음을 진리와 순결함으로 가득 채우라고 호소한다. 그가 죄악에 빠지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는 죄를 짓는 것과 멋대로 하는 일이 매우 즐거운 것이라고 자신에게 속삭일지 모르나 결국 그것은 두려운 길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죄를 사랑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사랑한다면, 그의 생각은 저열한 통로로 행할 것이요, 그는 순결함과 거룩함 속에서 아무런 매력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범죄자의 종말 즉,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이렇게 외칠 것이다. “오 나의 아버지, 당신이 내 젊음의 안내자가 되소서.”
그의 이생에서의 성공은 그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행로에 크게 달려 있다. 그는 생애의 책임들을 짊어져야 한다. 그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인내하지 못하였고 자제도 부족하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뿌린 씨앗이며, 뿌린 자가 거둘 수확을 낼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씨를 뿌려야 하겠는가. 예수께서는 아직도 이 젊은이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분은 그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를 초청하여 그분의 팔에 와서 그분 안에서 평안과 행복과 안정과 쉼을 얻으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의 전 생애를 꼴 짓게 될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하고 지체 없이 그의 애정을 남김없이 그분에게 드려야 한다. 그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사단은 그에게 세찬 공격을 퍼부을 것이나 그는 시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젊은이들의 위험을 보았다. 그들의 심령은 높은 기대로 가득 차 있으며, 내리막 길에 매우 마음을 끄는 것처럼 보이는 유혹적인 쾌락이 흩뿌려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곳에는 죽음이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그들에게 매력이 없고, 가시와 찔레가 있는 길로 보이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죄악된 쾌락의 부정을 요구하는 길이요, 그것은 좁은 길이며, 주께 사로잡힌 자들이 걸어가도록 닦여진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만과 자기 의지와 기만과 거짓과 부정직과 정욕과 더러운 욕정의 짐을 가지고는 이 길을 걸어 갈 수 없다. 이 길은 매우 좁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뒤에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넓은 길은 죄인들이 그들의 온갖 죄악된 성향을 지니고 여행할 만큼 충분히 폭이 넓다.
청년이여, 만일 그대가 사단을 그의 모든 시험과 더불어 거절한다면 그대는 구주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평안, 그리스도의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는 죄악에 탐닉하는 데서 행복할 수 없다. 그대는 행복하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 품성은 죄악의 방종으로 인해 추해질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위험과 마주칠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깨닫지 못한다. 젊은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친절하고 부드러운 관심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만일 좋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게 친절하고 사랑스런 말이 발해졌다면 많은 청년이 죄악의 영향으로부터 지켜졌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여, 나는 그대의 행동이나 의지가 방해받을 때, 그대의 감정이 그대를 너무도 자주 지배하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결코 낙심하지 마라. 요새가 되시는 분에게 피하라. 깨어 기도하고 다시 노력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그대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이 있다. 그대는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자매들과 경박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말하며 너무 가까이 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것은 그대의 영향을 손상시킬 것이다. 이 모든 점을 주의 깊이 삼가고 경계하도록 하라. 시험하는 자의 첫 번째 접근에 대해 주의하라. 그대는 매우 신경질적이고 흥분을 잘한다. 차는 신경을 흥분시키는 영향이 있으며, 커피는 두뇌를 마비시키는 것으로 둘 다 매우 위험하다. 그대는 식사에 주의해야 한다. 건강에 좋고 영양이 있는 음식을 먹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여 아주 흥분되어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이 없게 하라.
그대는 출판소에서 큰 봉사를 할 수 있다. 만일 변화된다면 그대는 중책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로서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실히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가 감정이 거칠고 조악한 것을 보았다. 이것들은 부드러워지고 세련되며, 고상해질 필요가 있다.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대는 자제의 습관을 배워야 한다. 그대는 지금 가지고 있는 정신을 가지고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어떤 귀족이 이것과 필적할 수 있는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해지는 것보다 어떤 더 높은 자리를 우리가 차지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주님을 위해 어떤 큰일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분을 가장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평안과 내재하시는 구주를 소유할 수 있도록 자아를 극복하는 일에 신실하지 않겠는가?
어려움 당하는 그대의 아들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다루어져야 하며, 그는 그대의 동정이 필요하다. 그는 그대의 비정상적인 기질과 비합리적인 요구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대가 드러내는 정신에 관하여 개혁해야 한다. 제어되지 않은 정욕은 한순간에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참지 못함과 결점을 찾는 일, 고압적인 자세의 독풀을 마음의 정원에서 제거해야 하는 필생의 사업이 그대 앞에 놓여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그대 본성의 야수적인 부분이 통제의 끈을 쥐고 영적인 것을 지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가 뒤집어진 것이다.
일에 있어서 그대의 신실함은 칭찬받을 만하다. 출판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신실함과 근면함과 완전함의 모본을 본받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 영의 은혜가 부족하다. 그대는 지성적인 사람이지만, 그대의 능력은 남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은혜와 인내와 사랑을 그대에게 제시하신다. 그대는 그 선물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대의 언행에 주의하라. 그대는 매일의 생애에서 씨를 뿌리고 있다. 모든 생각과 행해진 말들과 이루어진 모든 행위는 땅에 뿌려졌으며, 이것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영생에 이르든지 비참함과 썩는데 이르게 될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욕이 그대를 지배하도록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대의 불쌍한 형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책에 기록된다. 씨를 뿌린 대로 수확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뿌린 것을 반드시 수확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식욕을 조절해야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점을 정복해야 한다. 그대의 건강은 올바른 습관을 가지면 좋아질 것이다. 그대의 신경계는 크게 손상되어 있다. 그러나 위대한 의사께서는 그대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실 수 있다.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힘으로 삼으라, 그러면 그대의 육신적, 도덕적, 영적인 힘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보다 정복할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더 심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대의 신실한 노력을 인정하신다. 그분은 그대가 자아를 그분의 영의 지배 하에 두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수고해야 하는지를 아신다. 자아를 예수님의 손안에 놓아라. 그대 앞에 놓인 목표, 즉 그대의 자녀들과 그대가 교제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이 되는 목표와 함께, 자아 계발이 그대의 사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은 그대가 정복의 사업에서 얻는 모든 승리를 기쁨으로 바라볼 것이다. 만일 그대가 화내는 것과 정욕을 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본다면, 그대는 그분의 공로로 그리스도인 품성을 계발하게 될 것이다. 단번에 결정적인 변화를 이루라.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부여하신 지성에 걸맞게 역할을 다 행하겠다고 결정하라.
내가 육신적, 정신적, 도덕적인 면에서 사람의 현재 상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사람은 그의 살아 계신 머리,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날 수 있다. 그것은 한순간의 사업이 아니며, 일생의 사업이다. 날마다 신령한 생애 가운데서 자라남으로써 그는 유예의 시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의 충만한 상태를 성취하지 않을 것이다. 자라남은 계속되는 것이다. 불타는 정욕을 가진 사람들은 자아와 계속 투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힘들수록 승리와 영원한 상급은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대는 출판소의 사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위치에서 그대 품성의 특이한 특성들이 드러날 것이다. 생애의 작은 예모들은 소중히 간직되어야 한다. 견고한 공의의 원칙과 정직과 아울러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기질은 그대를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이 하늘에 들어갈 도덕적 적합성을 얻어야 할 때이다. 그대가 속한 교회는 정결케 하고 고상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순결하고 고상하고 정직하며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 신실하며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신다. 더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올바른 것이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보다 덜 중요하게 보이는 것들을 소홀히 한 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은 생애와 품성에서 계발되어야 한다. 견고한 정직함과 신실함과 어우러진 사랑스러운 기질은 어떤 직임도 맡을 수 있는 도덕적 적합성을 이루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간곡히 권한다. “겸손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쁜 기질과 겸손한 품행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분의 모본을 따를 수 없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예모는 배양되어야 한다. 성질을 제어하지 못하고 계속 부리는 일을 통하여 우리의 영향력을 우리처럼 감소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성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된 행복을 알지 못하며,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항상 더 좋은 자리에 나아가기를 원하며, 평안과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그의 생애는 무거운 십자가와 시련으로 짐에 눌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성질을 제어하고 그의 혀를 통제했더라면 이 많은 괴로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노를 쉬게 하는 것은 유순한 대답이다.” 복수심은 적을 결코 정복하지 못했다. 잘 조절된 기질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모세의 생애를 생각해 보라. 투덜거림과 비난과 화를 돋우는 일들의 와중에서 온유함이 그의 품성의 가장 빛나는 특질을 이루었다. 다니엘은 겸손한 정신의 사람이었다. 비록 주위 사람들이 그를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도 보고, 그의 대적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덫을 놓았지만, 그는 결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침착하고 용기 있게 신뢰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교훈을 배우라. 모욕을 당하셨을 때, 그분은 욕하지 않으셨다. 고통당하셨을 때 그분은 위협하지 않으셨다. 이 교훈은 그대가 반드시 배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하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대의 힘으로 삼아야 한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대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 만일 그대의 영혼이 영원한 반석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대는 안전하다. 기쁨이 오든지 슬픔이 닥치든지 그 어떤 것도 그대를 흔들어서 옳은 데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
그대는 세상의 바다에 떠다닌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는 그대에게 닻이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믿음을 지킬 필요가 있다. 충동으로 움직이거나, 모호한 이론을 품지 말라. 그리스도를 믿는 체험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율법에 순복하는 것이 그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충고와 권면을 기꺼이 받아들이라.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지체도 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 진실하고 그대의 자녀에게 참되고 하나님께 진실하라. 그대의 고통당하는 아들은 부드러운 취급을 받을 필요가 있다. 아버지로서 그대는, 쾌락으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신경은 또한 예민한 고통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고통당하는 인류의 관심사를 자신의 관심사로 삼으신다.
많은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을 유용성과 의무를 위해 교육시켜 자신들과 남들을 위해 복이 되도록 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책임을 잊고 있다. 아이들은 흔히 아기 때부터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며, 그들의 잘못된 관습이 굳어지게 된다. 부모들이 어린나무들을 구부러지게 했다. 그들의 훈련의 방법에 의해 품성이 추하게 계발되든지, 균형지고 아름답게 계발되든지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제멋대로 하게 둠으로써 실수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극단에 치우쳐서, 그들의 자녀를 철장으로 다스린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성경의 지시를 따르고 있지 않은 것이며 둘 모두 두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들의 마음을 꼴 짓고 있으며, 하나님의 날에 그들이 이렇게 한 데 대해 설명해야 한다. 영원은 이생에서 행해진 일의 결과를 드러낼 것이다. “작은 가지가 굽은 대로 나무가 기울어진다.”
그대의 다스리는 방법은 잘못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 그대는 인자하고 동정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그대가 비정상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그대의 자녀에게 어떤 모본을 끼쳤는가! 그대는 그대의 비뚤어진 훈련에 대해 하나님께 어떤 설명을 하게 될 것인가! 만일 그대가 그대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존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들에게 애정을 나타내야 한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결코 변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맹목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행동 노선을 바꾸라고 요청하신다. 그대는 극복하기 위해 결정적인 노력을 한다면 직무에 있어서 유용하고 효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대의 견해를 표준으로 세우지 말 것이다. 주께서는 그대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대를 그분의 백성에게 연결시키셨다. 그대의 생각은 왜곡되었으며, 그대는 이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정신이 변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지상에서 살았던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 사건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초래하였다. 그는 물 때문에 이스라엘 자녀들이 불평함으로 인해 크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당치도 않은 비난이 그로 하여금 한 순간, 그들의 불평은 그를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한 것을 잊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모욕당했기 때문에 슬퍼하는 대신, 그는 흥분하여 불끈하게 되었고, 자기 의지로 참지 못하여 반석을 두 번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와 아론은 마치 기적이 자신들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들을 놓았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들을 높였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행위에 빠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는 현저한 자제의 결핍을 보였고, 불평하는 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정신을 나타냈다. 그는 대중들 앞에서 인내와 관용의 모본이 되어야 했다. 대중들은 그들의 실패와 불만, 그리고 불합리한 불평을 그의 편에서의 잘못 때문이라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 모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명예의 자리는 그의 죄를 경감시켜 주지 않았으며, 그것을 크게 했다. 지금까지 흠없던 사람이 이제 타락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흔들림 없는 신뢰의 긴 생애로 인해 그들의 죄가 간과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되었던 사람이 격정을 나타냄으로써 품성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책임이 덜한 자리에서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얼마나 심하게 망가졌는가! 모세는 범죄했으며, 그의 과거의 신임은 현재의 죄를 대속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은 후세대를 위한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실수가 없는 영감의 펜은 이 역사를 정확한 진실로써 기록해야 한다. 모든 미래의 사람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죄를 정당화시키지 않는, 엄격한 통치자임을 알아야 한다. 모세와 아론은 더 낮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려졌던 동일한 심판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했다. 그들은 표현할 수 없는 심령의 고민이 있었지만, 복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과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모본은 많은 사람이 이것으로부터 배워야 할만큼 배우지 않고 건너뛰는 한 교훈이다. 죄는 죄되게 나타나지 않는다. 자아를 높이는 것은 그들에게 슬프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죄됨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라 범죄자를 책망하지 않으신다고 스스로 아첨한다. 모세와 아론, 다윗과 그 외 수많은 사람의 경우들은 말이나 생각에서나 행동으로 범죄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존재이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 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달라는 모세의 간절한 호소는 단호하게 거절되었다. 가데스에서의 범죄는 공개적이었으며 현저했다. 그리고 범죄자의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리고 그 사람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판결은 더욱 확실하고 형벌은 더욱 분명하다.
사랑하는 형제여, 주의하라. 그대의 행로에 비치는 빛에 충실하라. 바울은 말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주 안에서 기뻐함” (정로, 115–126).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의 선하심과 자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참된 품성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인자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드러내어 보일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요 17:18)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요 17:23)을 알게 하옵소서 하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그리스도의 편지니”,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3, 2)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를 통하여 한 편지를 세상에 보내신다. 그대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면 그는 그대들을 한 편지로 그대가 사는 가정과 동리와 거리로 보내신다. 그대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께서 당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에 호소하신다. 설혹 저들이 성경을 읽지도 아니하고 또는 그 가운데 기록된 말씀으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였을지라도, 또는 저들이 하나님의 업적 가운데서 그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대들이 예수의 참된 대표자일 것만 같으면 저희가 그대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얼마만큼 이해하게 되어 그를 사랑하고 섬기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가는 길에 등불을 비추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비춘 빛을 세상에 반사해야 할 것이다. 저희의 생애와 품성은 다른 사람들이 저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봉사에 대하여 옳은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표할진대 우리는 그의 봉사가 재미있는 것임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울함과 슬픈 것만을 생각하고 원망과 불평만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생애를 잘못 표시하는 것이 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행복되기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감상을 주나니 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그릇된 증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신과 낙망 가운데 빠지게 할 수 있을 때에 크게 기뻐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의 갈망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당신의 섭리로써 우리를 해롭게 하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주께서 긍휼과 동정이 없으신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사단의 하는 일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사실을 그릇되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차게 하나니 우리들은 우리 천부께 대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의 마음을 사단의 오전(誤傳)하는 말에 기울인다. 하나님을 신뢰치 아니함으로써 또는 그를 원망함으로써 그에게 불경하는 때가 너무도 많다. 사단은 언제나 신앙 생애가 우울한 생애가 되게 하려고 힘쓴다. 그가 신앙 생애가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처럼 보여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애 가운데서 신앙에 대하여 이와같이 괴로운 것임을 드러낼 때에는 그는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기만을 찬동하는 것이 된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은 저희의 잘못과 실패와 실망에 대하여 자꾸 생각함으로 저희의 마음이 근심과 낙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필자가 유럽에 있을 때에 이러한 처지에 있어서 깊은 고민 가운데 빠진 한 자매가 나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있었다. 내가 그의 편지를 읽는 날 밤에 난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 가운데 나는 한 동산에 있었고 그 동산의 주인인듯한 사람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꽃을 따며 향기를 맡고 있었는데 그 때에 내 옆에 서서 가던 그 자매는 그의 길을 방해하는 보기 싫은 찔레나무에 나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 자매는 거기서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는 안내자를 따라 길로 걸어가지 아니하고 찔레와 가시나무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 이런 아름다운 동산이 가시나무로 면목이 손상되는 것은 가석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 때에 그 안내자는 말하기를 “가시나무는 당신을 상하게 할뿐이니 그것은 상관하지 마시오. 그리고 장미와 백합화와 석죽을 따시오”라고 하였다.
그대들의 경험 가운데 어떤 명랑한 장면은 없었는가?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신의 감화에 따라 기쁨으로 뛰는 그러한 귀한 기회를 가져본 일은 없는가? 그대의 일생의 경험들을 회고할 때에 거기서 무슨 유쾌한 장면은 찾아볼 수 없는가? 하나님의 허락은 향기로운 꽃과 같이 그대들이 나아가는 길 좌우편에서 자라나지 않는가? 그대들은 그 허락들의 미(美)와 향기로써 그대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지 아니할 것인가?
찔레와 가시는 그대들을 상하게 하고 고립케 할 것뿐이니 만일 그대가 이런 것들만을 꺾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주의에 있는 사람들까지 생명의 길로 걸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되지 않는가?
과거 생애 가운데 모든 불유쾌한 추억들-과거의 불의와 실망-만을 모아 가지고 거기 대하여 이야기하고 거기 대하여 비탄하는 중에 마침내 낙담에 빠지게 되는 일은 현명한 일은 아니다. 낙담된 심령은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고 또 하나님의 빛이 그 심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길에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신 마음에 생각할 명랑한 제목들에 대하여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된 보증을 모아서 그것들을 늘 바라보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으시고 그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신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심으로 인류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알현실을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것과 타락한 인류가 죄로 인하여 빠진 그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사 다시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연합하게 하시는 것과, 또 인류가 우리 구주에 대한 신앙을 시험하는 그 시험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의 보좌에 함께 앉기까지 높임을 받는 것-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묵상하기를 원하시는 제목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의 허락을 믿지 아니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그의 성신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가령 한 모친이 자기 자녀들의 유익을 도모하고 안락을 주기 위하여 온 생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자녀들은 자기 모친이 저희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항상 그 모친에 대하여 불평만 한다고 하면 그 모친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자녀들이 모친의 사랑을 의심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어떤 부모든지 그 자녀들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그의 사랑을 우리가 의심할 때 우리의 천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사도는 기록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였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은 비록 말로는 표시하지 아니할지라도 저희의 행동으로써 “주께서 내게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아마 주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실는지 모르나 나는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일은 모두 그대 자신의 심령을 해롭게 하는 것이니 대개 그대가 말하는 의심하는 말마다 사단의 유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또 의심하는 말은 그대에게 의심하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며 봉사하는 천사들로 하여금 슬피 그대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사단이 그대를 시험할 때 그대는 의심하고 비판하는 말은 한마디라도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들이 사단의 유혹을 용납하는 문을 열어 놓을 것 같으면 그대의 마음은 불신과 반역적 의심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그대들의 느끼는 바를 기탄없이 말하여 버린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의심마다, 그대 자신에게만 영향이 미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사람의 생애에도 싹이 나서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되어 그대의 말의 감화를 소멸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비록 그대들 자신은 사단의 일시적 시험과 올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대들의 감화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그 불신에서 벗어날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런즉 우리가 언제나 영적 힘과 생기를 주는 그러한 말만을 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가!
천사들은 그대들이 하늘에 계신 주께 대하여 세상 사람에게 어떠한 말을 하는지를 듣고 있다. 그대들의 담화는 천부 앞에서 그대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이 친구의 손을 잡고 인사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이 그대들의 입술에서 나오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생각이 그대들의 마음에서 생겨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 친구의 생각을 예수에게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시험이 있고 또 견디기 어려운 근심과 대항하기 어려운 유혹들이 있다. 그대들의 어려운 사정은 그대들과 같은 연약한 인간에게 말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내어놓을 것이다. 언제든지 의심하고 낙담하는 말은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지 않는 주의를 세우라. 그대들은 희망을 주고 원기를 돋우는 말로써 다른 사람의 생애를 명랑하게 하고 그들의 노력에 힘을 더하여 주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에 용감한 마음을 가지고도 시험으로 몹시 괴로운 가운데서 자아와 더불어 또는 의의 세력으로 더불어 싸우는 가운데 거의 기력을 잃어버린 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힘든 투쟁 중에 있는 자들을 낙담케 하지 말라. 그런 이들에게 저희의 길을 전진할만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로 원기를 돋우어 주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이 그대들에게서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롬 14:7)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끼치는 감화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격려받으며 힘을 얻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낙담하게 되어 그리스도와 진리에서 떠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온정미와 쾌활성이 결핍하고 엄하고 가혹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없다고 한다. 모든 신앙상 경험이 이러한 우울한 견해로 말미암아 악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울기는 하였으나 웃은 일은 도무지 없다는 말을 흔히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참으로 슬픔에 처한 자이었으며 비통을 잘 아셨나니, 이는 그가 인류의 모든 우고를 위하여 당신의 마음을 여신 까닭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극기의 생애였나니 비록 고통과 근심으로 그늘졌을지라도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아니하셨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나 원망의 표정이 없고 도리어 항상 안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띠셨다. 그의 마음은 생명샘이었고 그는 어디를 가시든지 안정과 화평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심히 신중하시고 매우 열정적이었으나 조금도 음울하거나 얼굴을 찌푸린 표정이 없으셨다. 구주를 모방하는 자들의 생애는 진실된 목적으로 차게 될 것이고 저들은 개인적 책임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경박함이 없어지고 난잡한 환락과 비열한 농담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강과 같은 평강을 준다. 이 종교는 기쁨의 빛을 꺼버리지도 아니하고 유쾌함을 억제하거나 명랑하고 웃는 얼굴을 흐리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요 섬기려 하심이니, 그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할 때에 우리는 그의 모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친절하고 온당치 않은 행위만을 자꾸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것 같으면 그와 동일한 정신이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로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불완전함을 보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겸손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정신을 길러야 하며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참으며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인색한 이기심을 없이하고 우리로 하여금 관대하고 너그럽게 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 37:3)라고 하였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날마다 그날의 의무가 있는 것이고 그 날의 근심과 난문제들이 있나니 우리가 서로 만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시험에 대하여 얼마나 입빠르게 말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하고 너무나 많은 공포심을 가지며 또 너무나 무거운 근심되는 말을 함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고 급할 때에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구주가 계시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이는 항상 염려하고 공연한 근심을 사서 한다. 저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들로 둘러싸이고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로 주시는 은사를 누리건만 저들은 이러한 현재의 축복을 모르고 지낸다. 저들의 마음은 항상 앞으로 오리라고 염려하는 어떤 불유쾌한 것에 대하여 항상 생각한다. 또는 실지로 존재하고 있으나 그다지 크지 않은 어떤 어려운 일이 저희의 눈을 가리워서 마땅히 감사해야 할 여러 가지 축복을 보지 못하게 한다. 저희가 당하는 곤란이 저희 유일한 도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대신에 도리어 그것이 불안과 불평의 생각을 일으키므로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떠나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믿지 않아도 좋은가? 우리는 어찌하여 감사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치 않는가? 예수는 우리의 친구이시며 온 하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생애의 번민과 걱정이 우리 마음을 번민케 하거나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 말게 하라.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언제나 우리에게는 성가신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다만 번민케 하고 피곤케 할 뿐이니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견디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걱정은 버려야 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업무에 있어서 번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대의 앞길이 점점 암담하여져서 손실을 당할 염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라. 그대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침착하고 기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사건들을 신중히 처리할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함으로 손해와 재난을 면하게 하라.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하여 그대로서 할 최선을 다하라. 예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허락하셨으나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없이도 될 것은 아니다. 그대들이 그대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대들의 할 수 있는 것을 다한 다음에는 그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달게 받아들이라.
당신의 백성이 근심에 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신다. 그는 “너의 앞길에는 위험이 없으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시련과 위험이 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대한 처리를 솔직하게 하신다. 그는 당신의 백성을 죄악 세상에서 떠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저들에게 절대 실족함이 없는 피난처를 가리켜 주신다.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당신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는 가운데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귀중한 교훈을 주셨다. 이 교훈들은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많은 교훈과 위안이 되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 걱정 없이 찬송의 노래를 부르는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저희는 “심지도 않”(마 6:26)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크신 아버지께서는 저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구주께서 물으시기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라고 하셨다. 사람과 짐승의 크신 공급자께서는 그 손을 펴사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공급하여 주신다. 공중의 나는 새도 그의 돌보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물론 그는 식물을 새의 주둥이에 떨어뜨리지는 않으시나 저희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주신다. 새들은 그가 저희를 위하여 흩어 놓은 곡식을 주워 먹어야 한다. 또 새들은 저희의 새둥우리를 지을 재료를 마련하여야 하고 저희 새끼를 먹여야 한다. 저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러 나아가나니 이는 “천부께서 기르”(마 6:26)심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즉 지능을 가지고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는 그대들은 공중의 새보다 더욱 가치가 있지 아니하냐?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요 우리의 생명의 보존하시는 이시요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자께서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에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지 아니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무성하게 자라서 천부께서 부여하신 아담한 미를 빛내는 들의 꽃들은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고 말씀하셨다. 이 들의 꽃들의 미와 아담함은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훨씬 뛰어난다. 예술적 기술을 다하여 만든 가장 화려한 성장이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꽃들의 자연적인 우아함과 눈부신 미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라고 하셨다. 신령한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하루 동안에 없어지는 단순한 꽃에게도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채로 단장하게 하셨거든 하물며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위하여서야 얼마나 더욱 크게 돌보실 것인가? 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염려하는 생각과 번민과 의심을 책하는 견책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가 행복되고 화평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하셨다.
의무의 상도에서 벗어나서 이기적 동기로써 구하는 행복은 편벽된 것이요 변역하기 쉬운 것이요 일시적인 것이니, 그것이 지나가 버리면 심령은 쓸쓸함과 섭섭함으로 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안전한 길로 걸어가라고 방임되지 아니하였다. 또 그리스도인은 공연한 후회와 실망 가운데 버린 바 되지도 아니하였다. 만일 우리가 현세의 낙을 가지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는 내세를 바라봄으로 오히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빛과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받는 영구적 위안을 누릴 수도 있다. 우리 생애의 매 발걸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고 복된 평화의 본향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우리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전보다 더욱 굳은 확신을 가지자.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삼상 7:12)으니 그는 또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비를 바라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인애와 자비-눈물을 씻어 주신 것-을 언제나 새롭게 기억하자. 그리함으로 우리의 나그네 생애의 여생을 통하여 우리 앞에 있을 모든 난관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굳세게 하자.
우리는 장차 오는 투쟁에 있어서 새로운 난국을 내다보지 않을 수는 없으나 장차 있을 일도 이미 지난 일과 같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시험은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도록 부여된 힘의 한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그 시험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당하는 일을 무엇이든지 착수하자.
그리하면 머지않아서 천국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들이기 위하여 열리게 될 것이고 영광의 왕의 입술에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는 큰 음악 소리와 같은 축복이 저희 귀에 들릴 것이다.
그 때에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께서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임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서 저희가 사귈 동무들은 이 땅의 비열한 자, 거짓말하는 자, 우상 숭배자, 더러운 자,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저희는 사단을 이기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전한 품성을 형성한 자들로 더불어 교제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저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죄의 습관, 모든 불완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되고 태양의 광선보다 훨씬 뛰어난 아름답고 광채나는 당신의 영광을 저희에게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품성의 완전하심, 즉 도덕적 미가 저들을 통하여 빛날 것이니 그 가치는 이 세상의 외관상 화려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이 흰 보좌 앞에 허물이 없는 자로 천사의 권위와 특권을 누릴 것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유업을 생각할 때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비록 그는 가난할지라도 그 자신에게 세상이 도무지 줄 수 없는 부요와 위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아 정결케 되고 자기의 온갖 고상한 능력을 하나님께로 바친 그 사람은 지극히 가치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나니 이 기쁨은 거룩한 승리의 노래로 표시되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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