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석법원(釋法願)
법원의 본래 성은 종(鍾)씨며, 이름은 무려(武慮)이다. 선조는 영천(穎川)의 장사(長社) 사람이다. 조부 대에 난을 피하여 오흥(吳興)의 장성(長城)에 옮겨 살았다. 법원은 항상 매근치감(梅根治監)이 되었는데, 시신민(施愼民)이 와서 교대하였다. 이에 앞서 문서를 교열하지 않아, 시신민이 마침내 홀로 그 책임을 졌다. 법원은 곧 소를 올려 죄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 교지가 내려, 시신민은 죽음을 면하고, 법원은 신도(新道)의 수령이 되었다.
집에서 본래 신(神)을 섬겼기에, 몸소 북치고 춤추는 것을 익혔다. 세간의 잡기와 노장들이 하는 점치고 관상 보는 일[耆父占相]들을 모두 갖추어, 그 묘를 다하였다. 어느 날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보고 말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아마도 천자(天子)를 만날 것이다.”
이에 서울로 나가 침교(沈橋)에 머물면서, 관상 보는 품을 팔아 일삼았다[庸相自業]. 종각(宗殼)과 심경(沈慶)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 지나다가, 법원에게 상을 보아달라고 청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종군(宗君)은 세 고을의 자사(刺史)가 될 것이고, 심군은 벼슬이 3공(公)까지 다할 것이오.”
이와 같이 돌아가며 많은 사람의 상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다. 징험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침내 전송의 태조(太祖)황제에게 알려져 태조가 그를 알현하였다. 동쪽 감옥에 있는 죄수와 얼굴이 아름다운 한 노비를 데려 와서, 의관으로 몸을 장식하게 하였다. 법원에게 관상을 보게 하였다. 법원은 죄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는 위태하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계단만 내려서면 아마도 곧 쇠사슬을 찰 것이다.”
노비에게는 말하였다.
“너는 하천(下賤)한 사람이다. 이에 잠시 면하였구나.”
황제는 경이롭게 생각하였다. 곧 칙명을 내려 후당(後堂)에 머물면서,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맡게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 상계하여 출가하기를 구하였다. 세 번 상계하여 비로소 바람을 이루어, 상정림사(上定林寺)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등극하자, 종각(宗殼)이 지방으로 나가서 광주(廣州)에 주둔하였다. 법원과 손잡고 함께 갔으며, 받들어 5계(戒)의 스승으로 삼았다.
때마침 초왕(譙王)이 역모를 꾸며 영남 땅에 격문을 날려 보냈다. 종각이 이 일로 법원에게 물어보니, 법원이 말하였다.
“그대를 따라 왔다가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겠다. 지금 태백성(太白星)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니, 법으로 미루건대 아마도 대신을 죽일 것이다. 속히 계획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공훈을 얻을 것이다.”
과연 법원의 예언과 같았다. 종각이 예주(豫州)자사로 자리를 옮길 때도, 다시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거사하려 할 때 법원이 간언(諫言)을 진술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 후 법원은 자사와 함께 승려들의 걸상 다리의 높이를 줄여서, 여덟 손가락 정도로 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문 승도(僧導)는 강서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법원이 함부로 승려들을 바로잡으려 한다고 생각하여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던 터이다. 마침내 이 사실을 효무제에게 알렸다. 효무제는 곧 칙명을 내려 법원을 서울로 돌아오게 하고, 법원에게 물었다.
“왜 거짓으로 채식을 하는가?”
법원이 대답하였다.
“채식한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직합(直閤) 심유지(沈攸之)를 시켜 강제로 핍박하여, 고기를 먹이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나, 그의 지조를 돌리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칙명을 내렸다. 도를 그만두고 광무(廣武)장군이 되어 화림불전(華林佛殿)을 지키게 하였다.
법원은 비록 겉모습은 속인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훼절한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황제가 죽자 소태후(昭太后)가 명령하여, 도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용되었다.
태시(太始) 6년(470)에 교장생(佼長生)이 자기의 저택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정승사(正勝寺)라 이름지어, 법원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북제(北齊)의 고조(高祖)황제가 황제 되기 전에 친히 어린 임금을 섬겼다. 그러면서 항상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있을까 근심하여, 늘 법원에게 자문 받았다. 법원이 말하였다.
“일곱 달 뒤가 되면, 결정이 날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북제의 고조황제는 즉위하자 스승의 예로 섬겼다. 무제(武帝)가 이어받아 일어나서도, 역시 스승으로 공경을 다하였다.
영명(永明) 2년(484)에 형의 상(喪)을 만나, 나라에 상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고향에 이르러 얼마 되지 않았건만, 칙지(勅旨)가 중첩하였다.
그 후 법원은 서울로 나와 상궁사(湘宮寺)에서 쉬었다. 황제가 가마로 친히 납시어, 절로 내려와 문안하고 위로하려 하니, 법원이 말하였다.
“다리의 병이 없어지지 않아서, 만나는 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마침내 말머리를 되돌려 절을 떠났다.
어느 날 문혜(文惠)태자가 절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법원이 앉으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혜태자는 절을 하고 서서, 법원에게 말하였다.
“나팔을 성대하게 불며 바라를 맑게 쳐서 공양한다면, 그 복이 어떻습니까?”
법원이 말하였다.
“예전에 보살이 8만의 기악(伎樂)으로 부처님께 공양드려도, 오히려 지극한 마음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나무 관(管)을 불며 죽은 소가죽을 치는 것이야, 여기에서 어찌 말할 만하겠습니까?”
그의 덕을 지키고 시대에 초연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후ㆍ비ㆍ공주 및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그에게서 계를 받고, 모두가 스승의 예를 따랐다. 법원은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속인들과 사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하루에 수만 명씩 가득했다.
법원은 얻는 것에 따라 복업을 닦았다. 한 번도 저축하거나 모으는 일이 없었다. 혹 사람을 고용해서 예불하거나, 혹 사람을 빌려 재를 유지하거나, 혹 쌀과 곡식이 들어오면 물고기와 새들에게 흩어 먹거나, 혹 음식을 사들여와 죄수들의 무리에 베풀어 주었다. 공을 일으키고 덕을 세운 수효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법원은 또한 창도를 잘하고, 경에 근거하여 설법을 잘하였다. 마음 속 폐부로부터 우러나온 솔직한 음성으로 음률을 일삼지 않았다. 말은 잘못되고 뒤섞여도, 오직 기연에 맞는 것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니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其智可及],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 없구나[其愚不可及]”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 후 사흘 동안 입정(入定)하다가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밥 소쿠리를 잃는구나.”
갑자기 병으로 누웠다. 이때 절 가까이에서 화재가 났다. 절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연기와 화염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법원을 가마에 태워 절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불타게 된다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느냐?”
곧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이에 삼면이 모두 불탔으나, 오직 절만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나이 87세로 세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