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라도 쐴까, 간단한 채비만 꾸려 떠났다. 먼 산 위 바람의 언덕에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우뚝 섰다. 프로펠러가 멈춘 채 바람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헛간에서 마른 수숫대를 한 뼘 길이로 잘랐다. 질긴 껍질 안에는 부드럽고 하얀 속살이 가득 찼다. 대빗자루에서 가느다란 줄기 하나를 꺾고 부엌에서 밥알 몇 개를 떼어 입에 물었다. 종이의 중심점에 밥알 하나를 짓이겨 문질렀다. 미리 잘라놓은 네 개의 종이 귀를 차례로 당겨 붙였더니 바람 먹을 입이 되었다. 다 만들어 벽에 걸어두었다. 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었다. 바람개비를 만들 때는 바람이 항상 불 것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바람을 기다릴 수 없어 바람개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앞으로 달려 바람을 일으키며 바람개비를 돌렸다. 뜀박질을 멈추면 바람개비가 멈추고 다시 뜀박질하면 바람개비도 돌아갔다. 바람은 대자연의 일로만 알았는데 내가 달려서 일으킨 바람으로 바람개비를 돌렸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했다.
바람이 부는 날, 바람개비를 들고 대흥동 공설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바람개비가 잘 돌아갔다. 바람이 고마웠다. 골목길에서 혼자 놀던 앞집 아이가 바람개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쌩쌩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더 잘 돌아가도록 나는 빠르게 뛰었다. 보리밭 사잇길을 지나 정읍서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달렸다. 같은 반 여자애가 지나가다가 나와 바람개비를 보고 웃었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마음속으로, 나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람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 아까 만난 아이가 또 바람개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또래보다 말이 늦고 언제나 혼자 노는 아이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볼 때마다 말을 걸어도 아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슴없이 바람개비를 주었다. 아이는 웃으며 바람개비를 앞세우고 골목으로 달려갔다. 내가 만든 바람개비가 아이의 찌푸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주다니 놀라웠다. 뛰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달려가 봄바람이 부는 듯 마음이 훈훈해졌다. 다음에는 색종이 바람개비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6학년이 된 뒤, 학교 수업은 언제나 늦게 끝났다. 담임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주면 더 공부했고 숙제가 좀 느슨해지면 공부할 생각은커녕 놀 꾀를 부렸다. 어릴 땐 공부하기 위해 숙제를 한 것이 아니고 회초리가 무서워 숙제했다. 선생님의 숙제는 돌 줄 모르는 내 공부 바람개비를 돌려준 바람이었다.
정읍을 떠났다. 도서관을 다니며 취직 시험을 준비했다.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바람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힘차게 달리면서 돌아가던 어릴 때 그 수수깡 바람개비가 떠올랐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몸은 그에 따라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았다. 이젠 내가 바람개비가 되어 비와 눈바람은 물론이고 거친 사회 바람도 견디며 돌아가야 한다.
벌써 몇 년의 직장생활이 지났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독립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아내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작은 회사를 차렸을 때 거의 모든 일은 내 몫이었다. 그래도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회사를 돌렸기에 마음은 즐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돈은 자꾸 나가고 푼돈만 들어왔다. 땀 흘려 일했는데 적자를 탈피하지 못한 사업은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의욕을 더욱 갖게 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야 했다.
차분히 전후 사정을 따져보았다. 사업은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상대의 바람과 내 바람이 일치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바람이 일어나고 그 바람이 사업이라는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 회사의 바람이 무엇일 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식사라도 할 때는 상대의 취미와 주량까지 알아냈다. 사업이라는 바람개비는 수없이 다양한 바람이 모아져야 돌아갔다. 상대 회사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생각과 행동을 이어가면서 다행히 사업은 조금씩 돌아갔다.
대자연이 원하는 바람을 불어주지 않듯이 세상도 원하는 바람을 불어주지 않았다. 땀과 눈물로 맞서 견딘 바람이 더 많았다. 어쩌다가 사업 바람개비가 조금 돌아갔다. 자신감이 들었다. TV의 주요 부품인 일본산 섀도 마스크를 대신할 신제품에 투자했다. 실제 S 회사는 이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테스트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아무런 근거 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늪에 빠졌다. 아내에게 깜짝선물 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욕망은 커지고 이성의 눈은 어두워졌다. 바람개비는 결국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는 바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팔십 성상에 무슨 신바람 맞을 날이 있을까. 혹시 오더라도 덩실덩실 춤출 일이 아니다. 더는 바람개비를 만들 일이 없고, 바람을 일으키려 죽어라 뜀박질칠 힘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풍력 발전기를 보면 다시 유년의 언덕에 오르고 싶다.
돌아보니 달려온 길이 아득하다. 단 하루만이라도 유년의 언덕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욕망도 질투도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바람개비를 다시 돌려보고 싶다.
*대흥동 공설운동장(현 시기동 삼화그린아파트 터)
첫댓글 팔십이 된 작가가 유년시절 바람개비의 추억을 안고 원하는 바람을 일으키고 싶었던 삶을 쉬운 어휘로 잘 풀어 썼네요.
바람개비에 대한 의미화가 마음에 와 닿는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