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81호 수직적, 수평적 감사는 만사형통의 열쇠다 (딤전1:12)
70이 넘도록 살아보니 진리가 하나 있습디다. 그것은 ‘감 씨를 심으면 감이 나고, 가시나무 씨를 심으면 가시나무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실 것입니다. 성경에도 엉겅퀴를 심고 무화과를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7:16).
그렇다면 감사의 씨를 뿌리면 어찌 될까요? 당연히 감사의 열매가 열리지요. 누가복음 17장에 예수님이 한 촌에 들어가실 때 문둥병자 열 명이 고쳐달라고 소리 높여 예수를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모두를 고치셨는데, 그중 사마리아인 하나만이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례했습니다(눅17:15).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했더니 육체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약속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의 씨를 뿌리면 당연히 감사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50:23). 정말 그런지 역대하 20장을 볼까요. 여호사밧 왕 때의 일입니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에워싸서 이스라엘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성가대를 세우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대하20:21) 하며 감사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요? 적군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서로 칼과 창으로 찔러 자멸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감사를 드리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위력입니다.
저는 올해 목회 40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축복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감사했다.” 사실 제가 걸어온 길은 물 없는 사막이요, 눈 덮인 산야 같은 힘든 길인지라 원망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감사뿐입니다.
그래서 교계로부터의 제명을 받았을 때도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함께 떡을 떼며 감사했고, 매스컴의 매도에 맞대응하라고 했을 때 맞대응 대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사의 씨를 뿌렸더니 감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디다. 하나님이 저를 세계 복음화의 기수로 세워주셔서 70여 개국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우편배달부가 배달을 하면서 오가는 길에 꽃씨를 뿌렸더니 한 해가 지나고 나니까 지나가는 길이 온통 꽃길이 되었다지 않습니까? 정말 그럽디다. 감사의 씨를 뿌리니 그것이 열매가 맺히고, 삶이 꽃길이 됩디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둥병을 고침 받고 감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린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이는 감사하지 않은 자들에게 하신 책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 그 아홉이 우리는 아닐까요? 우리는 영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대속하게 하사 우리를 구원하셨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가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것과는 비교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감사를 했습니까? 고침을 받고도 감사 없이 돌아가버린 아홉 문둥이는 아닐까요?
더욱이 부족하기만 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은혜를 또 어찌한답니까? 우리를 주의 종으로, 장로로, 안내위원으로, 조장과 구역장으로, 성가대원으로 써주셨는데 사마리아인처럼 소리 높여 감사해야 옳지 않겠습니까(딤전1:12).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하나님은 감사받기를 기뻐하사,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 하십니다. 하나님은 황소를 드리는 자보다 감사하는 성도를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깨닫는 자의 고백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십니다. 저도 제자들 중에 길러준 은혜에 감사하다며 찾아올 때 정말 기쁩니다. 그가 사들고 온 선물보다 찾아온 그의 발걸음이, 그의 마음이 더욱 기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매번 힘들다, 춥다, 덥다, 먹을 게 없다 하면서 불평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늘 이렇게 불평의 씨를 뿌리니 불평거리만 늘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라도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삽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20).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수직적 감사라면, 내 주변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은 수평적 감사입니다. 가까이는 내 부모, 형제요, 그다음은 이웃이요, 회사 동료와 상사, 학교의 스승, 교회에서 목사님과 성도에게 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수직적 감사만 잘한 것이 아니라 수평적 감사도 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고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감사에 인색하지 말고, 감사를 입으로,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내에게 “정말, 고마워. 넉넉지도 않은 살림인데 잘 살아줘서.”라고 해보세요. 남편에게도 “힘들지? 그래도 용기 잃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해보세요. 가정에 꽃길이 열린다니까요. 애들에게도 “고맙다. 잘 커줘서.” 이러면 나쁜 길로 가라고 떠밀어도 나쁜 길 안 간다니까요. 아랫사람에게 감사한다고 하면 큰일 납니까? 인격이 땅에 떨어집니까? 저는 직원들이나 제가 기른 제자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 교회로 쓰고 있는 체육관 직원들에게도 항상 감사하다고 합니다. 감사는 인격의 척도입니다. 감사하면 존경을 받게 되고, 그들이 광고매체가 되어 우리 행위를 보고 그들이 우리를 신뢰하게 되고, 우리가 믿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도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은 감사에 조건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떨어졌지만 감사했고,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칠 배가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질 위기에서도 감사했으며,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아들 압살롬을 피해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감사했고, 바울이 그가 주리고 헐벗고 매 맞으며 세상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받으면서도 늘 감사했던 것처럼 수직적 감사가 이어질 때, 그리고 주변에 늘 감사를 표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시편 91편의 말씀이 우리 삶에 나타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시다. 할렐루야!
감사란 은혜를 아는 자의 표현이다
감사란 인격의 척도요 인생의 방부제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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