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엔 사랑하는 딸을 잃고(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땅에 (哀哀廣陵土)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雙墳相對起)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夜夜相追遊)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浪吟黃臺詞)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누나.(血泣悲呑聲)
▶이 시는 허난설헌이 딸과 아들 차례로 여의고서 쓴 시이다.
허난설헌의 불행이 본격화된 것은 어린 나이에 안동김씨 김성립과 결혼하고서부터다. 남편은 허난설헌의 재주에 주눅이 들어 밖으로 나돌며 기생집 등을 전전했고 시어머니는 그를 구박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밤새 잠 못 이루었으니/ 먼동 뜰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자국 많으리(愁人獨夜不成寐/曉起鮫綃紅淚多).' 독수공방을 그는 '사시가(四時訶)'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신세이니.'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허균이 쓴 것으로 배웠고 이 소설 덕분에 누이 허난설헌보다 허균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허난설헌 못지않게 재주가 많았던 허균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를 펼 수 없었던 누나와 달리, 좋은 가문과 재주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요즘의 대통령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의 동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외무부 장관인 정2품 예조판서까지 지냈고 여러 차례 조선을 대표해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하지만 중세 조선이 용납할 수 없었던 자유분방한 정신으로 파직과 복직, 유배를 반복해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고 결국 능지처참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유교의 성리학을 신봉하던 봉건적 조선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억압했던 불교, 도교 등에 심취했던,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의 선구자였다(일각에서는 그가 청나라에 사신을 왕래하며 천주교도 접했으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해군의 스승인 유몽인은 허균이 고서를 암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불도 3가의 책을 시원하게 외워내니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고 감탄했다. 그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 고승들과 교류했고 삼척부사 시절 불상 놓고 염불했다고 탄핵되어 쫓겨나며 '문파관작(聞罷官作)'이란 글을 남겼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온 것은 / 내 마음 달랠 것이 없어서라네 / (중략) / 내 분수 벌써 벼슬과는 멀어졌으니 /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하랴 /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 인생의 부침을 다만 천명에 맡길 뿐 /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 법도를 지키게나 /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인생을 이루겠네.'
그는 일찍이 서얼, 서자들과 가깝게 지냈고 이와 관련된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서얼 제라는 신분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홍길동전>을 허균이 썼다는 기존의 학설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이 아니더라도 서얼 제도 비판 등 중세 조선의 질서를 비판했던 허균의 자유로운 정신, '근대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문헌들은 많다.
'서얼 출신이라고 인재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했다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을 쓰지 않는 제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늘이 낳았는데 사람이 그를 버리니, 이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인재가 버려지고 있다'는 뜻의 <유재론(遺才論)>에서 허균이 편 주장이다.
백성들은 아무 권리 의식 없이 사는 항민(恒民), 수탈당하며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이 아니라 잘못한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호민(豪民)이 되어야 한다는 <호민론>도 주목할 만하다. '천하에 가장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특히 호민은 딴 마음을 품고 자기 욕심을 실현하려는 자로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백성의 원망은 고려 말보다 훨씬 심하다.'
조선의 기본 틀인 유교와 신분제를 뛰어 넘었던 그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은 정적들로 하여금 그를 '천지간의 괴물'이라느니 '올빼미 같고 개돼지 같은 인물'이니 하는 비판을 하게 만들었고, 그를 사형시킨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했다. 정조와 고종 때도 복권이 논의됐지만 노론의 반대로 그는 대한민국이 생길 때까지 끝까지 복권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이단아 중의 이단아'였다.
출처 :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