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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제1독서 : 사도 6,1-7
제2독서 : 1베드 2,4-9
복 음 : 요한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예능 프로가 있습니다.
잘 보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 보면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능 촬영지에서 직접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현장감까지 더해져서 큰 재미를 얻을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과 실제 촬영을 비교하면 방송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목사, 교무, 신부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입니다.
출연 제의를 받고 이 방송을 다시 보기로 보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 재미를 기대하며 방송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촬영을 모두 마친 뒤에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1시간 방송 분량을 위해 자그마치 6시간 넘게 촬영하는 것입니다
(그 뒤 촬영 제안이 오면 늘 촬영 시각을 묻게 됩니다).
막바지에는 지쳐서 가만히 있자, 담당 PD가 스케치북에 글을 적어서 번적 들었습니다.
그 글은 이러했습니다.
“신부님, 웃으세요. 그리고 말 좀 하세요.”
너무 힘들어서 표정이 굳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 몇 번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하긴 방송은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당연히 재미있게 편집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너무 힘들더군요.
이 촬영 후 방송 출연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입담뿐 아니라 체력이 좋아야 방송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보여주기 위한 것과 실제의 간격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을 보고 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진실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영적인 진실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또 함께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보려 합니다.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청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하시는 주님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 큰 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입니까?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뵌 것이다.”라는 말씀을
복음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입니까? 사랑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도 사랑인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기도를 다시 새겨듣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 사랑을 향해 흘러
다시 제게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당신 사랑 안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 때만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만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는 뭔가 필립보처럼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할 때
“나는 당신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줍니다.
서로 나누어 드십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죽기까지.
“나는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어라.”는 말은
다름 아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생명을 내어 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이 나눈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이지요.
따라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얼마나 깊이 하나가 되어 일치를 이루는가?
그런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 산다. 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5주일을 지내며, 우리는 다시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누군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누고, 당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는 ‘빵을 먹는 사람’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바로 당신을 모심으로써 당신과 하나가 되어
당신이 행하신 사랑의 행위, 사랑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를 빵으로, 밥으로, 하늘로, 바로 사랑으로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부활 제5주일을 맞으며,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으로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묵상하며 미사를 계속합시다.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어 주시고
당신이 살아있는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차지하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가 34번‘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마음을 다하여 부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말씀으로 안내되고, 진리는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품위를 지켜 살아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이
하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경로, 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구원의 길잡이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헌신과 사랑,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17,17),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요한1,14)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이론이나 이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있고 길이 아닌 진리는 이념에 더 가깝고 이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토마시 할리크).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옳고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가 구원이요, 사랑임을 경험하게 되고
비로소 진리 안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이 만났습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느님의 말씀, 약속, 하느님의 충실함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커감으로써 이런저런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과부들의 배급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때 사도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하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 일곱을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부여잡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을 펴십시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17, 3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삶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영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선언하셨고,
미사 안에서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영적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됨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모든 것에 앞세우는 현실입니다.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형제간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이웃 간의 관계도 냉랭해집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가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이웃 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낳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잃어버린 생명과 평화와 화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삶을 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실천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 형제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세상이 맑아집니다.
어렵고 힘에 겨울수록 진리의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길을 걷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됩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푯말 밑에 낙서가 적혀졌습니다.
뭐라고 쓰였을까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것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 여정은 모두 공사 중입니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아버지 집이고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가는 길에서 방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순례의 길을 걸어
마침내 그 공사가 마무리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서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 은총이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 (요한 14,12).
모쪼록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 할 수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라는 글로 마감합니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평탄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사람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열정적인 선교로 공동체가 성장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교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눔’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과부, 어린이들이 나눔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에 불평과 불만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망이 깊고, 바른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 나눔을 맡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 준수에 대한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모르기도 했고,
자신들의 전통과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 규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의를 교회는 ‘공의회’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저녁 미사가 있는데 오전에 요양원 미사를 부탁받았습니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마음으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제게 즐거움을 주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했을 겁니다.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요양원 미사를 하는 것이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욕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입니다.
욕심 때문에 창고를 가득 채웠던 부자는 하느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별 지구가 병들어 가는 것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의 교만함에서 왔습니다.
교만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큰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쓰러지곤 합니다.
작은 나무들은 큰바람에도 쓰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유혹이라는 바람이 불 때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것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과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성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토마스가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했던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시다.
예수님은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지만, 거기에 강조점은 길이다.
여기서 생명과 진리는 예수께서 안내하시는 목적지라기보다
그분이 자신을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길이신 것이다.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계시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또 역사 내에서 활동하며 계시를 전해주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동일시되고 있다.”
(I. De La Potterie, La verité dans st. Jean, vol. II, Roma 1977, p. 1009).
이 진리는 우리의 사고나 덕을 닦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생의 신비를 통해, 또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살아있는 길(히브 10,20 참조)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말씀을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당신과 하나이신(요한 10,30; 17,11.21-22)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신다.
그분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입증해주는 말씀과 일들을 보고 체험했음에도 말이다.
그것을 보는 눈은 믿음의 눈이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돌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돌은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머릿돌에다가 매 순간 자신들을 쌓아 나감으로써
교회라는 신령한 집을 완성해 나아간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살아있는 돌이신 그분과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1베드 2,5) 드리는
사제직을 부여받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신령한 제사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의 하루를 받고 있다.
그 하루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하루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길지도 부족하지도 않으며, 별로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루를 걸작이 되게 살라고 요청하신다.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 하루가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인간적 차원에서 지닌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 하루를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역시 열심히 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 신령한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사도행전 6,1-7의 일곱 부제의 선발은
우리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에 대한 봉사도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부여받고 있는 왕다운 사제직의 요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시며,
그 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으며, 그분을 닮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 방법은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하여 매 순간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신령한 제사를 바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인생행로’ 혹은 ‘인생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로’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이 ‘나그네 길’임을 말해줍니다.
인생이 ‘나그네살이’라는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길을 걷는 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곧 ‘참된 길을 걷고 있느냐?’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참된 길인가?
또한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 입니다.
간혹 길을 걸어가다 보면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길)를 아십니까?” “참된 길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며,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신 고별사의 시작 부분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이 귀중한 예수님의 유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고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고 하십니다.
장차 당신이 제자들 곁을 떠난다 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 어떠한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에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이 ‘나그네 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요한 14,2-3)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미련해(정해진) 둔’, ‘예비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거의 매일 ‘시노달리따스’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알려주시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도’입니다.
‘도’는 진리를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길’이 ‘참된 길’ 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런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론이나 이념, 혹은 진리에 대한 개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교리나 이념을 초월하는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곧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 스스로를 두고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만족과 허영심을 채워주지만,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습니다.
곧 예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 인격으로 살아계시는
진리이신 생명을 믿고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오늘 여러분이 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실행하는 일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
주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아버지를 믿게 하소서,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믿고 의탁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한달이 훌쩍 지나 벌써 부활 제5주일을 맞이했네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반복해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새로움"(new)입니다.
새로운 노래(입당송), 새로운 교회 공동체 구성(제1독서 사도행전),
새 하늘과 새 땅(제2독서 요한묵시록), 새 계명(요한복음)...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셨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이 되었음을 증거 하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
성령강림대축일을 향해 가는 부활 제5주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셨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
인간에게 영광이라면 흔히 출세,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지고 누리고 계시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신"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켜 "영광"을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적 고정관념으로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싶네요.
생명의 주인, 시간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 불사불멸을 누리는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신이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고통과 굴욕과 죽음"이라는 영역에까지 들어가신 예수님은,
빛이신 하느님 존재 뒤편의 그늘, 어둠의 절정에까지 침투하심으로써
신의 영역을 확장하신 것이고, 인간의 마지막 원수요 한계인 죽음을
몸소 겪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심으로써 진정한 완전성을 쟁취하신 것이라고!
아드님의 온전한 순명은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렸고, 하느님께서 죽으셨던 아드님을 친히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죽음의 권세까지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받으실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그저 자랑삼아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도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라는
이 새로운 계명을 이해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태동 과정이 마치 교과서처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사도 14,22)합니다.
그들 모습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좋고 쉽고 편한 꽃길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사도 14,22)한다는
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사도 14,23)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중심을 둔 교회 공동체에 외적 조직과 제도까지 정비하는 모습이지요.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은 세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신부인 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혼인 잔치를 관상합니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전 것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기"(묵시 21,3)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씀이지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떠돌 때
하느님께서 그들 한가운데서 천막을 옮겨 다니며 현존하셨지요.
이후 성전 안 지성소에 머무르시다가, 육화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함께 숨 쉬고 울고 웃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요한 13,33)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내 현존을 이어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들의 활동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고요.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 부족하기 짝이 없고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기꺼이 당신의 처소를 지으시고 누추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하느님 나라인 "새 하늘 새 땅"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현실을 살면서도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하느님의 힘찬 말씀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고통과 죽음이라는 "이전 것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체험한 인류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완성될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는 기대 가능한 실재가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 현존의 도구로서의 소명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입니다.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성공을 통해서건 실패를 통해서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각자가 제2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 조건, 비결은 우리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께 "새로운 노래"(입당송)를 부릅시다.
그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니까요.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김찬미 수녀
예수님이 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일까?
저에겐 이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예수님이 앞서가신 길을 따라가기에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말하고 행동해보니
나도 이웃도
그르침이 없고 자유로워지기에
진리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때로 밤 중에 눈을 떠도
예수님이 함께 있기에
살아보고 싶고
하느님 마음에 꼭 들도록
살고 싶게 하시니
생명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기쁘고 떳떳하게 자유롭게
꼭 더 살고 싶게 하시니
예수님은 저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매력 있쥬?
예수님하고 같이 살 사람 손!
[출처] 요한 14,1-12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