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9월 3일 中일원서 진행 지도법사 설정 스님 등 80명 참여 동·서양문명 교류 현장 실크로드서 옛 구법승의 ‘위법망구’ 정신 배워 맥적산·병령사 석굴 위용에 감탄만이 돈황 보존위한 중국 노력 ‘반면교사’ 베제크릭 석굴서 탐욕·무지 폐해 절감 |  | | ▷ 조계종 교육원 실크로드 불교 유적 순례단이 9월 1일 투르판의 베제크릭 석굴에서 참선을 하고 있다.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실크로드. 말 그대로 당시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을 교류하기 위한 상업루트였지만 이 길을 통해 많은 구법승들은 부처님 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구법승이 실크로드의 시작인 중국 서안(옛 장안)에서 인도까지 가기 위해 걸린 시간은 대략 6년. 지금은 서안과 키르기스스탄까지 5500km의 고속도로가 놓였지만 옛 구법의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실제 문헌에 따르면 740명의 구법승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고, 생환해 돌아온 구법승은 63명, 전체의 8.5%에 불과하다. 오로지 신실한 구법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처님 법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옛 선지식이 걸었던 ‘구법의 길’ 실크로드. 이 길 위에 후학들인 한국의 조계종 스님들이 섰다. 조계종 교육원(원장 현응)이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개최한 ‘실크로드 불교유적 순례’를 위해서다.
조계종 승려 연수 교육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순례에는 종단의 명망 높은 스님들이 함께 했다. 지도법사로는 이례적으로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이 참여했으며, 순례단에는 前 포교원장 혜총 스님, 종책특보단장 정념 스님과 비구·비구니 스님 70여 명이 동참했다. |  | | ▷법문사를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전에 절을 올리고 있다. |
“옛 선현의 구법 정신 배우자”
순례단은 실크로드의 시작점인 서안(西安, 옛 장안)의 법문사에서 첫 일정을 시작했다. 부처님 지골사리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 서안 법문사는 대륙적 대찰의 면모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개보수와 증축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나서 불교와 유교를 경쟁적으로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졌던 진신보탑에서 입재식을 봉행한 순례단은 이번 순례를 통해 옛 구법승으로 발자취와 정신을 되새길 것을 다짐했다.
설정 스님은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구법승들이 법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면서 “이중에는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스님도 있다. 옛 선지식들이 걸어간 이 험로의 일부를 후학인 우리가 일부 순례하고 그 발자취를 돌아보려 한다”고 순례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어 “이번 순례가 옛 스님들의 발자취와 향훈을 돌아보고 ‘위법망구’의 정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자연과 大佛의 조화, 감탄만이 입재식을 마친 순례단은 본격적인 실크로드 탐방을 이어갔다. 차로 8시간을 달려 천수에 도착한 순례단이 찾은 곳은 맥적산 석굴. 중국의 4대 석굴 중 하나인 맥적산 석굴은 깎아진 듯 한 산 절벽 곳곳에 석굴과 부처님 상이 조성돼 있다. 석굴은 동서로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현존하는 것은 194개다. 동쪽 54굴은 대형 석굴 위주로 대부분 늦은 시기에 조성됐고, 140개 서쪽 석굴은 상대적으로 조성 시기가 이르다. 석굴에 봉안된 불보살상만 7200여 구이고 이들은 대부분은 돌을 깎아 형태를 만들고 진흙으로 모양을 만들어 채색한 ‘석태니소(石胎泥塑)’ 형식으로 조성됐다. 벽화는 1000㎡에 이르며 본생도(本生圖)와 서방정토변상도와 같은 벽화가 그려졌다.
답사에 동참한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맥적산 석굴의 불상은 북위시대 조성된 ‘수불청상’ 형식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지는 불상을 변화를 만나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유 교수는 한국 마애불에서 사라져 복원되지 않고 있는 예불 공간인 ‘전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유 교수는 “서산마애삼존불 등 마애불 앞에서는 일반적으로 예불을 위한 공간인 전실이 있었다”면서 “현재는 이 같은 전실을 복원하고 있지 않다. 전실이 복원돼야 전국에 산재된 마애불들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예경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 | ▷병령사 석굴의 171굴 미륵대불의 모습. 그 크기가 27m에 이른다. |
난주에서는 병령사 석굴을 답사했다. 현재 병령사 석굴로 가기 위해서는 40여 분을 배로 이동해야 한다. 이곳에 댐이 건설됐기 때문이다. 병령사가 개착된 난주 용정현은 서쪽으로 하서지역, 동쪽으로는 서안이 이어져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그 옛날 스님과 상인들은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 여행길에 올랐다.
병령사 석굴은 배에서 내려 입구에서부터 10여분을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171굴 미륵대불의 모습이다. 높이만 27m에 이르는 이 대불은 그 자체 위용에 압도된다. 주위 계곡을 굽어보며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티베트어로 만불동(萬佛洞)인 병령사에는 총 184개의 크고 작은 석굴이 있으며, 이중 특굴로 지정된 169굴이 가장 유명하다. 이번 답사에서는 지도법사 설정 스님과 일부만 친견할 기회를 가졌다. 스님들과 함께 가파른 계단을 한참을 지그재그로 오르니 60m의 절벽 위에 조성된 169굴이 모습을 보였다.
천연 용동을 이용해 만든 169굴은 곳곳에 다양한 불보상이 조성돼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병령사 소조불입상이다. 이 소조불입상은 굽타 시기 불상 양식을 가졌으며, 건흥 5년(424)이라는 조성 묵서가 남아 있어서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석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밖에도 아미타삼존상부터 다양한 소조불, 보살상, 반가사유상, 잘 찾아볼 수 없는 고행상 등이 조성돼 석굴 자체가 ‘불국토’였다. 색다른 체험, 중국 열차 여정 순례단은 난주에서 돈황. 돈황에서 투르판으로 가는 길은 열차를 이용했다. 중국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아직 서쪽으로 가는 열차는 아직도 낙후돼 있다. 6인실침대칸의 경우 별도의 칸막이 없이 객실이 복도에 노출돼 있고, 침대 시설 자체도 부실했다.
열차를 타기 전 중국 현지 가이드는 주의점 몇 가지를 일러줬다. “중국 기차 열차칸은 탑승 후 검표를 합니다. 표를 내면 인증 카드를 주고 내리기 30분 전 표를 돌려받는 시스템입니다. 일부 중국인들은 파자마를 입고 다니거나 침대에서 술을 먹기도 하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중요한 물품은 도난 염려가 있습니다. 꼭 몸 가까운 곳에 두시기 바랍니다.”
6인실에서 짐을 푼 순례단은 좁은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방장 스님부터 재가 스태프까지 예외는 없었다. 다행히 여정 중에는 주의를 줬던 파자마 차림의 중국 아줌마와 술에 취한 취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낯선 곳에서의 낯선 경험은 두려웠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접한 기쁨도 함께 존재했다. |  | | ▷돈황 막고굴 앞에서 순례 대중이 구법승을 기리는 위령재를 봉행하고 있다. |
돈황 석굴 보존위한 중국의 노력
열차를 타고 도착한 돈황. 막고굴로 잘 알려진 돈황은 기원전 117년 한 무제에 의해 건설됐으며, 실크로드에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다. 그만큼 구법승들의 이동도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막고굴의 수천 개의 석굴은 구법 역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돈황에서 순례단은 유림굴과 막고굴 2곳을 답사했다. 두 곳 모두 돈황을 대표하는 불교 예술이다. 앞선 맥적산과 병령사 석굴은 불상 위주의 석굴이라면 돈황의 석굴은 벽화가 중심이다.
돈황의 대표 석굴인 막고굴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 유림굴과 병령사 석굴도 마찬가지였지만 내부 촬영은 엄격히 금지됐다. 오로지 눈과 귀로 수많은 유적들을 담아가야 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돈황 막고굴의 진수를 알 수 있는 체험관을 막고굴 근처에 건립했다. 별도로 예약을 해야 하는 곳으로 막고굴의 유명 석굴들을 3D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단 역시 미리 예약을 해 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돔 형식의 화면에 막고굴의 전실이 투영되고 불보살상은 사방을 돌며 조형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한국어 더빙도 이뤄져 쉽게 이해하게 했다. 이는 단순 관람 일변도의 한국불교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부분이다.
막고굴 천불동 석굴들은 벽화도 많은 가치를 가진다. 그와 함께 그 위용도 눈길을 끌었다. 막고굴의 동굴을 전부 이으면 1618m가 되며, 벽화의 면을 합치면 25,000㎡에 이른다.
30년 전 막고굴을 찾은 적이 있는 지도법사 설정 스님은 돈황 석굴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국의 노력에 감탄했다. 설정 스님은 “30년 전 막고굴에 왔을 때에는 정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은 중국 정부의 문화 유적 보존 열기를 느낄 수 있다”이라며 “한국은 문화 융성을 외치지만 전통문화 보존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노력을 한국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 | ▷돈황 막고굴에서 위령재를 봉행한 이후 가진 기념촬영 모습. |
탐욕과 무지의 폐해의 현장에서
〈서유기〉의 화염산으로도 유명한 투르판에서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절감했다.
화염산을 넘어 순례단이 도착한 곳은 베제크릭 석굴.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의미의 석굴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불상은 없고, 불화는 뜯겨나갔다. 그나마 잔존 불화는 진흙칠이 돼 있거나 불보살의 상호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석굴의 불상과 불화가 훼손된 것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도굴과 이슬람 교도들의 훼불이 주요 요인이다. 독일의 그륜베델, 르콕, 일본의 오오타니, 러시아의 올젠버그, 영국의 스타인 등이 차례로 드나들며 벽화와 불상을 마구잡이로 절취했다. 오오타니의 경우 이 벽화들은 한국에 가지고 들어왔으나 일제 패망으로 회수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베제크릭 석굴 벽화 4점이 소장돼 있다.
남아있는 벽화를 답사하니 불화가 매우 한국적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광배의 화염 문양과 측면을 보고 있는 보살의 상호 등은 한국의 불화와 비슷했다. 유근자 교수는 “베제크릭 석굴은 축조 석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의 토함산 석굴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탐욕과 무지의 폐해 현장에서 순례단은 예불을 올리고 참선을 했다. 이를 통해 선지식들의 구법 열정을 다시 되새겼다.
참선 마친 이후 설정 스님은 순례 대중에게 설법을 했다. 설법 도중 스님은 훼불의 모습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이기도 했다.
설정 스님은 “이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지고 오는지를 절감했다. 서구 열강의 탐욕으로 벽화는 뜯겼고 이슬람의 무지로 불화는 훼손됐다”면서 “불상과 불화는 부처님의 지고지순한 가르침을 전한 것이고 신실한 신앙의 형태다. 그것을 탐욕과 무지가 파괴한 것”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부처님은 탐욕과 무지를 경계하셨다”면서 “집착과 탐욕의 신앙인과 일반인들을 우리는 개도해야 한다. 개도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번 순례는 더욱 가열차게 정진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더욱 진지하게 정진하자”고 강조했다. |  | | ▷종책특보단장 정념 스님이 추모 리본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
“우리는 길 위의 수행자”
순례단은 마지막 여정인 우루무치에서 천산 천지를 찾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7박 8일의 여정에서 순례단 스님들은 옛 선지식들의 구법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옥천암 주지 정경 스님은 “서산 마애삼존불의 원류가 있다고 해서 답사에 참가했다. 이번 순례에서 이를 확인하고 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청암사 승가대학 도반들과 참석한 대전보훈병원 법당 주지 선명 스님은 “내 자신을 가다듬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서 “모습과 시대는 다르지만 혜초, 현장 스님과 같은 수행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교육원에서도 이 같은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제방에서 수행 중인 선우 스님은 길 위에 있는 것이 곧 수행자의 길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다. 선우 스님은 “2004년 5대 적멸보궁을 도보 탁발 순례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길 위에 있는 것이 곧 스님의 삶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번 순례를 통해서 다시 한번 당시의 결심을 되새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  | | ▷前 포교원장 혜총 스님이 풍등을 날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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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혹 장거리 비행이 싫어서 다른나라 여행을 못간다는 분들을 봅니다..현대에 하늘을 나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반해.....그 옛날에 도로도 제대로 안되어있을텐데 어떻게 걸어걸어 갔을까요..그분들의 힘든 여정을 이겨내는 혹은 받아들이는 혹은 즐거워할 마음등을 상상하면 웬지 가슴이 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