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11월
황인숙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
햇빛을 담뿍 받고 서 있는 나무와 벤치에 꼬부리고 잠든 실직자의 대조. 자연의 자연스러운 충만함과 대비되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발생시킨 불행은 더욱 비극적으로 여겨진다. 시인은 능청스럽게 나무와 햇빛의 아름답고 따스한 결합을 진술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슬그머니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놓고 있다. “싸늘한 바람”에 “가랑잎처럼” 불려갈 실직자의 비애를.
남진우 (시인, 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