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무등산수박
사돈에게 귀한 수박 한통 받은 이초시먹지 않고 장인어른께 보내는데…
아침저녁으로 오싹한 한기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백로도 지나 추석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 이 초시는 깜짝 놀랄 선물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광주 무등산 자락 운림골에 사는 사돈이 커다란 무등산수박을 보내온 것이다. 임금님 진상품인 무등산수박을 먹어 보기는커녕 난생처음 구경하는 터라 이 초시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른 식구들도 무등산수박을 둘러싸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도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어머니, 그러니 이 초시 마누라가 며느리를 부르는 목소리부터 비단결처럼 고와졌다.
“아가! 설거지는 내가 하마. 여기 와서 네 친정아버지가 보낸 무등산수박 좀 보거라.”
이 초시 마누라는 그러면서 벌떡 일어섰다.
“영감, 얼른 칼을 가지고 올게요.”
“아서, 아서!”
이 초시가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한 이 초시네가 그 귀한 무등산수박을 칼로 동강 내어 식구들이 와그작와그작 한순간에 없애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안방 윗목에 신줏단지 모시듯 무등산수박을 앉혀 놓고 보자기를 덮은 후 이 초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젊은 시절, 과거를 보겠다고 공부에 매달려 있을 때 새색시가 쌀독만 비면 친정으로 달려가 쌀자루를 이고 왔었다. 하지만 과거는 판판이 미역국을 먹었고, 살림은 갈수록 쪼그라져 처갓집 볼 면목이 없게 됐다. 결국 작년 장인어른 환갑잔치 때도 곶감 한 축을 싸 마누라만 보낸 터였다.
‘그래, 무등산수박을 장인어른께 보내자.’
이 초시가 그렇게 작정했지만, 며느리가 문제였다. 사돈한테 받은 수박을 다른 데 선물로 보낸다는 건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이 초시는 지붕 위에서 꾸덕꾸덕 마르는 반건시를 한보따리 싸서 며느리를 친정에 보냈다. 그런 뒤 지게에 무등산수박을 묶어 아들을 시켜 산 넘고 물 건너 제 외가로 보냈다.
이 초시의 장인, 오 영감이 사위로부터 무등산수박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자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하러 왔다.
“무등산수박은 말이여 씨를 받아서 우리 밭에 심어도 안된당께. 오로지 무등산 기슭에서만 된다 이거여.”
오 영감도 무등산수박을 호기롭게 콱 잘라서 먹어치울 위인은 못 됐다. 밤늦도록 생각을 거듭하다가 뒷산 산주 박 참봉에게 주기로 맘을 굳혔다. 산에 딸린 밭뙈기 몇 마지기를 부치고 있는 터라 내년 봄에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그럭저럭 추석이 닷새 남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추석 장에서 이 초시는 오 영감을 만났다. 장인어른을 모시고 주막으로 간 사위에게 오 영감이 말했다.
“이 서방, 그 귀한 무등산수박을 보내줘서 잘 먹었네.”
이 초시가 물었다.
“장인어른, 맛이 어떻습디까?”
“말로 이루 표현할 수가 없네. 입에서 살살 녹아~. 내 평생에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었네.”
추석 전날, 박 참봉네 머슴이 망태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이 초시를 찾아왔다.
“참봉어른께서 갖다 드리라고 합니다요.”
이 초시와 박 참봉은 가끔 주막에서 막걸릿잔을 나누는 사이로, 이 초시가 한번 사면 주머니 사정이 나은 박 참봉이 서너번 샀다. 지난달에 박 참봉의 청으로 보름 동안 박 참봉네 족보를 정리해 주었는데, 이 초시가 사례를 극구 사양했더니 추석선물을 보내온 모양이다.
“허~참, 내가 덥석 받아도 되는 건가?”
박 참봉네 머슴이 가고 난 뒤 이 초시가 망태기를 풀고 짚북데기를 걷어내자 무등산수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박꼭지가 말라비틀어졌지만 분명히 이 초시가 장인에게 보냈던 바로 그 수박이었다.
이 초시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수박이 돌고돌아 결국 내게 다시 왔구나. 우리 조상님이 드실 운명이구나.”
이튿날 추석 차례상에 무등산수박을 올렸다가 칼로 갈랐더니 속이 썩어 있었다.
첫댓글 싱싱할때 먹어야지 아끼면 저리 되는겨...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