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은 로마서에서 '남을 판단하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의 죄를 폭로한다. 이방인의 죄의 목록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위선의 죄이다.
.
이방인의 죄를 성경은 한 줄로 요약한다.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32)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과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옳다여기는 진리와 거짓이 바뀌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
2.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죄를 짓지는 않지만 그러한 죄를 짓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죄를 짓는다. 이런 판단의 죄, 정죄의 죄, 도덕적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죄는 위선이다. 존스토트는 "이방인의 죄는 적어도 일관성은 있다. 그러나 도덕적 판단의 죄는 옳지 않다고 아는 일을 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때문에 위선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죄를 짓고 있지만 자기들이 의로운줄 알기 때문에 구제불능의 상태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
목사님의 자녀로 늘 칭찬을 받으면서 자란 형제가 있었다. 누구보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교인들의 칭찬속에서 자랐다. 그런데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지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회사 사장님이 그들을 혼내지 않고 가만히 두기 때문이다. 그리 바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지각하는 동료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있었다. 이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
3.
그는 어린시절부터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처럼 열심히 한 노력을 통해 칭찬을 받았다. 사랑으로, 은혜가운데 선행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선행이 곧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런데 지각을 하는 사람과 자신이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되자 분노가 일어났다. 법을 어겼으면 혼이 나야 하고 법을 지킨 내가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마치 누가복음 15장의 첫째 형과같은 분노를 경험했다.
.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지만, 또한 자기의 의를 회개해야 한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도덕기준으로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격분할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 자신에게 그런 일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삶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몹시 화가나서 자기 혐오 또는 내적 고통에 빠질 것이다. 결국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다가 또 자신을 미워하는 양극단 사이를 비참하게 왔다갔다 할 것이다."
.
4.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은 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우월감을 즐기는 교만의 죄를 짓고 있다. 트럼프가 재선에서 떨어지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던 일들이 있었다. 미국의 한 신문에서 그 중심에 있엇던 기독교인들을 향해 '기독교 민족주주의 위험성'을 다루었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으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마치 요나처럼 말이다.
.
그러나 한쪽 극단에서는 그들을 향해 판단의 죄를 짓고 있다. 나는 그런 교회와 다르다. 나는 그런 목회자와 다르다. 나는 그런 기독교가 아니다라면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그들을 정죄하는 판단의 죄가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면서 집회를 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극우적이고 선동적일 때가 많다. 그러나 또 반대편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또 다른 자기 의를 쌓아갈 수 있다.
.
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단 자체를 하지 않고 머리를 비워야 하는가?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할 것이면 건설적 비판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을 하지만 건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제시해 준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말씀하신다.
.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바라잡아야 한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한 시험앞에 동일한 죄를 지을 수 있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
6.
즉 나의 판단이 교만의 죄냐 아니냐는 긍휼과 함께 분노가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세력을 향해 극도의 분노로 무덤으로 걸어가신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것을 '전사의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는 심령으로 올라가셨다.'고 표현했다.
.
토마스 보스턴도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볼 때 긍휼과 분노가 함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죄를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혐오스러운 질병에 걸린 아이를 보시는 심령으로 보신다. 아이를 향한 긍휼과 그 병을 일으킨 바이러스를 향한 분노가 동시에 일어난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의 뒷편에서 일하는 악한 세력을 향한 분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을 때 우리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고 자기 의에 빠지지 않고 나를 경계할 수 있다.
.
7.
데이비드 폴리슨은 <악한 분노 선한 분노>에서 슈퍼마켓에서 아이와 싸우는 엄마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엄마를 거슬리게 하면서 때를 쓰는 아이를 보면서 어떤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의 투정을 뺨을 때리고 아이를 두고 나가는 엄마를 보면서도 분노를 느꼈다. 이 두 가지 분노는 건강한 분노가 아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느꼈는데 이러한 상황을 만든 악의 세력을 향한 분노였다.
.
아이가 그렇게 성격이 된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는 환경 안에서 가난과 어려움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아이를 때리고 강한 분노를 표출한 이유도 아이의 행동을 넘어서 그녀의 삶의 무게가 그대로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헤어지고 가난해서 엄마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너무 지치고 힘들지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악과 고통의 세상 속에서 그녀도 찌들대로 찌들었을 것이다.
.
8.
이것은 두 사람을 향한 긍휼이다. 그리고 이 가정을 이렇게 몰아가는 악한 세력을 향해 분노하며 데이비드 폴리슨은 그 일이 자신을 상담이라는 직업으로 인도했다고 고백했다. 상담을 통해 고통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일에 쓰임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을 향한 긍휼과 악한 세력을 향한 분노와 그 사람의 죄를 바라잡는 정의는 언제나 함께 갈 수 있다.
.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은 늘 판단의 죄를 짓는다. 사람들을 평가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즐기는 교만의 죄를 짓는다.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판단 자체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좋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그리고 긍휼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 분노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향해 분노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살아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죄이다.
.
9.
분노와 긍휼은 함께 가야 한다. 정치권의 뉴스들을 보면 하나같이 조롱의 말들과 상대방에 대한 비난 뿐이다. 그런 문화 내러티브에 살면서 우리도 거룩한 문화를 생성하기보다 편승해서 동일한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판단의 죄를 저지르기 쉽다. 이것은 죄이지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들게 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죄이다. 긍휼과 함께 분노는 선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자기 우월감에 빠져 결국 자기 의라는 죄가 우리를 무너뜨릴지 모른다.
.
사람을 향한 긍휼과 악한 세력을 향한 분노와 그 사람들의 죄를 바로잡는 정의는 언제나 함께 갈 수 있다. 우리는 긍휼과 분노와 정의를 제자리에 둘 때 타락한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노와 긍휼이 있는 곳에 정의를 심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며 소명의 자리인지 모른다.
고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