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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누가복음11장1~13절
제목 : 제자도와 기도
‘경청’(10:38~42)과 기도는 제자도의 중요한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그들이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內容)과 태도(態度)에 대해 가르칩니다.
1.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1~4절)
1) 제자가 기도를 가르처 달라고 하십니다(1절).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신교는 마태복음에 있는 주의 기도를 천주교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를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3:21;6:12).
*3:21“[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곳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행10:3,9).
*행10:3,9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칩니다(2~4절).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1) 이렇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본문을 영원불변(永遠不變)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 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2) 아버지여.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냅니다(10:21 주석 참조).
*10: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요 20:17;롬 8:14-17).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합니다(마 6:9).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합니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레22:32;시79:9;사8:13;29:23).
*레22:32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시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합니다.
(4)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5)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
① '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 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Liefeld).
② '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16:4;신8:9) 이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습니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 여기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 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2. 간청하는 벗의 기도(5~8절)
1) 벗이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합니다(5절)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입니다.
한 친구가 찾아온 시각은 '밤중'입니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2)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6절).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됩니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습니다(마 2:9).
-중동 지방에서는 낮의 열기를 피해서 밤에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 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 하는 여행 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 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합니다.
3)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7절)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입니다.
첫째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줍니다.
4)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한 것을 줍니다.
여기서 '강청함'(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살전 5:17).“쉬지 말고 기도하라”
3. 하늘 아버지의 기도 응답(9~13절)
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9절).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됩니다.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2) 받을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니라(10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킵니다(시91:15;사58:9;슥13:9;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입니다.
3)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11절).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4)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입니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됩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입니다.
5)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13절)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문입니다(요 16:7).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 12:4-11=은사).
실제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로 확산되어갔습니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휴식을 취하셔야 할 만큼(마치시매) 오랫동안 간절하게 기도하십니다(1절).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분의 모든 삶이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자리’는 아버지와의 교제 안에서 쉼을 누리는 ‘안식처’이자,
동시에 아버지의 뜻에 내 뜻을 복종시키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주님처럼 주신 사명을 순종함으로 이루는 일은 ‘성실한 기도’로만 가능합니다.
2) 무엇을 구하고 소망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2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하라고하십니다.
이것은 내 입술의 간구만 아니라 내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내 욕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요즘 내 기도 제목을 나열해보십시오.
내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인지 살펴보십시오.
3) 일용할 양식에서 죄 용서와 악한 자의 유혹까지 내 생명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만 의탁하라고 하십니다(3,4절).
기도는 내가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내 힘과 자원만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크든 작든 기도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은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 없이 사는 것보다 교만한 삶도, 위태로운 삶도 없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더디게 보여도 ‘간절하고 꾸준한’(8절)
기도만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4) ‘간절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5~8절).
고집스럽게 막무가내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심정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10절)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무난한 삶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내가 안일한 것 일뿐, 간절한 기도가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삶은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내 영혼의 적신호입니다.
5)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9~13절).
진실하고 간절하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 가장 좋은 응답인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 없이는 주를 믿을 수도 없고, 주를 닮아갈 수도 없고, 주를 위해 살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