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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2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5,22-31
복 음 : 요한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에서 가장 기부를 잘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낯선 사람 도와주기, 금전적 기부, 자원봉사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세계기부지수(영국자선단체 자선자원재단과 미국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매년 발표합니다) 순위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나라가 있습니다.
동남아에 있는 미얀마(2022년은 5위입니다)였습니다.
이 나라의 1인당 국민 총생산(GDP)은 우리나라의 1/3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잘 사는 우리나라의 순위는 어떻게 될까요?
조사 대상 119개국 중에서 88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2년 보고서에 나오는 상위 10개국 중 우리보다 못 산다고 평가받는 나라가 너무 많습니다.
1위 인도네시아, 2위 케냐, 6위 시에라리온, 8위 잠비아, 9위 우크라이나.
모두 1인당 GDP가 현저히 우리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기부는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행복한 사람,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남을 위해 기부한 뒤에 심리적 포만감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라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엔도르핀 분비가 정상치의 3배까지 올라가며,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고,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가 증가해서
불면증과 만성 통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나 선한 일을 쳐다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만 봐도 건강해진다는 ‘마더 데레사 효과’).
주님께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받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특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 자체가 결국 나를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라는 분이 먼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팬데믹이 끝나면서 신문사에도 손님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올해에도 선배 신부님이 한 분 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면서 손님맞이가 시작됩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장을 봅니다. 숙소에 들어오면 간단한 안내를 합니다.
세탁기 사용법, 문의 비밀번호,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위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 줍니다.
지하철을 타려면 매트로 카드를 빌려줍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지내면 됩니다.
기상시간이나, 식사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여행을 왔으니 편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좋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분은 공원이나 산으로 가고,
문화를 좋아하는 분은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합니다.
직원미사에 함께 하기도 하고, 주일미사에 같이 가기도 합니다.
후배 신부님도, 동창 신부님도, 선배 신부님도 잘 지내다 가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모처럼 교구의 이야기도 듣고, 사제들이 함께 있으니 신학교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신학교에서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신학교에서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났습니다. 6시 30분에 아침기도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8시에 아침 식사가 있었습니다. 9시부터 수업이 있었습니다.
12시에 양심 성찰이 있었습니다. 12시 30분에 점심식사가 있었습니다.
2시 30분에 오후 수업이 있었습니다. 6시에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7시 15분에 묵주기도와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10시에는 취침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10년을 신학교에서 지냈습니다.
규칙이 있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규칙이 있어서 학업과 기도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녀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땅을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은 신학교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제가 되면 굳이 신학교의 규칙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도 식사 표시만 하면 되었습니다.
안 먹는다는 표시를 하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도시간을 따로 정하지는 않지만, 알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시간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만의 기도시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사도들을 보내면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회는 아직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이방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유대인들의 관습인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환영하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조상들의 제사문제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고,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상들의 제사는 한국의 고유한 관습이며 전통이었는데
교회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인정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설날과 추석에 조상들에 대한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사랑이라는 날개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율법과 규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 사귄다는 말이다. 사귄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사귈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따랐으며,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열매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리고 아들과 제자들 간의 사랑이,
이제 제자들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시사해줍니다.
곧 타인은 나의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동반자로 짝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고 하십니다.
이는 이미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 그 사랑을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손수 보여주실 바로 그 사랑,
“가장 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고 하십니다.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대체 친구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 되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이요, 또 하나는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친구 되는 조건은 주인이 하는 일,
곧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이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 친구가 되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알게 된 까닭에 예수님과도 그리고 우리 서로 간에도 친구입니다.
한편, 우리 편에서의 친구 되는 조건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라야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배척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놓을 때라야 친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들어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5,16)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벗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알려 주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벗으로 선택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바로 그 “가장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호소를 듣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네 친구들 사이에서 그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면,
그 열매는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요한 15,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우리를) 친구라 부르십니다!
종은 수직적 · 종속적 상하 관계에서 오지만 친구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주님의 친구로 불린다는 건
참으로 황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언젠가 아주 어려운 일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전에 다가올 일을 대충 짐작하게 해주는
꿈을 꾼 것이 떠올라 힘들지만, 응답을 했었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암시해 주신 것 같이 느껴져서였습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자상하고 섬세하게 존중해 주신 것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지요.
그분은 저만치 윗자리에 올라선 채 눈을 내리깔고
"너 따위는 몰라도 돼!"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심술궂은 주인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약한 만큼 더 세심하게 살피시며 눈높이에 맞게 말을 걸어오는 분이시지요.
그분의 이런 자상하고 겸손한 배려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나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굳이 캐묻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랑"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계명", "열매", "명령"은 모두 "사랑"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곧 사랑이고, 아버지가 사랑이시니 우리도 당연히 되어야 할 "모습"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전달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는 "우리"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먼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옛 유다의 관습을 강요해, 혼선을 주었던 이들을 "우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
여러분에게 가서 놀라게 하고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사도 15,24)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들도 "우리"의 범주 안에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체면을 유지하고 비판을 피하려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비겁함을 선택하지 않고,
다만 그런 의견이 "우리" 전체의 뜻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예수님에게서 "친구"의 지위를 얻은 사도와 원로들은
이 결정이 "성령과 우리"의 뜻임을 밝힙니다.
실제로는 결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는 두 존재,
하느님의 영과 피조물인 인간이 함께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이는 하느님 편의 무한한 겸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를 가능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사도 15,31)고 합니다.
그들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그들은 몇몇 주장 앞에서 어찌할 바 몰랐던 혼란에 대해 이해받았고,
이제 갓 태어난 신앙의 약함을 존중받았습니다.
또 자기들 문화와 풍습에 맞추어 신앙을 살아갈 방법을 배려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모교회의 "친구"가 되고
또 "우리"가 되었음을 확인하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나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받은
그 기쁨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일상을 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
온 세상에 깃든 하느님의 뜻에 깨어 있다면,
우리는 자분자분 당신의 마음과 뜻을 나눠주시는 주님의 자상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친구고, 그분과 함께 "우리"니까요.
우리끼리는 '척! 하면 척!'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습니다.
이 "우리"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신뢰는 아무리 깊고 어둔 밤이 다가와도
신뢰와 인내라는 마음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해 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벗님과 함께 "우리" 이렇게 고백합시다.
친구 예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마리 피앗 수녀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당신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하늘나라 신비를 알려 준
우리에게, 나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출처] 요한 15,12-17 부활 제5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