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9WKpSDBvn9w?si=qgxCPKqpBHbXZVYV
Brahms Double Concerto : David Oistrakh (violin) & Mstislav Rostropovich (cello) 키릴 콘드러신 지휘
세상을 떠난 친구들 - 슬픔에 빠진 브람스
<비극적 서곡>의 스케치는 1870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브람스는 클라라의 딸 율리에 슈만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1869년 율리에는 백작에게 시집갔고 브람스의 상처는 컸다. 고통스런 그의 마음은 <알토 랩소디>란 명곡을 낳았다. <비극적 서곡>의 재료가 적혀 있는 스케치 수첩의 대부분은 <사랑의 노래 Op.52>와 <알토 랩소디>를 위한 스케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서곡의 재료와 <알토 랩소디>가 브람스의 심리적인 면을 반영했으며, 당시 브람스의 심경은 ‘사랑과 슬픔’ 혹은 ‘사랑의 슬픔’으로 묘사할 수 있겠다. 1871년에 작곡된 <운명의 노래>에는 알토 랩소디의 영향이 남아 있다.
<비극적 서곡>이 본격적으로 작곡되기 이전 시기를 살펴보면 브람스를 슬픔에 빠지게 한 작품들이 상당히 있었다. 1879년 2월 16일에 클라라의 아들인 펠릭스 슈만이 병으로 열다섯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펠릭스가 시를 잘 쓰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시에 음악을 붙이기도 했다(Op.63-5. 6). 1880년 1월 4일에는 브람스의 친구 포이어바흐가 베네치아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이전에 포이어바흐의 계모 헨리에타와 오페라 대본에 대해 상담을 나누고 동화 <행복의 여신> 대본을 받은 적이 있다. 포이어바흐의 죽음을 슬퍼한 브람스는 1881년 여름 <애도가>를 써서 헨리에타에게 바쳤다. 1880년 5월에 본에서 열린 슈만의 기념비 제막식에 브람스는 클라라와 함께 참석했다. 여기서 브람스는 슈만의 라인 강 투신과 정신병원 입원의 비극을 떠올렸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람스는 이즈음 귀가 아팠다. 친분이 깊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의 우정에 벽을 느끼는 등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맛보았던 시기였다.
1880년 9월 6일 브람스가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독한 마음을 고백하며 비극적 서곡을 쓴다’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는 작품명을 ‘Trauerspiel Ouverture’라고 적었는데, 총보 최종 원고에는 지금 쓰이는 것처럼 ‘Tragische Ouverture’라고 적혀 있다. 브람스는 이 곡을 4손 피아노용 원고로 작곡한 최종고를 1880년 12월 중순경에 보냈고, 파트 악보와 총보는 1881년 7월에 시판되었다. 총보에는 <대학축전 서곡> 때와는 달리 ‘대 오케스트라를 위한’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오케스트라를 위한’이라고 씌어 있다. 빈 악우협회가 펴낸 브람스 작품 전집에서 <비극적 서곡>의 총보는 짐로크의 인쇄 악보와 브람스가 소유하다 현재 악우협회에 있는 초판의 견본, 거기에 짐로크에게 있던 브람스 오리지널 자필악보를 기초로 작성됐다. 3종 악보들이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독한 마음의 고백, 남성적 패기를 담은 에너지
<비극적 서곡>에 대해 브람스는 젊은 시절 비극적인 영웅을 다룬 고전 희곡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코리올란 서곡>에도 경의를 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비극적 서곡>이 단지 브람스의 심경뿐만 아니라, 비극적 드라마를 승화시킨 베토벤의 서곡에 상당하는 작품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곡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 d단조로 시작된다. 소나타 형식이지만 <대학축전 서곡>처럼 변칙적이지 않고 재료도 많지 않다. 투티에 의해 d단조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이 연주되고 나서 현으로 제1주제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조용하다가 후반은 행진곡풍이 되어 힘을 얻어간다. 이 주제를 관이 확보하면 곡은 주제 처리에 새로운 악상도 가한 경과부로 들어간다.
마지막 가까이에서는 바이올린에 싱커페이션을 동반한 온화한 파도와 같은 진행이 저음현의 d음을 지속음으로 한 다음에 d단조로 나타난다. 그것이 Ab장조로 바뀌며 호른과 관악기에 의한 부드러운 악구가 등장한다. 이내 일단락하고 바이올린이 F장조로 노래하는 듯한 새로운 선율을 2주제로 연주하고 나서 코데타로 들어간다. 코데타에서는 정열적인 고양과 긴장이 느껴진다.
클라이맥스 이후 팀파니만이 남고, 피치카토 화음에 이끌려 현으로 제1주제가 나오고 발전부가 시작된다. 템포를 늦춰 4/4박자가 되고 제1주제 후반부 행진곡풍 리듬을 잠시 다룬 후 현에서 관으로 이어받아 경과부 선율이 다시 D장조로 돌아온다. 비올라 이하가 제1주제 서두를 차례로 나타내고 호른이 그것을 확대하고 나서 비올라가 제2주제를 제시하며,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는다. 코데타 재현 이후 코다로 이동하고, 제1주제에 의해 고조되며, 일단은 그것도 진정되지만, 결국 d단조로 힘차게 전곡이 끝난다. <비극적 서곡>에서 비극은 질질 끌고 우울한 그런 종류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을 품에 안고 가며 힘차게 다루는 남성적인 비극이다.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의지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삶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파격적인 형식의 이중 협주곡
1885년 브람스는 교향곡 4번을 완성하고 나서 곧 다음 5번 교향곡 구상에 들어갔는데, 1887년 여름에 이 곡은 교향곡이 아니라 파격적인 이중 협주곡으로 탄생했고 브람스의 교향곡은 모두 4곡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브람스는 20대 초 젊은 시절에 만난 뒤 평생지기로 지냈다. 가끔 음악을 놓고 사소한 다툼을 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곡이 작곡되기 7년 전의 일. 요하임은 메조소프라노 가수인 아내 아말리에와의 사이에 둔 여섯 자식 중 막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이혼소송을 냈고 여기에 브람스가 끼어든 것이 큰 빌미가 되었다. 클라라 슈만은 요하임 편을 들었고, 브람스는 아말리에 편을 들었는데, 이러한 브람스의 태도 때문에 그만 두 사람은 절교 상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남의 부부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법.^^~
이후 오랫동안 브람스는 요하임과의 관계 복원을 위해 여러 모로 애를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 2번(1886)과 3번(1887)을 작곡했던 것도, 5번 교향곡으로 구상하고 있던 악상을 이중 협주곡으로 형식을 바꾸었던 것도 요하임과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요하임의 조언을 구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고 ‘더블 콘체르토’는 요하임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단지 친구와의 화해 목적만으로 ‘더블 콘체르토’를 썼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가 아닐까. 브람스는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와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에 관심이 컸는데, 말년에 역량이 성숙되자 이런 형식의 곡을 작곡하고자 한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낸 소산이었을 것이다.
첼로와 바이올린은 잘 섞일 수 없는 조합이다. 바이올린은 기민한 음색이고 첼로는 둔중한 음색이니 둘을 훌륭하게 블렌딩하기란 대단히 어렵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케스트라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니 셋 사이의 음색, 음역, 음량의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브람스의 이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묵직한 서사적 부분은 첼로가 감당하고(주로 1주제), 애틋한 서정적 부분은 바이올린이 소화함으로써(주로 2주제), 호른과 클라리넷을 내세운 오케스트라의 장대함과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것이다.
글쓴이 : 미술관지기(정문규 미술관)
https://youtu.be/94DVAAswKFs?si=wCUZRyaRfap_gNbN
Double Concerto for Violin & Cello in A Minor, Op. 102: I.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