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지 않고 달린다는 게 너무 힘이 든다. 가끔은 쉬고도 싶은데...열차를 멈추게도 하고 싶은데...시간의 쏜살같은 흐름처럼, 지침의 일 분 일 초도 아까워 하며 시간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정에 굶주린 나를 느끼곤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이다희의 노트 중에서』】
사방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주위가 온통 흑빛으로 감싸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점점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느끼며 다희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곳은 차라리 광활한 사막과도 같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지만, 자신이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공간은 마치 나사 여러 개가 빠져버린 부실한 기계처럼, 매우 허술해 보인다는 생각을 다희는 했다.
고오오...오오오......
야생동물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며 다희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흡사 무중력의 우주에 붕 떠올라 있는 것 같은,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이었다.
무서워...추...워......
다희는 두 손을 꽈악 움켜 잡으며 무의식 중에 한 발 한 발 발을 떼었다. 무섭지만 누구라도 나타나 주길 바라는 심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내처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에, 뭔가 사르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탁탁 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다고 다희는 순간 생각했다. 형체를 뚜렷이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 그 그림자는 자신의 뒤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손에서 진땀이 났다. 다희는 누군가의 강한 손길에 떠밀려 지고 있는 듯한 알 수 없는 느낌을 전달받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최대한 자세히 보려고 그림자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대자, 그가 일순 두 눈을 번쩍 빛내고 자신의 시선을 맞받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약간 굽은 듯한 등허리와 작은 체구의, 노파답지 않게 눈매가 강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이윽고 노파가 쉰 목소리로 입을 떼며 말했다.
"카젠에 온걸 환영한다.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무슨 말이죠? 할머닌 또 누구세요......?"
"나는 너의 '환상'이다. 사람들은 나를 마야라고 부르지. 카젠왕국의 예언자이기도 하다."
"......"
"오랫동안 피로 얼룩진 이 곳의 하늘에, 새로운 기운을 열어 줄 너의 힘을 나누어 다오. 카젠 은 너의 마음이다. 네가 보는 환상의 나라-. 자아, 눈을 떠라! 천귀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아귀를 따라가라. 힘이 되어 줄 거다."
다희는 노파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건 꿈이야. 터무니없는 일에 말려들 순 없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보니 노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카젠...카젠... 왠지 그리운 기분이 되살아 난다. 그것은 뭘까. 내가 서 있는 이 곳, 아아, 꿈이라면 퍼뜩 깨어나면 좋으련만.
다희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빙시! 쪼다! 정신차려, 이다희!
그때- 문득 정신이 아득해 지며 육체가 한없이 밑으로 치닫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미친 듯 발버둥치다가 막 빠져나온 듯한 느낌. 다희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다희가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었던 건, 끝없이 멀어지는 의식 저편으로 영락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허억 허억...
다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내려와 겉옷이 축축히 젖어있음을 느끼곤, 하아하아 가뿐숨을 몰아쉬었다. 불과 이삼 분 전에 꾸었던 꿈이 좀체 머릿 속에 떠올라 주질 않았다. 악몽이었나? 어쩌면 가위눌림을 당했는 지도 몰랐다. 쳇! 이게 뭐람? 기분 꼭 엿같군.
힐끗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기분으론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다희는 불을 켜고 어젯밤 잠들기 전 읽다 말았던 책을 펼쳐 들었다. 조창인의 <따뜻한 포옹>이란 책이었다.
다희야, 이 책 재밌더라. 슬프고 아름답고...... 마치 동화같은 사랑같이 너무도 감미로워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어. 이런 지랄같은 세상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존재하지 않을 그런 사랑이야기일 지도 몰라. 이다희, 너도 읽어봐. 내가 느낀 감동의 일부분이라도 너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며칠 전, 친구 인숙이 웃으며 다희에게 다가와 책 두 권을 내밀었고, 그것이 지금 그녀가 읽고 있는 조창인의 <따뜻한 포옹>2권이었다.
가끔은 다희도 꿈을 꾸곤 했다. 계부의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간 엄마. 그리고 혼자 남겨진 여자아이. 그것은 다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염병할!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갈 리 없다고 재차 되내이며, 판잣집 골마루에 겉터앉아 밤 늦도록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다. 곧 오겠지. 날 데리러 오실거야. 술에 취해 지껄여 대는 계부의 거친 욕설과 되풀이되는 매질은 익숙해 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 다희는, 기다림이란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고 이내 체념이란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복잡한 생각은 하지말자. 씨팔! 힘없이 발광해 대는 놈들만 쪼다가 되는 세상이니까.
엄마가 집을 나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나역시 이런 거지같은 집구석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까.
다희야, 나처럼은 살지말아. 엄마처럼은 되지 마. 우리 다희 똑똑하니까 꼭 성공해서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지? 새처럼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도록...응? 다희야...
언제였을까. 그 날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 그저 그럴 듯한 모양새만 어중간히 갖추고 있을 뿐인 집은, 천장이 듬성듬성 벗겨져 나가 여지없이 비가 새고 있었고, 엄마는 다희의 손을 꼬옥 잡고 한숨같은 중얼거림을 토해냈었다. 그 날은 다희의 중학교 입학식날이기도 했다.
너나 나나 사는게 왜 이리도 힘이 드냐? 왜 우린 쥐뿔도 뭐도 없는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거지? 씨도 안 먹힐 자존심? 그런건 개나 주라 그래. 너와 난 죽을 때까지 빌빌댈 수 밖에 없는 거고 결국 그렇게 살다 가겠지? 미친!
어느 날 인숙이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그러나 눈은 울고 있는 채 다희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건 같은 크기의 아픔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헤아릴 수 있는 감정의 교감과도 같은 거였다. 그 날 다희는 서럽게 외쳐대는 인숙의 어깨를 꼬옥 한 번 안아주었을 뿐, 어떤 말도 입에 올리진 않았다. 때론 침묵이란 게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방과 후.
교문쪽과 운동장은, 학교를 나선 학생들이 삼삼 오오 짝을 지어 떼거지로 걷고 있어 꽤나 북적거렸고, 가끔식 기분좋게 불어오는 바람이 학생들의 주름진 교복치마며, 어깨까지 단정히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다희야, 나 제법 물 좋은 나이트 하나 알고 있는데, 거기 가서 코 삐뚤어지게 한 잔 마시고 오랜만에 몸 좀 풀면서 신나게 흔들어 보지 않을래? 누가 알겠어? 돈많고 괜찮은 대삐리 하나 건지게 될 지."
"돈이 어딨어서? 너 꼰대라도 하나 낚았냐? 꽤 능력있네, 김인숙."
"아서라, 촌닭같이 꼰대는 무슨. 그냥 어제 부대 앞에서 영만이 새끼-다희 너 알지? 중호 친 구라고 있었잖아, 왜.-그 놈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더럽게 밝히는 아찌 한 명을 알게 된 것 밖에 없어. 씨팔, 그 아찌한테 빌어먹을 돈이란 것 좀 많이 올가낼려고. 요즘 나잇살 들었다 하는 사내 새끼들, 영계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잖아. 쿡! 참 세상 말종이지? 나한테는 뭐, 아쉬울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아! 오늘 만나기로 했어. 나이트 데려가 준대. 다희야, 너도 같이 가자."
"야, 너 미쳤니? 요즘 이상한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 그러다가 인생 종치면 어쩔래? 끝장나 버리면 어쩔 거냐구."
"하! 여기서 더 망가질 수도 있을까? 어차피 볼장 다 봤는데, 뭐."
다희는 잠시 인숙을 바라다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외로움의 옷을 걸치고, 같은 더듬이를 가진 두 개의 영혼처럼, 서로가 서로를 만났는 지도 모른다. 인숙의 어머닌 뇌종양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아버지는 20대 후반쯤의 한 젊은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와 같이 살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말이야, 그 가엾은 여자는 말이야, 일찍부터 아버지의 외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한 마디의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았어. 그냥 나를 앉혀놓고 한참을 울다가 잠들어 버리는 거야. 지독한 약냄새를 풍기면서 끼익끼익 어깨를 떨다가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인숙아, 인숙아... 느이 아버지 불쌍해서 어쩌냐... 못난 여편넬 버리지도 못하고 끼고 사는 느이 아버지 심정이 불쌍해서 어쩌면 좋니... 썅! 우습지 않아? 자긴 생각도 않고 그런 남편도 지아비라고 죽을 때까지 믿으면서, 오히려 자길 탓하는 거야......
그 젊은 여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가 하면, 인숙에게 걸핏하면 욕을 해대고 기분이 조금이라도 틀어질 양 치면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희는 갑자기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인숙이 이 기집애야, 너는 그래도 나보다는 나아. 너에겐 그나마 네 편이 되어 줄 아버지라도 계시잖아. 난 말이야. 우리 아빠 얼굴도 몰라. 어떻게 생기셨는 지, 어떤 분인 지...꿈속에서도 떠올릴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 지 너는 아니? 훗! 이게 무슨 얼어죽을 놈의 청승이냐, 이다희! 바보같이 시덥잖은, 별로 반가울 것 없는 감정에 어쩔 수 없어 하다니. 이 무슨 꼴이냔 말이다.
그 때 빠앙빵하는 콜렉슨 소리가 요란히 울려댔고, 다희와 인숙은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 갤로퍼였다. 운전석에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흐물거리며 웃는 사내의 인상이 왠지 꺼림칙해 보인다고 다희는 생각했다. 그러나 옆에서 인숙이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을 때, 다희는 짬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아까 말했던 그 아찌야."
"인숙아, 너 저 치 앞에 있으면 속이 뒤틀리거나 하진 않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웃긴짓이야."
"얼굴 보고 고른다면 내가 미쳤다고 할 짓 없이 저런 개기름을 상대하냐? 난 즐기고 싶어. 한 번밖에 없는 청춘, 17의 나이를 냄새나는 더러운 집구석에서 낭비하고 싶진 않다구! 즐기려면 돈이 있어야 해. 후회니 뭐니 하는 건 이차적인 문제야. 나도 딴 애들 처럼 근사한 매장에서 쇼핑도 하며 옷을 사입고 싶고, 피자니 햄버거니 평소엔 엄두도 못냈을, 맛있는 걸 먹으러도 가고 싶어, 다희야. 난 정말...이렇게 사는 데 지쳤단 말이야."
인숙이, 사내가 타고있는 갤로퍼로 한달음에 달려가 조수석쪽 문을 활짝 열곤, 일순 멈칫거리다-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덥썩 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다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닌걸, 뭐 하며 연신 되내어 보아도 인숙의 일이 못내 속상하고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다희였다.
왜 우리의 생활은 이렇듯 궁핍하고, 언제나 떨그덕거리는 듣기 싫은 기계음처럼, 위태롭고 불안정해야만 하는 걸까. 어째서 없는 자들의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강자에 연연해 하는 약자만큼이나 있는 자의 끓임없는 욕망의 덫에 짓밟혀, 허기진 제 배 하나 채우는 작은 만용조차 부려보지 못하고, 발 밑 땅에 처박혀 넙쭉허니 엎드려 있어야만 할까. 전부 위선이며 모순덩어리들이다. 바보같은 하많은 세상에 쪼다들이 득실거리며 발정해 대는, 아, 내가 서 있는 이 곳.
다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들어, 하얗고 가는 목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은 전연 이해하지 못할 상식 밖의 행동들을 저지르고 만다. 내 몸구석 하나하나를 손으로 이곳 저곳 만져보며, 혹 몸에 이물질이 끼여있진 않은 지, 탁한 먼지며 악취가득한 오물 덩어리들이 폐부 속 깊이 침투해 들어오진 않았는 지, 종종 확인해 보곤 한다. 점점 비대해져 가는 삭막한 도시 속에서, 내 몸이 언제라도 신경마디마디까지 오염되어 버리진 않을까, 안절부절해 하며.
더는 생각하기 싫어. 다희는 속으로, 기도를 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중얼거림을 연발했다. 또 다시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건 원치 않아. 그냥 단순히 생각하도록 하자, 이다희. 아, 어느 순간 대뇌 속의 사고 기능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할 만큼 마비되기라도 했으면!
사람들이 주접대는 행복이란 건 어차피 개코에 발린, 당초 웃기지도 않은 잡소리에 불과했다, 다희에겐. 하루하루가 개같은 날의 반복일 뿐이다. 내일이란 코뼈다귀도 채 안 보일 뿐만 아니라, 도망질만 쳐대며 꼭꼭 숨어버리는, 다희에게 있어선 머나먼, 잡을 수도 없는 별이었다. 쳇, 그따위 희망이란 건 버린 지 오래야. 그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꿈같은 잡소리에 불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