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금) 맑음
여의치 않으면 적당한 곳에서 야영하거나 비박을 하자고 했던 친구가 설악산 등반약속을 깨는 바람에 년말을 혼자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예정대로 차를 몰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용대리 백담사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반.
추운 겨울산행인만큼 네팔에서 가지고 온 야크털로 짠 털모자를 쓰고, 베낭에다 아이젠 등 각종 장비며 식량(3일분)을 주섬주섬 챙겨메고 유료셔틀버스에 올라 백담사 앞에 도착하니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보인다.
산장투숙예약을 안하고 왔기에 그들에게 산장에 대한 정보를 물으니 '지금은 비철이라 잘만하면 수렴동대피소에서 1박을 할 수 있고, 아니면 봉정암에서 하면 된다'고 하여 용기를 내어 삼림이 울창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에 걸린 현수막을 살펴보니, 윽~! 설악산공원 입장시간이 [하절기: 새벽 3시~ 오후 2시, 동절기: 새벽 3시~ 오후 3시]란다.
하지만 안면몰수하고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는 공원관리소 앞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아저씨, 안됩니다. 지금은 통제시간이니 돌아가세요."
하는 외침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잠시 옥신각신하다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베낭이 너무 무겁던 차에 마침 잘 되었다고 자위해 본다.
자유롭게 아무때라도 드나들 수 있었던 십여년 전 시절이 너무 그립다.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놀이삼아 백담사 앞 개천에서 돌탑을 쌓고 있는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백담사로 들어갔다.
마침 템플스테이를 운영중인 여자스텝에게 동참의사를 밝히니 종무소에 물어보란다.
1박 2일 5만원.
1박을 보낼 목적으로 한 나에겐 부담있는 액수라 포기하고 카메라를 들고 경내를 어슬렁거리다 주차장으로 돌아와보니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셔틀버스는 끊겨있었다.
홀로 무거운 베낭을 메고 7km나 되는 한적한 포장도로를 걸으며 소나무숲 사이 돌맹이가 뒹구는 소로였을 그 옛날 이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을 사람들의 심정을 느껴보았다.
어둠이 깊어가는 용대리주차장 부근까지 내려와 1박 3만원이라는 현수막의 산장에 전화를 해보니 6만원이라는데, 내 모습을 확인하는 그의 목소리가 인근 식당에서 들린다.
그래, 연료도 충분하니 애마와 함께 별이 빛나는 멋진 밤을 보내자.
안주거리도 참이슬도 충분하기에 저녁을 지으려고 식당에서 물을 얻어와 주차장 바닥에서 요리를 하는데, 버너를 잘못 건드려 코펠이 통채 엎어져 버린다.
매서운 설악산기운 때문인지 쏟아진 음식이 얼기 시작하자 화장지로 급히 닦아내는 수고를 해야 했다. 소스라치는 얼음같은 찬바람이 주변을 감싼다.
그런 해프닝을 벌이며 저녁을 먹고 얼큰한 술기운에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놀랍게도 둥그런 달님이 시커먼 산마루 경계선에서 고개를 삐쭉 내밀며 인사한다.
변화무상한 설악은 여자같은 산이다. 금방까지 달님이 보이던 하늘에 먹구름이 깔린 묵천하늘에 눈발이 날리더니 금새 온 천지는 하얀 눈세상으로 변해버린다.
솜털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윽한 설악의 밤.
히터로 따뜻해진 안전한 차 안에서 오늘 밤은 좋은 꿈 꾸며 잘 자겠구나...
12월 26일(토) 맑음 눈 흐림
가뿐한 몸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가볍게 베낭을 꾸린 후 승차장으로 가보니 다행히도 첫번째 셔틀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어제 나를 제재했던 공원관리소(예전의 백담사휴게소) 앞을 지나 잔설이 깔린 송림이 울창한 조용한 산길을 한없이 걸었다.
설악에 올때마다 나를 가장 포근하게 감싸주는 엄니같은 백담사계곡길.
시야가 뚫려있는 꽁꽁 언 내린천으로 가보니 정성들여 쌓은 돌탑들이 불상처럼 서 있어 부근에 앉아 상념없는 휴식을 취해보다 일어나 인적없는 산길을 한없이 걸었다.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박눈으로 변하자 강아지처럼 덩달아 흥이 난다. 산에 올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를 부르다가 반야심경도 크게 암송하고 오자니 지난 하기휴가 때도 왔었던 중수 중인 영시암에 도착했다.
"거사님 염불소리가 스님들보다 더 기운차오!"
영시암 목수인듯한 50대 중년이 나를 보며 빙긋 웃는다.
'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뜻의 암자현판은 여초 김응현의 글씨고,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영원히 속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유학자 김창흡의 비장한 각오가 담긴 그 영시암.
오늘도 예전의 그 50대 보살이 자잘한 불물을 팔고 있어 합장하며 인사하니 아는 체를 한다.
60대 노스님이 그 보살님 옆에 있기에 산에서는 처음 대하는 반가운 마음에 빙긋 웃으며 합장으로 법어를 구하니 의외로 응하신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있을 때 주지였던 내가 군부대에 가서 여러 장성들 앞에서 설법한 게 있는데 화두가 정신차려야. 차렷하고 있으면 힘들잖아. 순간이라도 마음은 항상 정신차리라는 말이지..."
하면서 이런 저런 젊은 날의 추억담을 들려주는동안 백설은 천지사방에 춤추며 노래하듯 하염없이 흩날린다.
눈발이 잦아들자 그들과 헤어진 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산길을 또 오르기 시작했다.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예전의 개인이 운영하던 너절한 산장은 이제 말끔하게 정리된 국립공원대피소로 변해 있고, 십여명 안팎의 젊은 남여 등산객들이 점심을 준비하거나 먹고 있었다.
관리공단 제복의 젊은 대피소 직원에게 1박 할 수 있는 자리를 물으니 흥분된 대답이 영 까칠하다.
"나이 드신분들이 예약도 않고 늦은 밤에 와서 막무가내 자리를 달라고 해서 미치겠습니다. 장비라도 잘 갖춰 온 것도 아니고 평상복으로 와서 술에 취해 멋대로 하는 행태를 보면 속에서 욕이 나옵니다. 주제에 산악인이라며 행패까지... 주절주절~~ "
가만히 듣자니 은근히 울화통이 터지고 헛웃음마저 나온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생기는 법인데, 모처럼 산에 온 나이든 사람들을 법규정 운운하며 홀대하면 되는가요? 더구나 산장예약은 하늘에 별따기니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고... 국립공원 운영방법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나는 봉정암에 온 불자라서 산장이 필요없어요."
"지금은 한가한 편이지만 시즌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요. 자칭 산악인들이 시민의식도, 자연보호 의식도, 준법의식도 없고.... 주절주절~~"
"젊은 친구가 너무 편협하시구만. 역지사지라고, 모처럼 산을 찾은 산악인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좌우지간 나는 이곳에서 잠깐 점심만 해결하고 봉정암으로 갈 사람이니 그리 아슈~~"
참 어렵다.
자율적인 산행이 가능했던 예전에는 이런 갈등과 분란이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법과 규정을 내세운 원리원칙적인 예약제 대피소제도가 생긴 후부턴 자연보호라는 미명하에 산을 찾는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홀대하는 각박한 세상으로 변했으니 원.....
나는 부산에서 새벽에 올라왔다는 젊은 산꾼들에 합석하여 라면에 소주를 몇잔 마시고 베낭을 둘러메고 가파른 본정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퍼렇게 얼어있는 빙폭 옆의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다가 베낭을 내려놓고 이곳 저곳 사진을 찍다가 힘들면 초코렛이나 과일을 꺼내 입맛을 돋구며 모처럼 설악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인적이 없는 산길을 홀로 무심히 걷는 것은, 공해로 가득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합일하는 무위자연적인 순간들의 연속.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홀로산행의 대자유한 순간 순간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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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산님의 고행과 인간미가 묻어 납니다..
사진도 참 잘 찍고
우쨌든 나랑 닮은점도 많고..ㅎㅎㅎ
읽으면서 나랑도 입장을 대입해 봅니다. _()_
조악한(?) 사진술 외에 닮은 점 만타는 고 완존 불인정. ㅋㅋ
@太山 그래요
제가 더 못생긴것 인정 합니다.
항복 ioi 손 들었슴 ᆢ흑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태산님의 젊음!
몸은 70대, 마음은 10대... ^^;;
이번 산행은 몸이 망가진 이후 모처럼 무거운 베낭을 메고 시험삼아 오르려다가 다행히 제재를 당해서 고생을 면했습니다.
무리란 걸 잘 아오나, 올해나 내년엔 약 한달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도해 볼 계획인지라...
히말라야 원정 후에 만약 소식이 끊기면 미련없이 설산에 묻힌걸로 아시옵소서, 스님.... -,.-
@太山 “... 무리란 걸 잘 아오나, 올해나 내년엔 약 한 달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도해 볼 계획인지라....”에 대해
몇 마디 합니다.
소승의 생각으로는 히말라야 트레킹 계획을 실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그렇게 힘든 육체적 훈련을
할, 체력이 있다면, 그 힘을 아껴서 보다 더 보람 있는
일에 힘을 쓰셨으면 합니다.
히말라야 트레킹이 결코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님을 이해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태산님의 삶이 평온한 삶이기를
언제나 기원합니다.
@기산스님 본문의 설악산만 생각해선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스님.
히말라야보단 노후대비를 위해 돈벌러 간 울 이쁜 땅콩여보야(^^)가 있는 뉴욕원정이 먼저였는데, 제가 치매끼가 있는지 엉뚱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듁으면 늙어야 한다는디... -,.-;;)
히말라야 원정은 생활전선에서 손을 뗀 후의 시간이 널널할 때 친구 한놈 꼬셔서 한달 일정으로 쉬엄쉬엄 다녀올 생각입니다.
좀 더 일정을 늘여 부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불교성지까지 답사하는 일정이라면 단 한번에 평생의 소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_()_
변화무상한 설악산 기후 같은 여자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캬!!!
공감 1000%
그런데 여자분들은 원쑤 같이 여길 껄ㅎㅎㅎ
맑은 하늘에 먹구름... 그러다가 솜털 같은 하얀 눈...
여자란 게 그래서 매력적이지 ...
그래서 못마땅해도 참고 살고
애도 낳고 그러다 보면 안주하고 행복하고...
라면에 소주만 눈에 들어오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