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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글을 보고나서 김구선생님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을 검색도중
김구선생님이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암살한 배후이며
자신의 부하마저 죽인 악랄한 사람이라고 글이 올라 왔더군요
김구선생님이
일본순사 시험보다 떨어져서 반일로 돌아섰다던데
이게 사실인가요?
반박부탁드립니다.
백범김구의 인간적인 면모...jpg
LINK_http://gall.dcinside.com/baseball_new1/6547605
1. 배운거 없이 놀던 새끼가 일본순사시험 봤다 떨어져서 반일이 됨
2. 밥 먼저 안준다고 일본인 뒤통수 쳐서 죽이고 현금갈취
3. 여운형, 김립, 송진우 등 독립운동가들도 전부 김구가 살인교사함.
4. 장덕수(얘도 독립운동가 출신) 살인교사의 전모가 드러나자 이승만과 정부수립하기로 한거 파토내고 월북함. 그러다 총맞고 사망
명불허전 전과백범 킬구
LINK_http://gall.dcinside.com/game_classic/2687767
원래 해방후 시대의 양대 축은 남한의 이승만, 북괴의 김일성 이었고
둘다 업적이 있음. (물론 김일성의 경우 북괴 입장에서 얘기임)
전범지원국 신분이 될뻔한 한국을 광복군 병력이 5만이라고 뻥카를 쳐서(실제 광복군 병력은 339명)
연합군을 속여 독립의 구실을 얻어낸 이승만의 기지는 신의 한수였음.
반면 김구는 임시정부 수장이라곤 하나 해놓은게 없었고 중국 국민당 밑에서 허송세월이나 보냈었음.
한마디로 업적이 전무한, 이상만 가득한 민족주의자였지.
김구가 대통령이 됐다면 십중팔구 김일성 셔틀 노릇하다가 적화통일 당했을 가능성 아주 컸고
뭐 띄어줄래야 띄어줄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야무치 같은 인간이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스토리가 달라짐.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혁명으로써 집권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전 정권인 이승만을 디스할 필요가 있었음. 근데 이승만을 까게 되면 우리나라는 독립영웅이 없어지는 거임.
그 과정에서 김구를 띄어주게 된거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이승만을 과소평가하고
김구를 과대평가하는 풍조가 아직도 보편적이지.
LINK_http://gall.dcinside.com/game_classic/2701599
__IM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3/경교장.jpg/270px-경교장.jpg"__
경교장.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는 총성이 4번 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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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한국에서 국부로 숭배하고 있던 백범 김구가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된거지.
그는 1947년 12월 1일에 이승만과 함께 남한 단정수립에 찬성했으나, 그 직후 발생한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이승만에 대한 미움으로 단정수립 반대, 김일성을 만나기위해 북한에 갔다와서
남한 건국반대와 미군철수를 외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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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는 영등포 포병사령부의 야전차 포병단의 연락장교였어.
그는 자신의 자서전, 시역의 고민(1955년 학예사 출간)에 의하면
원래는 제7대대 제1중대장으로 옹진 전투에 출동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연락장교가 되어서 안가게 되었대.
__IM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a/Kongsberg_Colt.jpg/300px-Kongsberg_Colt.jpg__
안두희가 썼던 콜트 권총.
헌병사령부의 발표에 의하면 안두희는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으로 김구와 15분간 말다툼끝에 화가 나서 그를 콜트권총으로 살해했대.
그는 훗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복직하여 전쟁에 참가해.
하지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이기붕의 반대로 대위에서 제대하고 군납업을 하다가, 4.19 이후 몰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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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비밀당원증과 김구의 휘호
당시 안두희는 김구의 부하였는데 김구의 정치 사상과 행동에 문제가 많았대.
1. 한독당에 남로당 요원들을 심어놨다.
2. 미국의 남한 원조를 반대.
3. 북한을 찬양.
4. 남한 건국 반대
5. 남한에 쿠데타 단행을 예언(이건 실리 보고서에서도 나온다)
6. 포병대대에 세포를 심어놓고 8.15를 전후해 중대행동 명령을 내린다.
(이건 공판기, 시역의 고민에서 나온다. 실리 보고서에서 나오는 백의사 암살특공대가 이걸 의미)
7. 탈당하면 죽음
(이건 시역의 고민에서도 나오는데 한독당 비밀당원인 공무원 아무개는 살해당했니, 역시 비밀당원인 군인 아무개도 죽었니, 비밀당원인 경찰 아무개는 살해되었니 이런게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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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비밀당원증
당시 안두희와 김구는 무슨 대화를 했을까?
안두희는 자기가 전투에 나간다고 죽기전에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으니 질문을 햇다.
그는 국회 프락치 사건 = 소장파 국회의원과의 관계와 미국의 남한 경제원조 문제등을 이야기하고
김구가 영등포 포병대가 경무대와 중앙청을 맞출수있냐고 묻자(발표에는 포의 성능에 대한 세심한 질문으로 처리)
안두희가 영등포 포병대에서 경무대와 중앙청을 정확히 조준할수있다고 대답하자, 김구가 몹시 만족했다고 해.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무쵸는 보고에 김구가 기분나쁘게 웃었을것이라고 생각했대 (정병준의 미국 자료로 본 백범 김구 암살과 미국의 평가)
엔하위키에서는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105mm M-3 야포(사정거리 7Km)로는 절대로 영등포에서 경무대(거리 10Km)를 못 맞추니까
사찰요람은 음해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사실 안두희는 야전차 포병단이니 군용트럭에 야포를 연결해서 이동하면 돼. 그럼 어떻게 옹진전투에 포병이 출동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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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사
일단 안두희는 그 표정을 보고 식겁해서 김구에게 간신들의 망언을 듣지말고 본심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김구가 화내자 안두희도 같이 화를 냈어. 그러면서 질문을 했지.
1. 여순사건은 왜 일으켰습니까?
ㄴ 이건 당시 여순사건이 극우,극좌 합작이라는 발표가 있자, 김구는 극우가 개입한걸 이해할수없다고 햇어.
여기서 말하는 극우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전 국방경비대 14연대장 오동기(중국 국민당 군대 출신)와 최능진이 반란일으키려하다가 체포되어서, 오동기가 심어놨던 여수 14연대가 반란일으킨 사건이야. 훗날 박정희 정권은 극우 부분을 삭제. 단, 5.16에 김구의 아들 김신이 참가하여 박정희 정권은 김구를 미화하기 시작햇었어.
2. 강·표 소령은 왜 월북시켰으며 그럼으로써 무슨 이익이 있었느냐?
ㄴ 이것은 국군 강, 표 소령 월북 사건으로 간첩 성시백(김구와 접촉했던)이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3. 장덕수는 왜 죽였느냐?
ㄴ 이건 장덕수 암살사건인데 김구도 당시 재판장에 나갔어. 당시 공판기록에 의하면 김구는 장덕수가 이승만 박사가 주도하는 미소공위가 참가하니 죽일놈이라고 부하들 앞에서 말했대. 부하들은 나중에 본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갔는데, 역시 나쁘말했대. 그래서 혁명단을 만들어서 장덕수를 죽인다니 "아, 그런가"이랬대. 여기서 말하는 혁명단은 암살특공대로 이름은 대한혁명단인데 실리 보고서에서도 나와.
시역의 고민에 의하면 송진우도 왜 죽였냐며 추가되었는데, 훗날 김두한의 노변야화, 그러니까 권오기(훗날 정부요인이 된다)와 김두한의 대담에서 백의사,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송진우와 장덕수를 죽였대. 안두희가 송진우 암살을 추가한 이유는 아무래도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를 만나서 그런거 같아.
미군정 자료 연구에 의하면 1952년 부산에서 안두희와 한현우가 어울려다니는걸 봤대.
4. 8·15의 의거를 야기하라는 말을 수차 들었다.
ㄴ 이것은 포병대대에 세포를 심어놓고 비밀지령이 떨어지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이었어. 8.15를 전후해 중대행동 명령을 내린다고 김구와 그의 부하 김학규 장군이 평소에 말했대. 시역의 고민에 의하면 안두희에게 대포의 갯수와 성능을 자주 물어봤대.
5. 왜 공산도배들과 손을 붙잡으려는가?
ㄴ 이건 1949년 말과 1950년에 경찰 사찰과와 군대가 남로당 프락치들을 잡았는데, 이들은 한독당에도 세포를 심어놨대. 당시 경찰 기록이 조작이라고 믿고 싶으면 유어만 회담록을 봐. 유어만은 김구에게 남한 건국에 참가하라고 했지만, 김구는 어차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다고 그랬어. 2009년 9월 월간조선.
김구는 북한이 남한 침공할줄 뻔히 알면서 미군철수를 외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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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2월 24일 조선일보 선우진 인터뷰
<미스터리>
안두희와 김구의 대화시간은 정말 2~3분인가? 비서의 말에 의하면 2~3분만에 일어난 일로 안두희와 김구는 정치이야기를 할수없었대.
그래서 배후 세력이 있니 어쩌니 하는데, 당시 헌병사령부도 여기에 빡쳐서 시간을 고의로 조작하여 선동하는 분자가 있는데
안두희와 김구가 12~13분간 대화한거 맞대.
공판기, 그러니까 오소백의 안두희 공판 방청기를 보면 선우진은 밥을 먹고 있는데 총성이 울렸대. 그런데 이게 2~3분만에 일어났다는거지,
그런데 판사가 선우진에게 무슨 밥을 그렇게 빨리먹냐고 하니까 선우진의 대답은 나오지 않아.
하지만 1965년 12월 24일 조선일보에서 선우진은 "만두국이 나올려고 하니까 총성이 울렸다"고 말을 바꾸고, 그걸 쭉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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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훈
4.19이후 고정훈은 김구 암살에는 이승만이 있다. 임병직과 신성모가 포병사령관 장은산에게 명령하여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암살했다...
이러고 이승만은 김준연과 김지웅을 시켜서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는데 이건 거짓말이야.
고정훈은 빡친 임병진,김준연에게 고소당해서(신성모는 사망) 깜빵에 가게돼. 그리고 허위사실 유포죄는 유죄 판정을 받는데, 웃긴게 고정훈은 법정에서 핵심없는 폭로만 되풀이하다가 유죄받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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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웅씨, 백범암살과 전혀 무관. 1966년 4월 26일 화요일 조선일보
(당시 동아일보,중앙일보에도 같은 검찰 발표가 있었다)
백범 김구 암살음모론에 나오는 김지웅은 암살음모를 꾸몄니 어쩌니
하는걸로 자주 나오는데 전혀 무관한 인물로 나와. 하지만 당시 신문이
1,2면에 대문짝만한게 실어줘야하는데 쪼금 실어서 결국 김지웅은 김구 암살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일본에서 죽게돼. 당시 김지웅을 받아들이냐마느냐 문제로 일본 중의원들은 엄청나게 회의를 하지만, 그 회의록은 한국에 안나와. 왜냐?
다른 암살범들의 커넥션이 나오게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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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장흥
장흥은 자기가 김구 암살 다음날 헌병사령관에서 짤리고 일선 사단장으로 좌천되었다는데 사실은 3일뒤에 짤려서 좌천돼.
훗날 자기가 김구 암살 다음날 짤렸는데 김구 암살배후를 신성모라고 우겨. 왜냐하면 신성모가 그를 짤랐거든.
김창룡은 암살 음모에 자주 나오는데 당시 소령이었어. 1951년에 특무대장이 되지.(김구 암살은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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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2일 동아일보
수원 병점고개 음모론! 암살전날, 수원 병점고개에서 군인들이 김구를 암살하려고 대기했다...는 음모인데
사실 언급되는 인물들은 김구 암살 이후 한국독립당 탈당선언을 한 비밀당원들인데 국방부 제3국,제4국에서 일했대.
__IMG=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7/1124/IE000836366_STD.jpg"__권중희
1992년 안두희 증언은?
말도 안돼. 그냥 권중희가 대침으로 찔러서 고문한거야.
1. 장택상은 당시 외무부 장관에서 짤려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짤려.
2. 김창룡은 소령이었고
3. 노덕술과 최운하는 반민특위에 구금되었어.
4. O.S.S는 1945년 9월에 해체.
__IMG=http://pds24.egloos.com/pds/201112/28/64/d0075264_4efae41ea1eec.jpg__
안두희는 어떻게 군납업을 했나?
당시 포병 제1대대장 이기건(안두희는 이기근이라고 말함)은 훗날 8사단장이 되었어. 당시 포병 장교였던 이기건과 안두희의 인맥.
(출처는 군사연구 119호)
요약
1. 김구 암살 배후 없다.
2. 그러니 애꿏은 사람을 암살 공범으로 몰지마라?
3. 의문점이 있다면 질문 받는다.
LINK_http://gall.dcinside.com/baseball_new1/6584710
미군정으로부터 송진우 장덕수 암살배후로 지목되서 법정출두 요구받으니까
이승만한테 도와달라했는데 무시당하니까 빡쳐서 단정찬성으로 돌아섬
개졸렬
LINK_http://gall.dcinside.com/history/920188
장덕수의 유령에게 시달리는 김구
[해방일기] 1948년 3월 8일
LINK_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308092644
1948년 3월 8일
1947년 12월 2일 저녁 장덕수가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범인에게 암살당하고 40시간 만인 4일 오전 현직 경관 박광옥(23세)과 연희대 학생 배희범(20세)이 체포되었다.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고 현장을 완전히 벗어난 범인들을 이틀도 안 되어 체포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데, 체포 경위에 관한 발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더더욱 기이한 일이다. 2년 전 송진우 암살범을 범행 후 100일 만에 체포했을 때 요란했던 것과 너무나 대조된다.
체포 경위 중에 조병옥이나 장택상이 밝히기 곤란한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둔다. 우익 테러 조직들 사이에 많은 횡적 연결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운형 저격범 한지근의 취조 과정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장덕수 암살범 체포에 이 횡적 연결이 활용되었고 그 내용 중에 밝힐 수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 아닐지.
하수인 두 사람 체포 후 수사는 즉시 그 배후로 확대되었다. 바로 그 날 오후에 "모 신문사 사장 자택에 동거하는 인물 두 명을 체포하고 모 단체에서 검거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47년 12월 6일, "장씨 살해범 연루자 각 방면에 수배 체포"). 박광옥의 집에서 발견된 한 장의 사진이 중요한 증거물로 주목받았는데 "(박과 배) 양인이 가슴에 혈서로 장덕수 씨를 암살하겠다는 것을 써 놓고 의사(義士)의 풍채로 박은 것"이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47년 12월 5일, "가슴에 쓰인 혈서 '장덕수 암살'"). 윤봉길이 거사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니, 배후 수사가 어느 쪽을 향한 것인지 이로써 짐작이 간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장택상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아볼 만한 기사가 있다.
"박 순경 미거(美擧), 상금을 전재민에"
뛰어나는 공을 세운 수도경찰 순경의 연거푼 미담가화. 앞서 고 장덕수 씨 살해범을 체포한 수도경찰 특경대 박준주 순경은 특상으로 장택상 총감으로부터 5000원의 상금을 받았는데 13일 서울시전재원호회를 찾아 그중 3000원을 한파에 헐벗고 굶주린 전재민에 보내달라고 기탁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7일)
체포 기사 중 체포자에 대해서는 "중부서원 백일현 외 2명"이란 표시 외에 보인 것이 없었다. 박준주 순경은 "외 2명" 중 1명이었던 모양이다. 5000원이면 큰 상금이다. 그런데 그런 상금을 주었다는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 상금을 갸륵한 뜻에 바쳤기 때문에 비로소 기사화된 것이다. 그런 큰 상을 준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 줄 때는 보도되지 않게 한 것이 아니었을지.
경찰은 어마어마한 '수사위원회'까지 꾸렸다. 수도청장(장택상)을 위원장으로, 경무부 수사국장(조병계)과 부국장(이만종), 수도청 수사과장(노덕술)과 사찰과장(최운하)를 위원으로 하는 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12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이다. 범인 8명 중 7명이 체포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1일)
한 명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이 김석황이었다. 김석황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며 한독당 중앙위원으로서 '김구의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석황이 사건 달포 후인 1월 16일 체포된 경위를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체포 당시 몸에 지니고 있던 편지 한 장이 큰 주목을 끌었다. 김구 앞으로 김석황이 쓴 편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이 편지에 대해 이례적인 보도 관제를 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17일자에 이 편지 내용을 실은 기사가 있었는데 편지 내용을 들어냈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편지 내용 일부를 부득부득 지면에 올렸다. 체포 경위를 보도한 1월 20일자의 커다란 기사 속에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김석황을 체포한 후에 물론 그 신체 수색이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서 미발송의 편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김석황은 그 편지를 장택상 경무총감에게 보내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遊離丐乞)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伏願)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니 소생은 잡힐 리가 만무합니다. 이 박사와 한민당 찬역배가 음모를 하오니 선생님은 특별히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운운"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면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장택상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천자적 백백교도적 광신자들로부터 조선 민중이 해방되어야 민주주의국가의 성립이 용이하게 될 것이다.
김석황은 왜 그 편지를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겉으로 봐서는 써 놓고 미처 부치지 않은 상태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다. 그를 숨겨주고 살펴준 세 사람이 범인 은닉죄로 기소되었다. 언제든지 편지를 쓰면 바로 발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석황이 도피 상태에서 일종의 '보험용'으로 이 편지를 늘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김구의 연루 사실을 드러내는 내용인데, 체포될 때 이 편지가 발각되어 '본의 아니게' 연루 사실이 나타난 것처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김구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이 체포될 경우 김구가 끌려 들어옴으로써 그 위망이 자신까지 보호해 주기 바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석황의 체포로 사건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불원간 기소와 재판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약 보름간은 관련 보도가 없었다. 그런데 2월 중순 들어 사건의 신속한 공개와 범인들의 엄중한 처단을 요구하는 성명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2월 12일자에는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한협) 성명이, 14일자에는 테러배후규명대책협의회 성명이, 20일자에는 여성연맹 성명이, 21일자와 26일자에는 한민당 담화문이 실렸다. 남북협상론으로 돌아선 김구에 대한 단독 선거 추진 세력의 일제 공세로 이해된다.
이 사건은 2월 21일 기소되어 3월 2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고 장 씨 살해 사건 기소 내용"
고 장덕수 씨의 살해 사건은 그간 미군사령부 직속의 군사위원회에서 취급하여 오던 바 동 사령부 직속 사법진에 의하여 발표된 그 후 소식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2월 21일 포고령 위반으로 기소되어 3월 1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공개재판을 할 터인데 피고인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
그리고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 등은 공동 행위로 또 공동 의사에 의하여 김철, 성명 미상의 기타 여러 사람과 함께 서울에서 작년 8월 14일에 혹은 그 날 경에 고의적으로 부당히 불법적으로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 및 기타 인사 약간 명을 살해하려고 음모하고 공공연한 행위를, 혹은 상술한 음모에 의한, 또는 그 실행의 행위를 행하였고,
2.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은 공동 행위로 또 공동 의사에 의하여 서울에서 작년 12월 2일에 또는 그 날 경에 악의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숙고적으로 불법적이며 계획적으로 장덕수를 카빈총으로 사격하여 살해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27일)
재판 개정 날 오후의 증인 신문에서부터 김구를 노리는 미군정 측의 의도가 드러난다. 3월 4일자 <동아일보> "장 씨 사건 군재 증인 심문 개시" 기사 중 박은혜를 신문하는 대목이다.
이때 검사는 질문의 머리를 돌려서 장 씨 생전의 정치 운동에 대해 들은 바 본 바를 말하라고 장 씨 부인에게 말함에
증인 : 잘은 모르겠으나 한 때 민대와 국의의 합동설이 있었을 때 남편은 이 합동 운동에 많은 노력을 하였고 당시 김구 씨와는 의견의 충돌로써 알력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김구 씨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야단을 친 모양이라고 들었습니다.
검사 : 그것은 언젠가.
증인 : 임시 정부 추진파에서 정치 운동을 맹렬히 추진하였을 때입니다.
검사 : 김구는 누군가.
증인 : 임정 요인이지요. 즉 임정을 조선 정부로 한다고 해서 물의를 자아낸 모양입니다. 이때 피고 측 미군 변호인 빌스 대위가 일어서서 "이 사건에 있어서 정치 문제까지 심문함은 부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받아 즉시 재판장은 "심문은 자유이다. 그런 월권 행사는 기각하겠다."라고 일축하였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는 이 시기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동아일보>는 재판 기사를 매일 연재하고 있었다. 3월 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4일의 제3회 공판에서 저격범 두 사람을 체포한 중부서 백일현 경사의 증인 신문이 있었는데, 진술한 체포 경위가 너무 엉성해서 뭔가 사실을 감춘 느낌이 든다.
검사 : 그들을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가.
증인 : 1947년 12월 4일 상오 10시경 시내 필동 2가 72번지 유봉린 집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검사 : 그때의 광경을 말하라.
증인 : 2일 장덕수 사건이 발생되자 수도청에서는 각서에 범인 수사를 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날인 3일 지명 수배가 있어 관내로 검색을 나갔는데 필동 2가 72번지에 갔더니 그 집의 손님이라고 하는 사람의 행동이 수상할 뿐 아니라 지명 수배한 사진과 인상이 비슷하여 엄중 심문한 결과 범인임이 틀림없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 다음 소지품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없다고 하기에 주인에 명하여 이들의 소지품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런데 손수건에 싼 권총을 가져왔던 것이다. (…)
검사 : 진범인이라는 결정은?
증인 : 박광옥을 보고 "당신이 그랬지?" 하고 물었더니 박광옥은 "네" 하고 대답했었소. 그래서 이름을 물었더니 박광옥은 자기는 "종로서 박광옥"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배희범을 보고 "당신이 같이 다니며 그랬냐?" 하고 물었더니 배희범 역시 "네" 하고 대답을 했었소. 그래서 포승을 해서 파출소로 데려왔던 것이오.
<경향신문>은 첫 공판의 보도 후 닷새만인 3월 9일자에서 피고들의 진술서 낭독이 있었던 3월 8일의 제5회 공판을 보도했다. 인용된 김석황의 진술 중에 김구 관련 부분이 있다.
김석황(54) : 본인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다. 중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대한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을 친히 1년 동안 모신 일이 있다. 귀국 후에는 별로 가깝지 않았으며 (…) 장 씨 살해 문제에 관해서는 신일준으로부터 1947년 7월경에 민족 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 가운데에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을 죽여야 한다고 들었으나 말렸다. (…) 며칠 후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나쁜 놈들이야"라고 했다. 이때 본인은 이 말이 장(덕수)을 죽이라는 직접 명령은 아니나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신(일준)과 김(중목)에게 말했다. 그 후 살해 계획을 김구 선생께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만 하였다. 본인의 주머니 속의 편지는 누구라고 이름은 안 썼으나 인편이 있으면 김구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이다.
이 기사에 이어 김구의 소환장 발부와 이승만의 담화문 기사가 실렸다.
"김구 씨 소환장-군재(軍裁)위원회에서"
고 장덕수 씨 살해 사건 군률재판은 지난 2일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진행 중에 있는데 동 군률재판위원회에서는 피고인 김석황의 변호인 빌 씨의 요청으로 밀톤 로만 담당 검사는 3월 6일부로 김구 씨에게 소환장을 보내었다 한다. 이 소환장은 8일 오전 10시 24군단 코넬 스미드 씨가 경교장으로 동 씨를 방문하고 수교하였다는데 동 소환장에는 3월 12일 오전 9시까지 군률재판소에 출정할 것이 적혀 있으며 김석황 등 소송사건을 변호하기 위하여 증인으로서 증명하고 증언할 목적으로 소환하는 것이라고 씌어 있다 한다.
"김 주석 관련 운운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이 박사 담화 발표"
이승만 박사는 고 장덕수 씨 사건에 관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 씨 사건에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등사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 주석 부하에 기개인의 무지맹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를 끼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승만 같은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LINK_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12_0050
제목 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
게재지명 조선일보,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8년 03월 14일, 15일
날짜 1948년 03월 12일
문) 그러면 검사가 증거품으로 조서한 11호 12·13·14호는 각각 금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의 진술서인데 그중 필요한 부분을 읽어드릴 터이니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요.
이로부터 전기 4명의 진술서 중 필요한 부분만을 계속해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요점만을 적으면 이런 것이다.
결국 4명이 진술한 것 중에서 공동 일치한 점인데
1. 처음에 김석황이가 김구선생은 장씨를 처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
2. 그의 사실여부를 알아보려고 김석황 이외의 전기 3명이 죽첨장에 김구를 찾아만났더니 장덕수,명제세,배은희 등 사람들은 리박사 밑에서 일하면서 미소공위에 참가한다니 죽일 놈들이다라고 김구씨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분심을 짐작하는 동시에 김석황의 말을 확인했다는 것 주로 이 점이었다. 이에 금중목의 진술서인 증거품 10호 중 이상에 일치된 요점을 낭독하고 나서 라만검사는 다시 심문하였다.
(문) 이상 피고의 진술 내용을 들었겠지만 이 음모에 어느 정도 선생이 관련됐음을 잘 알아 들었겠지요?
(문) 그러한 모듬이 있었소?
LINK_http://gall.dcinside.com/history/919379
LINK_http://gall.dcinside.com/news_new/2772409
임정주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뭔데?? 뭘 했는데??
앞길이 창창한 젊은애들 세뇌시켜서 카미카제화 시킨 후에..
술한잔 먹여서 사지로 내 몬 거 말고 뭘 했냐??
결국 젊은애들 죽이고, 지새끼는 뒤로숨고.
해방후에 권력맛좀 보려다 밀려나자 공산당에 빌붙어서 뭐 조 콩고물 얻어보려 기웃기웃.
결국 북괴의 김일성 정권수립에 지대한 공헌.
김구에게 안두희는 은인이다 은인.
안두희가 안죽였으면 욕만 직쌀나게 쳐먹었을 인물인게 사실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따로 글 올려드리겠습니다.
밑에 글 추가해드렸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네요
출처 알아보니까 디시인사이드네요...
ㅋㅋㅋㅋ
통념에 반하는 내용들을 들고 나올때는 주장하는 사람이 근거를 대야죠.
기본적인 거증의 의무조차 지켜지지 않는 글은 일베에서나 통할 글이죠. 상대의 주장이 이미 불완전 하기 때문에 반박할 가치도 없는 뻘글들일 뿐입니다.
증거가 없잖아
저렇게 지껄이는 인간은 지가 저시대가면 김구선생님이나 김원봉선생님 이상으로 할 자신이 있어 그런가?
내가볼땐 저런 새끼들은 100% 친일 똥꼬나 빠는 순사새낀데.
위키백과가 어떤진 모르지만 미군정이나 조병옥 박사나 모두 배후로 지목했다고는 하네요.
일단 백의사를 통한 암살및 테러....
이건 사실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