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조원의 돈이 오가는 서울 증시. 그 한복판에 펀드매니저들이
서있다. 적게는 몇 십억에서 많게는1조원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굴리고
있는 이들은 하루 하루 주가에 따라 자신의 모든 걸 던져야 하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주식에 살고, 주식에 꿈꾸는 5명의
펀드매니저들이 증권거래소 뒤 조그만 일식집에 모였다.
◆연봉 億-億 하지만…
=삼겹살 먹어야하는 거 아녜요, 요즘 같아선?
=좀 올라가는 것도 있잖아요.
=내가 운용하는 펀드 수익률이 올라야지뭐. 그렇다고 주가 빠질 때 내
펀드 수익률이 덜 빠졌다고 좋아할 수는 없으니, 펀드매니저란 게 결국
주가가 오르거나 내리거나 맘 편할 날없는 직업입니다.
=주간 성적 나쁘면 깨지고 월간 나쁘면 위협받고 분기 나쁘면 거의
잘린다고 봐야죠. 우린 파리 목숨이야.
=수익률 떨어지면 자다가도 확 깨요.
=자다깨는 게 다 뭐예요. 주식 빠질 때는 밤일도 못하잖아. 마누라랑 눈
마주칠까봐 겁나고.
=미국서는 그런다잖아요? 대륙 횡단 트럭 운전기사랑 펀드매니저는
서른이 정년이라고.
=보통 사람들, 100만원만 잃어도 억울하고 1000만원 날리면 생병
나잖아요. 그런데 우린 무슨 강심장이라고 하루에 1000억원씩 굴리고
멀쩡하겠어요. 그것도 버는 거라면 몰라도 날리는 거라면.
=우리가 지금 얼마 만지지? 제일 적은 사람이 1300억원, 많은 사람은
1조7000억원이지요?
=그런데 그 돈, 구경이라도 해본 적 있어요? 그 숫자가 돈으로 보이면 일
못할 걸요. 숫자만 가지고 포트폴리오 작업하니까 가능하지.
◆투자자 전화 걸려오면 가슴이 떨려
=작년에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 30%를 넘었던 적도 있습니다. 정말
암담했죠. 투자자들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더군요.
회사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더군요.
=‘이대로 가면 더 떨어질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제일
공포스럽지요. 섣불리 다른 주식으로 바꿔 탔다가 더 참담하게 실패하는
모습도 본 적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험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억대 연봉 억대 연봉하는데, 백 오피스(Back
office·사무부서) 동기보다 연봉으로 치면 30% 더 받나, 50% 더 받나
우리?(모두들 지금 자기 연봉이 수천만원대라는 정도만 밝힘) 수익률이
아무리 플러스를 기록해도 다른 펀드에 비해 떨어지면 투자자들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고, 회사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직장을 많이 옮길수록 몸값은 높아지지만 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월가의 속담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요. 스카우트 액수가 큰 회사로
가면 마케팅까지 자기가 해야 할 정도로 업무 범위가 커지거든요.
=주식시장이 한참 활황일 때에는 지명도를 높인 후 옮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크게 잘된 케이스는 많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펀드매니저로 성공한 후 독립해서 내 자신의 자산운용사나
투신운용사를 설립하고 싶어요. 그러면 정년 걱정없이 주식시장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성 매니저가 채권엔 좀 있지만, 이쪽엔 없잖아요. 아직도 이 일이
드세고 거친 승부사 분위기로 여겨져서 그런 것 같은데,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잘 살린다면 오히려 더 선호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이 문제야, 그게. 펀드매니저라면 술도 양주만 마시고
룸살롱 가고 고급차 타고 다니고 연애나 하면서 큰 사고 퍽퍽 치고, 그런
사람으로 그리잖아요. 정말 우리 현실하곤 달라요. 미국처럼 성과급이
당장 오고 그런 게 아니니까, 연봉계약하는 샐러리맨이라고, 우린.
=냉정한 승부사로만 그려지는데, 이 세계도 인간성 나쁘면 끝이잖아요.
뭐 맨날 수익률 1위만 낸다면 성질 나빠도 좀 버티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러니까 우리도 초상나면 밤새 지키면서 고스톱 치고, 돌
잔치도 가고 결혼식도 가고, 남들하고 똑같죠.
=수익률로 이야기하는 게 펀드매니저라지만 냉정하고 이기적이면 못
살아남죠. 직업상 주식을 잘해야 하지만, 주식 운용 실력만 갖고는
안됩니다. 더구나 경력이 쌓이면 팀을 운영해야 하니까, 리더십도
필요해요.
◆주가조작 사건 때마다 우리만 당해
=99년 주가가 1000을 친 후 지금까지 참, 힘들게 오고 있지요. 수익률이
마이너스 50% 되는 게 수두룩인데, 세대 교체도 많이 됐어요.
=실적이 부진할 경우 그 책임을 전임자나 동료에게 미루는 풍토는 가슴
아프게 반성할 부분입니다.
=주가 조작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에서 꼭 펀드매니저 개입 의혹을
지적하곤 하는데 과거와 달리 작전세력에 가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운용 자체가 팀제로 바뀌면서 설사 유혹이 있다하더라도 덥석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펀드매니저들만 당하는 경향도 있어요. 대우CP(기업어음) 강제 매입
같은 것은 정부가 잘못한 건데, 공무원들이 과연 얼마만큼 책임졌어요?
애꿎은 펀드매니저들만 날아갔지.
=출근은 모닝미팅에 맞추니까 대부분 아침 7시30분이지만, 퇴근은 ‘정한
시간’이 없을 걸요? 일과 시간에는 직접 주식을 사거나 팔기도 하고,
증권사에서 나온 자료를 읽으며 투자정보를 섭렵합니다.
=펀드매니저란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그래도 큰 편입니다. 주식시장은
계속 얼굴을 바꾸고 매일매일이 도전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펀드매니저는 상당히 창조적인 직업입니다.
◆행복은 수익률 순
=행복은 수익률 순입니다. 펀드매니저를 평가하는 건 숫자죠. 근태나
인간성보다는 수익률이 모든 걸 말합니다. 매주 신문에 펀드 수익률이
나올 때마다 펀드매니저는 완전히 벌거벗겨지는 느낌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가족하고 제주도나 사흘 갔다오면 정말 행복하겠어요.
맨날 칼 끝에 서있는 심정인데, 푸른 바다 바라보며 숨 좀 제대로 쉬다
오고싶어.
=골프친 지 6개월 됐는데 거 정말 재밌더라고요. 근데 그것도 위험하다는
눈으로 보는 게 지금 우리잖아요? 혹시 브로커랑 치는 것 아니냐고.
=우리도 사실 연봉 계약한다는 것뿐이지 샐러리맨 아닙니까? 미국서도
브로커는 BMW 타고 펀드매니저는 올즈모빌 탄대요. 우리도 브로커는
그랜저XG 타는데 매니저는 엘란트라, 프라이드 베타도 타잖아요.
실생활에선 참, 소심하게 살지요.
◆주식 정책, 정말 이거 말이 됩니까
=다행히 철회되긴 했지만, 이번에 장기주식저축상품 도입하면서
손실보전해주겠다고 했던 거, 그런 정책이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가
있어요.
=주식이 뭡니까. 위험과 기대 수익의 곡선인데, 정부가 투자 손실보전을
해줄 경우 위험 부분은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아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투자자들이 투기적인 거래를 일삼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돈
물어주니까 맘대로 해보자는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나, 주식 투자
하지 않는 사람들 세금으로 주식 투자 손해 물어주는 것의 모순은 어떻게
하려고 그랬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식 순매수 결의는 어땠고요. 80년대 선배들이 겪었던 순매수 결의
얘기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선거 앞두고 이런 일 한두 번 벌이지는 게 아닐 겁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부터가 더 걱정됩니다.
=우리 나라는 대통령제지만, 실제론 대통령이 아녜요. 왕이지, 왕.
=금융정책 주무부처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시장활성화 아이디어를
내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정리해서 내놨죠. 손실보전
아이디어도 그렇게 나온 것 아니겠어요?
=대만 투자자들이 데모를 했답니다. 한국 정부는 주가가 떨어지기만 하면
증시 부양책을 내놓는데 대만 정부는 왜 주가 정책 안 내느냐는
데모였다더군요.
◆주부가 주식 손대면 애들도 안돌봐
=개인투자는 절대 말리고 싶습니다. 주부가 주식투자에 몰두하면 아이들
안 돌봅니다, 밥상에 반찬이 없어요. 회사원이 투자하면, 일 못합니다.
99년에 비해 펀드 수익률이 떨어졌다해도 원금 까먹은 정도죠.
개인투자자는 완전 깡통찼습니다.
=세계적인 펀드매니저 피터 린치는 주식 투자에 앞서 집을 사라고
했습니다. 주식도사라는 피터 린치 조차도 주식은 여윳돈으로 하라고 한
거죠.
2001,10,19 조선일보 기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