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16일 충북 음성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도자들의 선물을 받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의 리더십을 거론할 때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이 솔선수범과 언행일치다. 교황이 된 후에도 으리으리한 거처 대신 바티칸을 찾는 외지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용하는 호텔인 ‘성 마르타의 집’에서 그대로 머물면서 아르헨티나 시절부터 사용해온 낡은 가슴 십자가를 그대로 쓰고, 50달러짜리 스와치 시계를 차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우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 눈앞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한국에서의 행적도 그랬다. 음성 꽃동네에서 장애인 시설인 ‘희망의 집’을 찾았을 때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와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거듭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고 해도 교황은 앉지 않았다. 그리고 선 채로 1시간 내내 장애인의 손을 잡아주고, 껴안고, 어루만지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원래 ‘희망의 집’은 한국식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 교황 방한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게 한국 천주교계 내에서 한때 문제가 됐다. “서양인들은 신발을 벗지 않고 실내에 들어가는 데다, 고령의 어른에게 구두를 벗게 하느냐”는 한국식(?) 우려가 일부 제기된 것. 결국 방한준비위는 바티칸의 의전 책임자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교황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교황은 의자에 앉아 구두를 벗었다. 교황청 고위 관리와 경호원, 취재진 모두 다 신발을 벗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중계 화면에서도 ‘희망의 집’에 들고 나는 시간이 한참 걸릴 수밖에 없었다.
꽃동네 에피소드에서 보듯 ‘낮은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먼저 낮은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허겁지겁 따라간다. 솔선수범이 얼마나 무서운 덕목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황이다. 교황의 이런 행동은 예수님을 본받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다가 가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본받자는 것. 그리고 교황은 적어도 사제, 수도자라면 예수를 본받을 것을 요구 아니 질타한다. 한국에서도 주교, 사제, 수도자들을 만나서는 부드러운 어투이지만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을 걷어내고 그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너희들이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똑바로 살고 있느냐?”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명품족’이었다. 그리고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20년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보필했다. 한마디로 바티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만큼 ‘바티칸 때’도 묻은 셈이다. 하지만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즉 지금의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만 살았다. 주교, 대주교, 추기경 시절에 바티칸을 찾기는 했지만 회의 때문에 잠깐 들르는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의 솔선수범과 언행일치로 얻은 명분을 가지고 그동안 소문이 무성하던 바티칸 재정 개혁까지 손대고 마피아를 파문할 ‘힘’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교황 방문을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는 ‘기대’가 넘쳐났다. 세월호를 비롯해 밀양 송전탑, 쌍용차, 제주 해군기지 등등이 그랬다. 여기엔 대부분 운동권 단체가 개입해 있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포함됐다. 이들은 교황의 ‘한 말씀’을 갈구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노골적으로 일부 언론을 통해 표출하기도 했다. 그들이 기댄 언덕은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 중 “거리로 나가라” “정치는 중요한 영역,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100시간의 방한기간 동안 교황은 우리 사회의 구체적 사안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00시간 동안의 교황 행적을 보면 그들의 기대 자체가 ‘오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을 4박5일 내내 챙겼다. 서울공항에서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하곤 가장 오랜 시간 이야기를 들어준 대상이 세월호 가족이었다. 그뿐 아니라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미사에 앞서 유가족을 따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세례’를 청(請)한 희생학생 아버지를 주한교황청대사관으로 따로 초대해 단독 세례식을 열어줬다. 다음날인 16일 광화문 시복 미사 전 퍼레이드 때에도 예정에 없이 차량에서 내려 손을 맞잡아줬다. 그리고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에겐 별도의 위로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특별법 때문에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절대 갈등의 한쪽 당사자가 되지 않고 평화의 중재자 위치에만 머무는 것이다.
‘평화 중재자’ 모습은 일본군 종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8일 출국에 앞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입장하던 교황은 맨앞줄에 앉은 할머니 7명을 만나 일일이 손을 잡아줬다. 할머니 중 일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교황은 할머니 모두에게 묵주를 선물했다. 그러나 ‘말씀’은 없었다. 그저 경청(傾聽)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우리 국민들로서는 좀 섭섭했다. 국내 사회적 문제와 달리 위안부 문제는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도 공론화(公論化)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교황의 ‘한마디’를 두려워한 일본은 언론들이 교황 방한에 맞춰 ‘교황이 할머니들을 만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을 삼갔다. 바로 한·일(韓日) 간 논쟁과 갈등이 첨예한 점을 감안한 때문으로 보인다. 귀국하는 비행기 기내(機內)에서도 교황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끌려가 이용당했음에도 품위를 지켰다”는 ‘애매한’(?) 언급만 했다. 한국민 입장에선 다소 섭섭했지만 교황은 그렇게 갈등의 한 당사자가 되는 걸 피했다.
그의 이 같은 태도가 비단 한·일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지도, 팔레스타인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저 두 정상을 바티칸으로 불러 평화회담을 하도록 초청했을 뿐이다.
교황은 시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변화도 정확히 포착해 적절히 활용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움직일 때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하는 인원 중엔 ‘미디어 4인방’이 있다.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와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바티칸 국영 CTV와 라디오바티칸 간부들이다. 이들은 수시로 만나 교황의 발언을 정리하고 이를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린다.
교황 혼자 아무리 좋은 일, 좋은 말을 해도 전달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 교황청은 미디어 활용의 달인들이다. 교황이 트위터를 통해 소통하고 팔로어가 세계적으로 1000만명이 넘는 것도 전 세계적인 ‘프란치스코 신드롬’의 한 주역이다.
이화여대 박성희 교수(커뮤니케이션학)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神)을 믿게 하고 돈까지 내도록 만드는 가톨릭 2000년 설득 노하우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교황 방한 후 국내에 일어난 ‘프란치스코 효과’는 분명 교황 스스로 보여준 언행에 따른 후폭풍. 그러나 ‘프란치스코 효과’라는 거울을 잘 들여다보면 씁쓸한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비친다. 교황의 방한은 마침 ‘명량’이란 영화로 대변되는 이순신 신드롬과 맞물렸다. 그래서 두 사람의 리더십을 비교하는 분석도 쏟아졌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400년 전의 영웅 이순신과 지금 우리에게는 ‘말’밖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손님’인 교황에 열광하는 것 자체가 취약한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황 방한 이후의 ‘허탈감’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교황은 구세주도 아니고 우리에겐 일종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박성희 교수는 “프란치스코 현상은 2000년 가톨릭 커뮤니케이션 전통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의식 그리고 여기에 더해 ‘울고 싶었던’ 대한민국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첫댓글 혹은 조선일보와 박성희교수의 박자가 맞아떨어진 것일뿐일지도 ... 모르지요.;;
허탈감, 판타지 등의 가벼운 언어유희로 그분의 진정성은 날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행한 가벼운 언어유희로 자신의 세상을 이해하는 관이 좁아질수는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