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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6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16,22-34
복 음 : 요한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뽑힙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화가에게 치명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만약 포기했다면,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과 포기의 연속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이라는 새로움은 그들에게 새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없는 새로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성령을 통해 또 다른 삶,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많은 은사와 열매를 받은 제자들은
새롭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바로 믿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줍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말씀하십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든 사건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찬"(요한 16,6) 것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떠남을 말씀하시는 건
"당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요한 16,7 참조)
예수님과의 분리는 제자들 소명의 근저가 뒤흔들리는 불안을 야기합니다.
가족과 생업과 기존 종교 질서를 버리고 따라나섰던 분이기에,
그동안 쌓인 정도 있거니와, 아직 홀로 설 준비도 안 되었고,
또 뭔가 손에 잡히는 결실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스승이 떠나신다는 사실이 충격에 가까운 근심을 불러올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제자들과 세상에 더 이로운지 아십니다.
비록 고통스러울망정 당신이 그들을 떠나가셔야만
세상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걸 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 당신이 보내실 보호자 성령께서 세상에 현존하시며
성부의 뜻과 성자의 가르침을 일깨우고 기억시켜
온전한 구원을 향해 가도록 도우시리라는 것도 아시기에 그렇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이다."(요한 16,8)
세상은 율법을 근거로 죄를 재단하고, 의로움을 판단하며 심판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면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시지요.
곧 오실 성령께서 이 모든 가르침을 밝혀주신다고 말입니다.
제1독서는 필리피에서 바오로 사도 일행이 겪은 수모를 이야기합니다만,
어쩌면 이 일화의 주인공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아니라 "간수"인 것 같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군중의 공격을 받고 정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행정관 지시로 매질을 당한 후 감옥에 갇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흔들렸다."(사도 16,26)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사도 16,26)고 하네요.
참 의미심장한 현상입니다.
사람은 종교든 이념이든 직업이든 그동안 믿고 의지하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
마치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를 보호해 주던 든든하고 안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힘겨운 과정이 시작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밑바탕부터 뒤흔들리고 비틀리는 지진과 요동은
묶여 있고 갇혀 있던 모든 제약과 구속에서 존재를 해방시킵니다.
이는 오늘의 주인공인 간수가 만나게 될 새로운 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간수는 사슬도 풀리고 문도 열렸는데
달아나지 않은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놀라 그들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원'에 대해 묻습니다.
이 와중에 어떻게 구원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극심한 충격과 위기의 순간을 맞닥뜨리면
그동안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질문과 대면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간수에게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이고,
무고하게 매 맞고 갇혀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도망칠 기회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믿는 이들"에게 존경심이 포함된 의구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바오로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모든 걸 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밝혀주신 "죄와 의로움과 심판"의 열쇠,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사도 16,33)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 밤에 그들이 서로에게 행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간수는 사도들이 육체에 입은 상처를 씻어 치유해 주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수와 그 가족의 죄의 상처를 씻어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 "기쁨"을 나누며 성령의 현존 안에 하나가 됩니다.
제게는 간수의 세례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면 세상의 "죄인"을 통제하고 다루는 준법자,
즉 "의로움을 수행하는 이"고, 그 기준은 세상 법에 의거한 "심판"입니다.
이것이 그가 순응해 살아온 질서였지요.
그런 그가 지진과 자결 시도, 사도들과의 만남을 통해 변한 것입니다.
사실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사도 16,23)받은 사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해 주고 세례받고 음식을 나눈 것은
엄연히 규정 위반이고, 세상눈으로는 "죄"가 분명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처럼 지켜온 규정의 안팎을 넘나드는 자유인이 되게 했을까요?
어떻게 그가 세례를 통해 세상 질서에서 하느님의 질서로 건너가고,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편협하고 국지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을까요?
간수로서의 경험상 그는, 강제로 갇혀 있던 이들이
통제가 풀리면 자유를 찾아 도망칠 거라고 생각해 왔겠지요.
그래서 죄인을 지키는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려 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지진으로 외적 통제(감옥 문, 사슬)가 해제된 상태에서도
자의로 감옥을 벗어나지 않고 머무르는 사도들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억압과 구속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 자유,
감옥 안에 있건 세상 한복판에 있건 누리는 진정한 내적 자유는 바로 구원의 표지니까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이롭다고 하십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잃고, 웃음도 미소도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과 규정, 관습은 하느님의 법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법규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하나로 요약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모든 법은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 때문에 아픔도 수고도 마다않는 축복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라마단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월절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이 지나고 부활 축제기간 중이었습니다.
요르단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려고 이스라엘로 많이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서 국경에 직원들이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많이 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1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이번에는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짜증을 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새치기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새치기한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분도 보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왔으니 요르단의 법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새치기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나는 성지순례를 왔지만, 저분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니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는 늦게 이스라엘에 도착해도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분들에게는 기다리는 버스가 없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나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침 강의 내용이 ‘도마복음’이었습니다.
평소에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으니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사자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사자에게 먹히면 불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가 인간에게 먹히면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육체의 욕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게 사로잡히면 불행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는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사자는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사자는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요르단에서 넘어오는 이스라엘 국경에서
저는 사자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자를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욕망,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사자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죄는 단죄받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 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 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떠나 보면 알거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낯섦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협함에 갇혀 하느님까지 거부하는 죄의 속성을 바로 잡아 주실 성령은
어쩌면 우리에게 힘겨운 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존 습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변혁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 새로움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기존의 삶을 부둥켜안은 채
철저히 성령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박병규).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성령이 오시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제를 안 것이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사랑과 품이 얼마나 큰지를, 아니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 중심의 편협한 삶에 갇혀
나 자신을, 이웃을,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관계의 단절이 있다면 지금 서둘러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안 콘실리아 수녀
떠남...
인간은 누구나 안정된 것을 추구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보다는
지금 이대로 안주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지금 눈에 보이는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그분 또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이 자신이 떠난 뒤
아버지께서 보내는 성령을 받고,
알을 깨부수고 거기에서 나와 성장하고
그들 자신에게 더 큰 이로움을 가져다줄 것임을 알지 않으셨을까.....
나와 함께 있지 않아도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때때로 우리 삶에서. 우리는 떠나야 한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은 계속 떠나는 삶이다.
지금 이곳이 너무 좋고
이곳에 마음을 빼앗겨서
떠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수님의 떠남을 떠올려야겠다.
예수님!
당신처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떠나야 할 때 당신이 떠나가신 것처럼
축복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소서.
[출처] 요한 16,5-11 부활 제6주간 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