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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설날 아침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
조선시대에는 제사가 아닌 부모님을 모시는 세배 중심이었다.
설날은 본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세배(歲拜)를 하고 떡국을 먹고 윷을 놀거나 널을 띄는 것으로 그 명절의 의미를
새겼다. 고려시대 때는 설날에 어버이에게 세배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모두였다. 다음은 고려시대 선비의
설날 시(高麗士人耘谷天錫所作庚午元正詩)의 한 내용이다.
鷄鳴起坐整衣襟, 星頭欄干曉霧深 時有兒孫來再拜, 油然發動壯年心
닭 울음소리에 깨어 일어나 옷을 곱게 단장해 입었더니
별빛이 난간에 들어와 안개가 깊도다.
그때 자식·손자들이 와서 세배를 하니,
어른된 마음이 저절로 갖추어지더라
그러나 설날에 제사를 지낸 현재의 풍속은 그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설날 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는 우리의
전통 음력 설을 지키려는 의지를 조상들에게 다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팔월 한가위 다례상과는 달리 온 민족이 떡국을 차려놓고 제사하는 설날 제사는 경상북도 성주(星州)에서 10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성주군 벽진면 수촌동에서 1896년 설날
제사가 시작된 사실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음력 신년 원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한다. 새해 원단 아침인 설날 아침을 원조(元朝)
라고 하고 명절날의 제사를 절사(節祀)라고 하여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내는 것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하는
것인데 경상북도 성주에서 처음 제사를 시작하여 전국화된 설날 구조의 변화이다. 왜인들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면서 그 이듬해인 1896년 음력 설을 버리고 양력을 받아들이라는 것에 성주 선비들이
저항하여 설을 지키려는 굳은 맹세를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한 것이 그 원조절사(元朝節祀)의 역사적 배경이다.
어떻든 성주사람들의 절개와 지조는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지금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설날
제사는 1896년(고종 33년)에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의 성산 여(呂)씨 문중에서 시작되었다. 설날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부모에게 세배를 올린 뒤, 선묘에게 음력을 굳게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맹세의 제사(誓祭)를
올림으로써 설날 제사는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설 제사 즉 전국적으로 원조절사(元朝節祀)의
시초였다.
성주의 수촌리 여씨 가문에서 최초로 시작된 설 제사는 젯상에 4대 조상의 위패를 합설(合設)하여 놓고 축 없이
술을 한 번 올리고 남녀가 함께 절을 올렸는 데 남자는 두 번, 여자는 네 번을 했다.
'설날 제사'가 고종 33년 병신년(1896년)에 경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樹村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문헌은 노석(老石) 여구연(呂九淵, 1865∼1938)의 문집인 『노석선생문집 일(老石先生文集 一)』및 『老石集二』 등에서 볼 수 있다. 『老石集二』卷三十三 「朝鮮人之祭其始行」에 「元朝節祀之始行」이라는
글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歲拜後行祭, 其儀則誓祭稱之曰元朝節祀. 高宗三十三年, 丙申元朝, 吾家行歲拜後, 行祭.
其儀則誓祭也. 四代合說焉. 祝無而一獻焉. 男女共以爲同時. 行上拜焉. 男子行再拜, 女子行四拜焉. 矢之曰吾家古守陰曆. 是, 朝鮮人之行, 其元朝節祀之始也.
세배를 한 후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모양이 맹세하는 제사로 그것을 일컬어 원조절사라 한다. 고종 삼십삼년
병신년 설날아침, 우리 집에서는 세배를 한 후에 제사를 지냈다. 그 모양이 다짐을 하는 제사였다. 4대를 합설을
하는 것이다. 축이 없으니 술을 한 잔만 올렸다. 남녀가 동시에 지낸다. 남자는 재배를 하고, 여자는 4배를 했다.
다짐하기를 우리 집은 음력을 굳게 지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사람이 행하는 설날아침 제사의
처음이었다.
『노석선생문집 일(老石先生文集 一)』 33쪽에는 다음과 같이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元朝節祀辭-自古元朝有歲拜禮兮 節祀始行近年也兮 元朝節祀何時何由行祀兮高宗三十三年兮 歲在丙申卽其時也兮 其時余年三十二兮 附倭輩罷陰曆而取陽曆兮 是其由也兮 建陽則多慶云云之渠輩舌耕兮...
본래 옛부터 설날 아침에 새배를 했는데 설날 제사(원조절사)는 근년에 시작된 것이다. 설날 제사의 시작한 때는
고종 33년 병신년이었다. 고종 32년(1895년) 일인들이 음력을 파하고 양력을 택하려는 취지에 반발한 것이 그
동기였다. 건약다경 운운하는 상놈들의 농간을...
『노석선생문집 일(老石先生文集 一)』卷之八(광복56년, 2001) 중구절, 쪽103~108)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高宗三十二年乙未倭亂後遭建陽之變樹村里吾家族人憤而排之以固守陰曆誓之是誓乃告于先靈位是謂之節祀是節祀我師守村翁發說而從之乃入約者也 余年三十一乙未元朝曉時起而洗手衣冠整齊乃行拜母前是謂歲拜是古來之習俗也 乙未七月亂起倭虜及附倭輩弑閔妃後告示曰明年丙申元朝乃罷陰曆而立陽曆云云 余年三十二丙申元朝歲拜畢後吾家始行節祀是國中初有之事也 吾家元朝歲拜畢後奉行節祀也者自丙申年名節祭祀謂之節祀
고종 32년(1895), 을미왜란 후 양력을 쉬려 하는 변을 당하자, 수촌리 우리 집안 어른들이 분개하여 배척하였다.
'음력을 지키겠다'고 선령위에 알렸던 이 맹서를 일컬어 '설날절사'라 했다.
이 절사는 우리 스승 수촌옹이 발설하여 그것을 따른 것이 약조가 된 것이라. 내 나이(로석선생) 서른 하나였던
을미년 설날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어머니 앞에서 절을 올렸다. 이를 일컬어
‘세배’라 했다. 이것은 예부터 내려오는 습속이었다.
을미년(1895년) 7월에 난이 일어나 왜로와 부왜배들이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고시하기를, “래년 병신년
설날에는 음력을 없애고 양력을 쉰다”라고 운운한 것이다. 내 나이 서른 두 살 병신년(1896) 설날에 세배를 마친
뒤에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설날절사를 행했다. 이것이 나라 안에서는 처음 있은 일이다. 우리 집안에서 세배를
마친 뒤에 절사를 모시는 것은 병신년(1896)부터이다. '명절제사'를 일컬어 '절사'라 했다.
丙申元朝行歲拜後奉行節祀以守國之矢心奉行節祀故四代一床同時行拜宜也是謂之合設同時拜不能成祝文故以無祝爲之無祝故不可三獻乃一獻爲之節祀之獻盃也者一獻故主人行拜時男女祭官皆從拜焚香節也者主人行之如忌祭祀參神辭神節也者主人以下男女祭官皆行拜如忌祭祀正月元日節祀祭需用餠羹
병신년(1896) 설날에 세배를 한 뒤에 절사를 받들어 행했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마음으로 절사를
받들어 행했다. 때문에 4대를 한 상에 배설하고 동시에 절을 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를 일컬어 '합설동시배'라
했다. 축문을 쓸 수가 없어 축문없이 행했다. 축문이 없는 까닭에 3헌(초헌, 아헌, 종헌)을 할 수 없어 1헌만 했다.
절사에서 헌배라는 것이 1헌인 까닭에 주인(제주)이 절을 할 때 남녀제관 모두가 따라서 절했다. '분향' 절이라는 것도 주인이 행했는데 기제사와 같았다. '참신' '사신' 절이라는 것도 주인 이하 남녀 제관 모두 절을 행함이 기제사와 같았다. 정월 초하루 절사 제수는 “떡국”을 썼다.
樹村里吾家自丙申年元朝歲拜畢後奉行節祀是國中最先起者也附倭輩罷陰曆而建陽曆故吾家族人憤而排之乃以固守陰曆誓告于四代先靈歲拜畢後以奉行節祀爲約是約乃樹村鄕約也是皆我師守村翁發說而入約者也星州鄕內門戶家中自丁酉從者出焉丁酉高宗三十四年也
수촌리 우리 집안은 병신년부터 설날 세배를 마친 뒤에 절사를 받들어 행했다. 이는 "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일으킨 것"이었다. 부왜역적은 음력을 없애고 양력을 쉬려 한 까닭에 우리 집안 어른들이 분개하여 그것을
배척하였다. 음력을 지키고자 4대 선령에게 맹서하며 아뢰었다. 세배를 마친 뒤에 절사를 행하겠다고
약조했다. 이 약조가 곧 '수촌향약'이었다. 이는 모두 우리 스승 수촌옹이 발설하여 향약에 들게 된 것이다. 성주
고을 안의 문호가 중에서 정유년부터 따르는 집이 나오게 되었다. 정유년은 고종 34년(1897)이다.
설날 제사는 나라의 전통을 지키려는 맹세의 제사 즉 서제(誓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석선생문집 일
(老石先生文集 一)』은 노석선생(老石先生)의 손자인 짐계선생(斟溪先生)이 그의 제자에게 물려준 것을 출판한
것이다. 노석 여구연(呂九淵) 선생의 관향은 성산가야의 성산(星山, 지금의 경북 성주)으로 자(字)는 여극(汝極)
이다. 노석선생은 1865년(고종 2년)에 태어나서 1938년에 타계한 선비였다.
경복궁 교태전에서 세종대왕 태봉안 의식을 재연하고
성주로 향하는 행렬
그렇게 시작된 설날 제사는 전국적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43년만인 일제 식민지의 한 중간에 금지를
당한다. 1939년 정월 초하루 설날에 조선총독부령으로 음력 설날 제사 즉 원조절사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때 경남 함안 학곡리 사람인 경암(敬庵) 조용극(趙鏞極, 1885∼1967)의 문집인 『경암집』에서 "기묘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행하는 제사인 아베·할베에게 올려왔던 그 제사를 행하지 못 하도록 총독부 금지령이 내려졌다.
슬퍼서 한 절의 시를 지어서 회포를 펴 본다."(己卯, 以時禁 不祭父祖. 愴然賦一絶, 以舒懷)라고 기록하면서
거기에는 한 편의 시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正朝不祭先, 懷古坐 然. 非欲禮斯闕, 無奈世運遷
정월 초하루 아침에 선조에게 올려왔던 제사를 지내지 못 하고,
옛일을 가슴에 품고 앉았으니 슬픔이 일어나도다.
이 제사를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오나,
세태 운세가 옮겨진 것을 어찌하랴.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와 더불어 일본의 압력은 설날을 폐지하고 양력설을 강조하면서 단발령을 내린 것이다.
거기에 맞서 성주 수촌리 여구연(呂九淵) 선비는 조상 앞에 맹세를 하는 설날 제사를 한 것이다.
오랜 세월 제사 없는 설날을 맞이한 전통이었지만, 1896년부터 원조절사 즉 설날 제사가 시작되어 새로운 설날
전통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매년 설날이 되면 조상들에게 제사를 하지 않고 그냥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어딘가 조화롭지 못 한 감이 있을 것만 같다. 성주사람 여구연 선비는 우리 민족의 전통 설날을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상들에게 다짐하는 맹세의 애국 제사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새해 설날 명절은 태양숭배시대의 명절이기도 하다. 유교 5백년 역사에서도 새해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에 이처럼 외세의 양력 강화를 배척하여 조상들에게 맹세의 제사를 올리게 되어 설날의 새로운 풍속이 되었다. 그것은 전통보존과 함께 조상들의 힘을 합쳐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 뜻이 있는 일로 받아들여 성주에서 시작된 이와 같은 설날 제사가 전국적으로 퍼져가 자연스럽게 애국 애족의 마음과 함께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주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또한 외세에 저항하여 버티기에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은 틀림없다. (09/14/09 오두)
대사9회 재구 동기 구산 김규호 교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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