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레스터시티(이하 레스터)는 26라운드에서 아스날에게 비록 패했지만 여전히 우승컵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지키고 있다. 시즌 초 반짝 돌풍으로 생각된 적도 있었지만 이미 이변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즌 후반까지 성적을 유지한다는 ‘결과’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고, 최근의 경기력을 보면 ‘과정’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레스터는 이번 시즌 어떤 결과를 받아들더라도 가장 성공적으로 보낸 클럽으로 기억될 것이다. 무엇보다 부상 등의 돌발 변수만 아니라면 레스터는 시즌 막판까지 선두 경쟁에 나설 수도 있다.
레스터의 경기력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사실 전술 자체는 많은 이가 알고 있듯이 간단하다. 탄탄한 수비에 이은 역습 전술이다. 라니에리 감독의 지도 하에 레스터의 역습은 단순하지만 매우 잘 조직되어 있다. 공을 탈취한 후에 역습으로의 연결이 매우 매끄럽고 상대에겐 치명적이다. 개인기가 출중한 마레즈와 주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디가 그 핵심에 있다. 공격을 위해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상대의 볼을 탈취해서 배후 공간을 노리는 공격은 시즌 내내 효과를 보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의 진정한 강함은 바로 수비 전술에서 시작된다.
(△ 논란이 있긴 했지만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며 여전히 득점 경쟁에서 선두에 올라 있는 레스터 시티의 제이미 바디. 출처:SKYSports 홈페이지)
이번 시즌 레스터는 토트넘, 아스날,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사우스햄튼, 맨체스터시티에 이어 실점이 적은 팀이다. 최소 실점 팀은 아니지만 레스터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특별히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주전 중앙수비수인 후트와 모건은 발이 상당히 느린 선수들이다. 그럼에도 약점을 노출하지 않고 리그에서 6, 7번째로 강한 수비를 갖추고 있다. 중앙수비수의 발이 느리다는 치명적 약점을 팀이 전술로 잘 커버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즌의 2/3를 보낸 지금까지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레스터의 수비엔 이유가 있다.
레스터는 일단 ‘두 줄 수비’를 곧잘 구사하고 있다. 측면을 다소 내주더라도 중앙에서 집중력 있는 움직임으로 완벽한 슈팅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번 아스날 전에서도 중앙수비수들이 결정적인 상황마다 공격수들을 괴롭혔다.(후반전에 발생한 퇴장 이후에 여러 번 위기를 노출했는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수비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두 줄 수비가 성공한 후엔 빠른 역습으로 상대의 골문을 위협한다. 극단적 수비라면 언젠가 골을 허용하고 패배할테지만, 날카로운 역습을 전개하여 상대를 괴롭힌다. 레스터는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득점이 많은 팀 중 하나다. 날카로운 칼이 숨어있기에 레스터의 방패를 무차별적으로 두드릴 수만도 없다.
레스터가 상대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전술은 전방 압박이다. 이 때 레스터의 수비는 공격수들로부터 시작된다. 레스터가 공격을 하다가 공을 잃었을 때에 공격수들의 수비가 빛을 발한다. 상대의 공격이 시작될 때 바디와 오카자키 같은 공격수는 공을 빼앗으려는 수비가 아니라 상대가 횡패스나 후방으로 패스를 하도록 견제한다. 그리고 전방에서 상대를 한 쪽 측면으로 유도한다. 때로 공격수들이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엔 미드필더들이 1차 저지선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레스터 팀 전체가 기본적으로 뛰는 양이 많다. 전방부터의 수비를 통해 공격 속도를 늦춘 후 공격 방향을 한쪽 측면으로 몰고 나면, 헌신적이고 활동량이 많은 레스터의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이 1:1로 압박을 가해주면 상대는 공격을 전개할 때 계속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크게 두 가지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첫째, 전방에서 공을 다시 탈취해서 공격으로 연결할 수 있다. 둘째, 레스터인 장기인 역습이 실패했을 때 재역습을 막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으로, 발이 느린 중앙수비수들을 비롯해 수비 조직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후술할 세 번째 이점이 있다.
26라운드 아스날 전에서의 전반은 레스터의 전방 압박이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공을 지키는 능력이 뛰어나고 드리블에 자신 있는 알렉시스 산체스와 외질이 전반전 내내 압박에 고생했다. 레스터와의 전반전은 이번 시즌 바이에른뮌헨과의 UEFA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 시달렸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사실 아스날이 이렇게 압박에 시달리는 것을 쉽게 지켜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비록 후반전 대니 심슨의 퇴장과 함께 경기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끝내 역전 골을 내주면서 ‘구너(아스날 팬의 별명)’들에게 짜릿했을 승리를 내줘야했지만 그들의 경기력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점은 레스터는 전방 압박을 통해 상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레스터는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축구를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레스터가 ‘언더독(승리할 가능성이 적은 팀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쉬운 일이다. 예를 들어 바이에른뮌헨을 상대로라면 주도권 싸움에서 지거나 압박에 시달리는 것 자체에 크게 놀랄 이유도 없고 받아들일 때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클럽을 상대로 압도할 능력을 가진 팀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레스터는 분명 그런 압도적인 클럽이 아니다. 지난 시즌 가까스로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한 레스터를 상대하는 클럽들은 충분히 레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섰다가, 레스터의 강한 전방 압박에 시달린다. 공을 빼앗은 후에 다시 압박에 공을 빼앗겨서 위기를 노출하기도 하고, 공을 지켜낸다고 해도 레스터의 '두 줄 수비'를 처음부터 뚫어내야 하는 부담을 않아야 한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이다.
(△ 전반전엔 압박에 시달린 메수트 외질과 후반전의 해결사 시오 월콧. 전반전의 아스날은 레스터의 강한 수비 때문에 뜻대로 경기를 풀지 못했다. 출처:SKYSports 홈페이지)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가 바로 경기를 '말리게' 할 수 있다.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몸을 사용하지만, 그 몸을 지배하는 정신적 측면이 무척 중요하다. 정신적으로 헛점을 찔렸을 때 경기에 말리게 되고, 바로 그 때 '이변'이 나타날 확률이 크다. 레스터는 시즌 내내 언더독의 위치에서 '이변의 승리'를 이어왔다. 리그 선두를 달리는 지금도 여전히 ‘언더독’의 자세로 경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는 분명 어떤 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숙련도 높은 전술을 가지고 있다.
레스터의 개인 능력이 빅클럽의 유명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전술과 함께 성실한 선수들로 극복하고 있다. 사실 레스터의 선수들은 단점이 분명히 있는 선수들이지만, 경기를 지켜보면 개개인의 단점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팀으로서 움직이면서 단점은 서로 보완하고,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 시킨 전술로 상대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뚝심 있게 자신들의 장기를 잘 살린 전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많은 ‘언더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단점을 애써 감추거나 만회하려는 것보다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즌 막판까지 1위 경쟁에 나서는 레스터를 보니 이제 하나의 역사가 탄생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시즌 막판으로 향할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도 많아지고, 지금까지와 달리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받는 경기도 생길 것이다. 우승DNA라는 말이 있는 것은 승부처에서 강한 팀이 있고, 그것은 경험과 전통과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언더독' 레스터는 과연 시즌 막판의 치열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대답은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약팀의 꿈같은 반란을 바라며 레스터의 우승 경쟁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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