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수문통 바지락 회무침
그럭저럭 점심참이 다 되었다. 장흥 휴양림을 떠나서 점심을 먹으려고 도착한 곳이 수문통 득량만 바닷가에 자리 잡은 정남진 식당.
일행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나는 식당 거리를 걸어 다니며 담배 가게를 찾았다. 꽤 오래 담배를 안 피웠는데 미륵사 주차장에서 홍어 애를 먹은 다음부터는 줄곧 비위가 상하여 입 안에 말간 침이 고였다. 담배를 피워 물면 상했던 비위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담배 가게는 두 곳이나 되었지만 담배를 사는 데 실패했다. 전부 가게 문을 잠그고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돌아와 주인 남자한테 한 대 얻어서 피웠다.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대니 정말로 상했던 비위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수문통에는 전보다 식당이 훨씬 많이 들어서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끔 가까운 술벗을 꼬드겨 목포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수문통까지 승용차로 달려왔다. 순전히 바지락 회 무침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3,4,5월이 제철이라고나 할까. ‘봄 조개 가을 낙지’라더니 역시 바지락은 봄철이 가장 맛있었다. 득량만 고운 뻘밭에서 캐낸 살이 통통 오른 바지락을 산 채로 까서 채소와 초고추장에 버무린 회 무침이 술안주로는 그만이었다. 봄이 지나고 수온이 올라가면 비브리오균 감염이 무서워서 날 바지락은 먹을 수 없다. 살짝 불에 익혀서 무친다. 물론 데친 바지락과 날 바지락의 맛은 천지 차이다.
유월 중순, 데쳐서 무친 바지락 회에 쌀밥을 비벼 먹으면서 나는 십여 년 전까지 기를 쓰고 먹으러 다녔던 날 바지락 회 무침을 끝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섬진강 휴게소
바지락 식당을 나온 농사차는 벌교 순천을 지나 고속도로로 올라서서 섬진강 휴게소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당구차를 만났다.
남한에는 이름 있는 강이 여남은 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맑고 깨끗한 강이 섬진강이 아닐까 싶다. 그 까닭은 아마도 섬진강 부근이 인가가 가장 적고, 지리산 자락을 끼고 도는 탓으로 물빛이 훨씬 맑고 곱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섬진강에서 잡히는 은어나 참게 재첩 다슬기는 일급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어패류들이다.
6월 15일 수요일 오후 세 시,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들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치고 있을 시각이었다. 그 시각에 3-40여 년의 교단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화백회(화려한 백수) 회원들은 섬진강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다녀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커피 대신 시원한 ‘파시통통’을 깨물어 먹었다.
남해대교
농사차는 섬진강 휴게소에서 20여 킬로 달리다가 우회전하여 남해도 들어가는 남해대교로 접어들었다.
“그 때는 정말 답답하고 웃겼어.”
임 선생인가 문 선생인가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와 임 선생, 문 선생이 1970년대, 80년대 선생질할 때에는 해마다 중학생들 수학여행 코스에 거의 단골로 들어간 곳이 남해대교였다.
그 답답하고 웃기던 시절에는 전라남도의 관광 숙박업소 입김이 거세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부터는 열외였지만 중학교까지는 전라남도 바깥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 명문화되지 않은 내규 비슷한 것으로 도 바깥 여행을 막았다. 전라남도의 관광 산업을 진흥시킨다는 명분이었다. 남해대교는 경상도였다. 도내 여행만 허용하되 가장 큰 선심을 쓴 곳이 남해대교까지였다.
남해대교가 끝나는 곳에서 하차한 46년생들은 옛날 70년대 80년대 그 답답하고 웃기던 시절에 수학여행 때마다 들렀던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 시절에는 남해대교 부근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겨냥한 장사치들이 북적거렸다. 꼬챙이에 끼운 말린 홍합이 쫄깃쫄깃 먹을 만했다. 그러나 이제 어느 곳에서도 말린 홍합꼬치를 사라고 외치는 노점상은 보이지 않았다.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임 선생 문 선생 사진을 디카로 찍어주면서 나는 문득 영희를 생각했다. 삼십 대로 젊고 팽팽했던 나는 영희를 앞에 앉히고 관광용 말 등에 올라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카우보이처럼 오른손을 거만하게 흔들며 사진을 찍었다. 바로 임 선생 문 선생 사진 찍던 그 곳이었다. 남해대교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삼십 년이 흐른 이제는 말도 마부도 보이지 않았고 수학여행 다니는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 위에 올라 살짝 수줍은 미소를 머금던 우리 반 실장 영희가 그리워졌다. 그 아이는 어찌 그리 학급일지 글씨도 예쁘게 잘 썼는지 몰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