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를 부른 버릇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때때로 욕을 먹고, 욕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무슨 오해가 생기면 나부터도 상대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감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문제다. 욕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욕이 금인 줄 알라"는 속담이 있듯이 왜 욕을 먹는지 잘 성찰하면 남의 욕이 내 부족한 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인격을 다듬는데 보탬이 되는 양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욕에도 품격이 있다. 작은 오해에서 생긴 하찮은 일로 상대의 형편은 눈곱만치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용감무쌍한 사람은 화를 다스리기보다는 그것의 노예가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며, 사탄의 노리개 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감정의 노예로 이미 전락해 버린 사람의 얼굴을, 욕을 먹고 있는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방관자로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삿대질과 들으면 귀를 바로 씻어야 할 상스럽고 천한 욕을 들으면서도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어릴 때 어머니는 자주는 아니지만 매를 들곤 하셨는데 나는 매를 맞으면서도 어머니의 성난 모습과 고함치시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웃음을 참지 못해 맞으면서 킥킥대다 매를 배나 부른 적이 종종 있었다. 매를 맞으며 반성하고 무서워해야 할 아이가 도리어 킥킥거렸으니 화가 난 어머니는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괴씸죄’까지 더해져서 매를 불렀던 내 못난 버릇을 잘 활용하면 욕을 먹어도 아프지 않고 도리어 그것 때문에 즐거워질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자는 보복 심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라 상대가 품어대는 흥분의 열기에 휘둘리지 말자는 말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인문주의 사상가 에라스무스는 어떤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인격을 심히 모독하는 욕설이 그에게 쏟아지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그걸 본 친구가 물었다. "저런 소리를 듣고도 화가 안 나는가?" 에라스무스는 '바보가 현명함을 알 턱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바보에게서 욕을 많이 듣는다면 그만큼 현명하다는 얘기가 되는 걸세 그러니 성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명예롭다고 생각해야지"라고 대답했다니 얼마나 통쾌한 답변인가!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시쳇말로 '쌍욕'을 하는 그런 유의 사람은 누워서 침 뱉기 식으로 자신의 졸렬한 품격을 드러내고 만다. 욕설이라고 하면 무지막지한 욕설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욕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험담이 욕설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험담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진실(?)이 험담이나 욕설이 되기도 하는 데 이런 일이 배우자나 가까운 사이에도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내 아내는 게을러서 탈이야.”
"누구누구는 이혼했다며?"
"둘이 바람났나봐 밤늦게 한 차 타고 돌아다니더라."
"많이 배웠으면 다야! 혼자만 잘났어."등등
우리가 생각 없이 뱉어 내는 말, 말, 말이 다 욕이 될 수가 있음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할 일 없이 모여 앉아서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하는 욕을 멈추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입 가벼운 이들이 뱉어 낸 무책임한 구설수 때문에 한동안 도마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 구설수의 내용인즉 한참 연하의 같은 교회 집사와 내가 바람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집을 옮겨보려고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교우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낮에는 직장에 매여 있는 실정이라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한 것이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밤늦게 남녀가 단둘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이야깃거리를 못 찾아 혈안이 되어 있는 색안경 낀 수다쟁이의 눈에 띄었으니 결과가 뻔했다. 그러나 사무로 함께 차를 타고 있었을 뿐인데, 그것을 '바람났다'로 결론을 낸 그 공식이 너무 황당했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 헛소문 때문에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나, 아직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내 못난 모습에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가까이 지내고 있는 친구들의 눈치가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눈의 움직임, 어설픈 몸짓,! 평소답지 않은 부산스러운 행동거지에서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내 오감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부자연스런 감촉이었고 외톨이로 툭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슬며시 소문에 대하여 흘리자마자 그들도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당연한 헛소문으로 간주하고는 말 안 하는 편이 나를 위한 거라 판단하여 그냥 모른 척했다고 슬슬 불기 시작했다. 아무튼 사람의 몸과 마음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보내고 받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거니와 친한 사람들끼리는 하찮은 눈치만으로도 뭔가를 알아차려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구설수에 말려 욕을 먹으면서 욕을 먹을 때 품위를 잃지 않고 욕을 먹는, 마음 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우물이 깊은지 얕은지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면 안다. 돌이 물에 닿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때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 우물의 깊이와 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깊이는 다른 사람이 던지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흥분하고 흔들린다면 아직도 내 마음이 얕기 때문이 아닐까? 하소연할 데라고는 남편뿐이라 말쟁이들의 유치함에 대하여 투덜거리자 "아직도 매력이 있다는 증거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여."라며 우스개로 응답했다.
나무로 만든 닭이라는 뜻인 목계(木鷄)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장자(莊子) 달생편(達生篇)에 나오는 얘기인데, 어느 왕이 투계를 좋아하여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던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맡겼다. 열흘 뒤 왕이 “닭이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라고 묻자 기성자는 단호히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헛된 교만과 기운을 믿고 뽐내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였다는 대답이었다. 다시 열흘이 지난 후 왕이 또 묻자 "아직은 아닙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난 뒤 왕이 "이젠 싸워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채근하자 그는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열흘 뒤 기성자는 왕 앞에 나아가 "이제 다 된 것 같습니다."고 아뢰었다. 왕이 물었다. "도대체 어떠하기에?"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도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흡사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다른 닭들이 보고는 반응이 없자 다들 그냥 가버립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이라더니 기성자의 닭이 그랬던 모양이다. 조그만 일에도 설왕설래하는 나는, 아직도 복수하기를 좋아하며, 나를 비판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을 잠잠케 만들지 못해 속을 끓이고, 내 정당함을 주장하는 한편 내 뜻대로 바로잡고 싶어 하는 속물이기에 주변 환경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흔들림이 없었던 닭의 초연함을 부러워할 수 밖에 없다. 나무로 만든 닭처럼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에 개의치 않으며, 어떤 욕설에도 묵묵히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무한한 사랑으로 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그분께서 해명해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길 뿐이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주신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선한 사람! 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5-37).
누구든 인격의 추락을 가져오는 욕(辱)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져야 할 시간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욕설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전하는 사람, 그러나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욕설을 한 그 사람 자신이기에......, 남의 눈 속의 티끌을 걱정해 욕을 하기에 앞서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 내어 버리면 어떨까!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