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통영은 조선시대 수군통제영진 있었던 곳이고 그곳을 삼군 통제사가 다스렸던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2번의 삼군 통제를 지냈으며 삼군 수군 통제영이 해체 될 때 까지 208명의 통제사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 되었다.
그중에 경리 가문은 5명이 배출되었고 분적 종에서 1명이 배출 되었다.
재령이씨
이운용 생졸년 1562-1610 재임기간1605-1607 재임기간 1년 10개월로
교체이유는 임기만로 되어있고 삼군통제사이전의 벼슬은 포도대장 이었으며
통제사 이후로 옮겨간 벼슬은 남병사이고 최종적으로 높은 벼슬은 충청수사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벼슬이 무관으로 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대표적 무관 인물인것으로 생각된다.
삼군 통제사는 7번째 임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이씨 가문에서 최초인 삼군 수군 통제사는 이수일 선조이다.
이수일 생몰년 1554-1635이고 재임기간은 1625-1627이고 재임기간은 2년4개월이다.
품계는 숭록대부이고 만기교체이며 통제사 이전의 벼슬은 평안부사이고 통제사 이후의
벼슬은 형조판서이다.시호는 충무이고 호는 은암이다.
20번째 삼군 수군 통제사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된다.
▲ 이수일 장군비
34번째 통제사인 이완은 이수일 장군의 차남이다.
생몰년은 1602-1674이고 재임기간은 1644-1646 이고 2년동안 재임 한것으로 확인된다.
품계는 가선대부이고 만기로 교체되었다.통제사 이전의 벼슬은 경기수사이고
통제사 이후의 벼슬은 공청병사 이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정익이다.
▲ 이완 장군의 비
58번째 삼군수군통제사를지낸 이인하 이며 이완의 조카이다.
생몰년은 1623-1695 이고 재임간은 1679년에와서 4개월만에 교체되었는데
그 이유가 덕원에서 거제도로 이배되던 송시열을 중로에서
대접 하였다가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통제사 이전의 벼슬은 좌포장이고 이후의 벼슬은 병조참판이고
나중에 한성좌윤을 역임 하였다.
국당공파의 문중에서 세명의 통제사를 배출 하였으니 오문의 영광이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무인 집안 인것이다.
▲ 이 인하 장군의 비...... 1좌의 비는 성주에도 있다.
109번째 삼군(삼도)수군 통제사는 이우(李玗)이다.
생몰년은 1708--? 이고 재임가간은 1743-1744이고 1년1개월 동안 통제사를 역임 하였고
품계는 가선이고 병으로 사임 하였다. 통제사 이전의 벼슬은 금군별장을 역임 하였다.
영조시대에 이우에 대한 기록이 많으며 여러가지 일이 많이 나온다.
또 다른기록은 처거가 양주조씨로 나온다 그 외의 기록은 보이자 않는다.
191대 삼군통제사를 지낸 경리 인물은 이현직이다 생몰년은 1795-1876이고
조선후기에 삼도통제사를 지냈으며 재임기간은 1868-1870 이고 1년10개월을 재직 하였더
품계는 정헌이고 교체이유는 유궐지대라 되어 있고 교체이유는 어영대장으로 갔기 때문인것으로
확인되고 도총관과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형(伯衡). 총관(摠管) 이격(李格)의 아들이며, 경상좌수사 이학영(李鶴榮)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46년(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854년(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 총융사가 되었고, 이듬해 어영대장과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경복궁 중건을 감독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 전국에 암행어사를 보내 주로 변방 방비를 사찰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통제사들의 죄가 드러나 중신인 이현직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러나 1869년 호포전(戶布錢)을 걷기 위하여 작성한 호적에 향리들의 부정이 있어 일어난 고성민란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쳤고, 신미양요가 거의 끝나갈 때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