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위상
로마서 16:3-7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16: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16: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16: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16: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브르스가와 아굴라는 (행 18:2,26/고전 16:19/딤후 4:19) 원래 로마에 살았으나 로마의 제 4대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상업 도시인 고린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바울이 제 2차 전도 중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을 당시여서 그들 부부는 바울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바울과 함께 자기들의 집에 거하면서 평상시에는 장막을 만들었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18:3,4)
이렇게 보면 이들의 활동은 평범해 보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인간 세상에서 통용될 수 없는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이며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이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다’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공간적으로 자기의지가 제거된 타자에 의해 움직여지는 상태라할수 있습니다.
즉 모든 활동이 본인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해서 벌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같이 계신 분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은 배우고, 학습되어 강요된 결과가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의미로 예수밖의 삶을 부인하는 태도라 할수 있습니다.
나만 그저 내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족만 취하면 그만인것을 ‘누구 안’에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고, 잃는것이 많겠습니까?
이런상황들이 가능할려면 두가지 조건뿐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빼앗기거나 몽땅 잃는 조건이 그 하나요, 다른하나는 모든것을 가졌거나, 모든것을 빼앗을 경우입니다.
성경은 이를 전쟁터에서 빼앗은 전리품이라 말합니다.
승자에게 있어서는 적의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은 것이고 패자에게 있어서는 얻을게없는 모든것을 잃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란 전쟁터에서 적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전리품으로 인해 풍지박살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아내들이 무엇과도 바꿀수 없었던 라헬가문에서 호신부로 삼았던 드리빔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자기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진정 나로 인해 만들어진 인생인지 아니면 나보다 더 활동성 있게 발휘되면 살아계신 예수님의 작품인지 구분되어야 될 문제가 생겨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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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어놓았다’라는 것은 사명을 부여받은 상태, 즉 하나님께 모든것을 빼앗겼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즉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삶입니다.
자기가 배워온대로, 자기기분대로 사는 입장에 놓여 있는게 아니라, ‘시킨대로 사는 삶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얼마나 잘살 것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뜻대로 살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첫 열매’라는 것은 ‘죽었던 분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죽었던’ 사실 자체가 핵심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죽지않고서는 열매를 맺을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던 분인데 왜 줄곧 죽지 않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실제보다는 허상에대한 집착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는 이순신 장군은 죽어없어졌지만 그 고귀한 정신은 여전히 우리마음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만 살아계신분이 아닙니다. ‘죽었었는데 죽음의 바탕을 떠안고’ 되살아 나신 분이십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아는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것은 막연한 마음과 정신을 의지하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것임을 잊지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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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이 존재할때만이 빛에 비해서 어두움이요, 영생의 나라에 비해서 지옥이라고 할 수가 있는것입니다. 참 현실을 , 허구의 세상에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인간들의 단체에서는 도저히 통용 불가능한, ‘예수 안’이라든지,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을 ‘사도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는 것이 다른 영역에 속한 의미들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곧 이 세상에서는 교회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듯이 때가 되면 교회로 몰려들지만 성도는 교회가 없다는 것이 전혀 이상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니 분명 없어야 될 인물들이 이렇게 등장하고 있는것을 볼수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바울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이런 교회가 발생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수납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불가능의 상황들을 가지고 참된 교회를 규정해야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 그냥 빈 몸으로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비롯해서 구약의 모든 말씀을 대동하고 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있는가운데 이미죽은 모세와 엘리아를 불러내시고 이들이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알게하신것입니다.
아마 죽은후의 제자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않을것입니다. 한결같은 이들의 모습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근거로 예수님의 존재를 직접 상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기있는100명의 사람이 한날한시에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분의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이 하나님에게 유일한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존재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성립된 일이라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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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취지의 말씀을 전부 주렁주렁 달고서 예수님이 찾아들면 인간들은 그 말씀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열매’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시된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을 말씀 안에서 단촐하게 정리하면 교회란 곧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여자입니다.
여자란 자기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란, 자신의 존재 기반이요 이유요 목적이요 의미입니다. 이는 여자 스스로를 위하여 목적이나 의미를 따로 쥐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의 여자입니다. 여자란 자신의 근원을 자기에게 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발견한다면 여자의 일생에서 걱정이나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공포는 가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주인되시는 남자 쪽에서 다 처리해줄 문제입니다. 실제로 여인들은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 자체를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가족을 위해 뭘해서 그 결과물을 본인과 가족이 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족을 위해 수고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될뿐입니다.
이것은 곧 사도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그 사명조차도 ‘예수님의 신부의’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기 공로로 가져올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는 그저 ‘남자의 사랑’만 있다면 아낌없이 다 주는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결혼도 주판두드리며하고, 결혼하고도 타산이 팽배하고 사랑도 쉽게 돈에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이런 예수님의 신부로 만드셨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