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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만 權寧萬(1878 ~ 1964)】 "대한광복회 참모장"
1878년 1월 17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도계리(道溪里)에서 권인환(權寅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각헌(覺軒)이다. 영양군 입암면(立巖面) 병곡리(屛谷里)에서 거주하다가 1922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 광덕리(廣德里)로 이주하였다.
1907년 아버지 권인환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다. 1915년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김한종(金漢鍾)·정운일(鄭雲馹)·양제안(梁濟安) 등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고, 지휘장(指揮長)에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무장투쟁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력 준비·무관 양성·군인 양성·무기 구입·기관 설치·무력전’ 등의 투쟁 강령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우선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권영만 집터(경북 청송) [판형2] |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경주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한, 이른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을 주도하였다. 우재룡과 함께 일제가 영덕·영일 방면에서 거둔 세금을 운송하던 우편 마차를 경주에서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2월 24일 환자로 가장하여 우편 마차 주인집에 숙박하고, 대구의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 마차에 동승하였다. 우재룡은 경주 광명리(光明里)의 효현교(孝峴轎)를 파괴하였다. 우편 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경주 녹동(鹿洞) 박상진 집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건은 대한광복회 본부에서 최초로 실행한 군자금 모집이고, 관련 정보는 재무부장 최준(崔浚)이 입수하여 제공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는 1917년 11월 경북 칠곡에서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고, 1918년 1월 충남 예산에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는 의거를 실행하였다. 1918년 1월부터 대한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 회원이 체포되면서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한훈(韓焄)·우재룡 등과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만주 방면에서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1919년 6월 우재룡·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 등과 함께 충청도 일원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9년 8~9월경 충남 논산에 있는 안종운 집에 모여 전국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임시정부 및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군자금 모집 요구장軍資金募集要求帳」 19통을 작성하여 충남 논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논산의 부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2월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장응규(張應圭)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장응규가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 가지고 온 「주비단규칙서(籌備團規則書)」에 의거하여, 6월 서울 경신학교(敬信學校)에서 결성한 주비단(籌備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 지시에 의해 조직된 임시정부 지원 단체였다. 단장은 심영택(沈永澤), 부단장은 안종운이었다. 주비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공채(公債)를 부호들에게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서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면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본인 고관 처단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 중 1920년 6월 27일 임시정부의 주비단군자금모집사건(籌備團軍資金募集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광복단 사건 공판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2.3.27) [판형4] |
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공갈 취재(取財) 강도미수 살인강도 교사 등의 혐의로 동료 14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2년 3월 30일 징역 10년 구형, 4월 13일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9월 10일 출옥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조병옥(趙炳玉)·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와 연합군환영준비회(聯合軍歡迎準備會)를 조직하고 경호부에서 활동하였다. 12월 27일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였는데, 총무국장을 맡아 회장 이종태(李鍾台)·부회장 우재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김구(金九)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韓獨黨)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를 맡았다. 1948년 4월 민주독립당 조직부 비서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878년 1월 17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도계리(道溪里)에서 권인환(權寅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각헌(覺軒)이다. 영양군 입암면(立巖面) 병곡리(屛谷里)에서 거주하다가 1922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 광덕리(廣德里)로 이주하였다.
1907년 아버지 권인환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다. 1915년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김한종(金漢鍾)·정운일(鄭雲馹)·양제안(梁濟安) 등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고, 지휘장(指揮長)에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무장투쟁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력 준비·무관 양성·군인 양성·무기 구입·기관 설치·무력전’ 등의 투쟁 강령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우선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권영만 집터(경북 청송) [판형2] |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경주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한, 이른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을 주도하였다. 우재룡과 함께 일제가 영덕·영일 방면에서 거둔 세금을 운송하던 우편 마차를 경주에서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2월 24일 환자로 가장하여 우편 마차 주인집에 숙박하고, 대구의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 마차에 동승하였다. 우재룡은 경주 광명리(光明里)의 효현교(孝峴轎)를 파괴하였다. 우편 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경주 녹동(鹿洞) 박상진 집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건은 대한광복회 본부에서 최초로 실행한 군자금 모집이고, 관련 정보는 재무부장 최준(崔浚)이 입수하여 제공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는 1917년 11월 경북 칠곡에서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고, 1918년 1월 충남 예산에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는 의거를 실행하였다. 1918년 1월부터 대한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 회원이 체포되면서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한훈(韓焄)·우재룡 등과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만주 방면에서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1919년 6월 우재룡·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 등과 함께 충청도 일원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9년 8~9월경 충남 논산에 있는 안종운 집에 모여 전국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임시정부 및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군자금 모집 요구장軍資金募集要求帳」 19통을 작성하여 충남 논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논산의 부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2월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장응규(張應圭)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장응규가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 가지고 온 「주비단규칙서(籌備團規則書)」에 의거하여, 6월 서울 경신학교(敬信學校)에서 결성한 주비단(籌備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 지시에 의해 조직된 임시정부 지원 단체였다. 단장은 심영택(沈永澤), 부단장은 안종운이었다. 주비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공채(公債)를 부호들에게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서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면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본인 고관 처단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 중 1920년 6월 27일 임시정부의 주비단군자금모집사건(籌備團軍資金募集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광복단 사건 공판 관련 보도(『동아일보』 1922.3.27) [판형4] |
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공갈 취재(取財) 강도미수 살인강도 교사 등의 혐의로 동료 14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2년 3월 30일 징역 10년 구형, 4월 13일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9월 10일 출옥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조병옥(趙炳玉)·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와 연합군환영준비회(聯合軍歡迎準備會)를 조직하고 경호부에서 활동하였다. 12월 27일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였는데, 총무국장을 맡아 회장 이종태(李鍾台)·부회장 우재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김구(金九)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韓獨黨)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를 맡았다. 1948년 4월 민주독립당 조직부 비서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