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 진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든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흔적 1 / 황상순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삼류시인 / 황상순
애야, 생순아 이 실 좀 꿰어다오 햇살 한 올 길게 손에 들고 계신 할머니 이 바늘은 귀가 깨졌잖아요! 세상에나, 헛것을 들고 여태 씨름하였네 낙타가 배꼽을 잡고 웃겠구나 할머니 앉으셨던 마루 끝, 사막을 마악 건너온 낙타 한 마리 서성이고 있다
생순아, 네가 깎고 있는 바늘 귓구멍은 뚫어 놓았느냐 바람 휑한 네 고쟁이나 제대로 깁을 수 있겠느냐 부엌바닥 부지깽이보다 못한 詩
낙타가 하늘 보며 웃고 지나갈 와지끈 허리 부러진 詩라도 버려져 삭아지는 생선가시 따위가 아니라 눈 먼 바늘, 귀 떨어진 詩라도 누군가 새하얀 실을 손에 들고 지긋이 눈을 감고 한 번 겨누어만 준다면
방울토마토 / 황상순
쥐방울만한 것이, 저도 과일이라고 한 대접 수북 씻겨 내왔다 한 입에 툭 넣기 미안해 반쯤 깨무니 찔끔 토마토 냄새가 난다 어쭈 요것 봐라, 기특하여 손이 계속 나간다
깔보지 마라 작다고 토마토 아니냐, 저도 태어날 땐 가슴에 온 세상을 다 품었으리라 저 낳은 어민 뿌듯한 마음으로 삼칠일을 다 채워 조신하였으리 너는 언제 네 힘으로 작은 생명 하나 키워 본적 있느냐
설령 네 지금 모습이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마음이야 바다처럼 커도 상관없지 않겠니
생각하다가 그만 하나하나 작은 목숨 한 대접을 다 비운다
가정식 백반 / 황상순
얼마만의 푸짐한 식사인가 노숙자 박씨가 오후 늦게 가정식 백반집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한 상에 이천오백 냥, 소주까지 곁들였다 달걀 프라이 접시 손에 들고 후르륵 짭짭
밑바닥까지 싹싹 핥는다 게눈 감추듯 하나 둘 비어지는 접시들 기어이 밑창까지 뚫려버린 예금 통장 아껴 둔 꽁치구이 일랑 통째로 씹어 삼키려다 커-억, 가시처럼 목에 걸려오는 오글오글 젖을 파는 새끼돼지들 그림 네 '가화만사성'은 어느 벽에 걸려 있느냐 네 어린 돼지들은 어디 가고 없느냐 그만 물에 만 밥알이 되어 둥둥 뜨고 마는 박씨 눈물 찔끔 나게 목구멍이 아파서 숟가락 내던지고 다급히 소주를 들이킨다 쯧쯔, 박씨 그 소주로는 안 되겠소 밥 한 덩이 김치에 싸 꿀꺽 삼켜 보소, 채근하지만 목에 박힌 가시, 너무 깊고 크다 '가정식 백반' 유리문에 서성거리던 저녁 해가 홀 가득히 왈칵 피를 토해낸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곧 불을 켜야 하리라
어름치 사랑 / 황상순
동강(東江) 어름치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맑고 시린 거센 물살에 쌓아올린 돌탑 나 언제 그대 빈 가슴에 목숨 한 조각 얹은 적 있었던가 혼자 달아오르고 혼자 허물지 않았던가
사랑한 다음엔 미련 없이 죽으리라 흰 배 드러내고 물위로 떠올라 반짝이며 흐르다가 비오리의 한끼 먹이가 되리
내 혼은 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굽이굽이 강물 위를 날으리라 기화천 계곡 깊은 언저리 늦은 눈발로 날려가 바람꽃 한 송이로 피어나도 좋으리
동강 어름치처럼 목숨 다하여 사랑한 후엔
고생금 할망 고백기 / 황상순
그러니 어쩌겄냐,
나이 서른둘에 혼자된 몸
아침 한나절 물질에 쭈글해진 손으로
중산간 묵정밭을 갈 때
황소같은 힘으로 모난 돌 치워주던 윗동네 박씨
고맙고도 감사해서 -
볕이 너무 좋았던가 배 들어차 놓은 것이 둘째다
게민 셋째는 어떵허난 나온거우꽈
너도 알지 안햄시냐 사변 전에
한낮에는 토벌대가 진을 치고
밤에는 보도연맹이 부엌바닥에서 잠을 잤지
마을 사람 몬딱 굴비두름 엮여져
송악산, 모슬포로 끌려갈 때
유채 섶 가운데 몰래 숨겨 주었던 얼금뱅이 순경
아궁지 속에서 끌려나와 죽은 위원장인지
정말 나도 모르켜
춘삼월 유채꽃 하영 흐드러지면 지금도
뱃속에 애 든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와야
경허난 어떵허크냐, 나 홀말 다 되어시난
이 어멍 죽거들랑
네 아방 하르방 다 데꼬간 바당에나 던져다오
(곡기를 끊은 사흘 뒤 고생금 할망은 기어코 바닷속
깊이 자맥질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여싸나 이어도사나.
昇天 / 황상순
작은 산사를 향해 올라가는 산길엔 늦가을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일어 낙엽송 마른 잎들이 첫 눈인 양 부슬부슬 날려왔다
아직 난로를 놓지 않은 법당 안에서 온 몸 떨며 시리게 앉아있던 나는 활활 타오르는 유품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과 손바닥을 비벼 댔다
첫 산달이 가까운 사촌 누이는 태워야 할 옷가지와 부른 배를 부여안고 산비둘기 울음을 울었다 채 입지도 않으신 잘 다려진 한복이며 속 내의들 막내가 사다 드린 나이키 운동화가 좁은 골짜기에 연기를 올리며 오래도록 타올랐다
남기고 가믄 안된다 싹싹 비우고 가야제 요사채 방에 모여 제상 위 음식들을 나눠먹고 누군가 건네는 음복 소주 몇 잔에 취해 밖을 나서자 바라춤에 맞춰 울리던 목탁소리, 운판소리 언제인양 풍경 홀로 남겨진 절간 마당, 지상에 내려 누워있던 수많은 낙엽들이 날갯짓하며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작은 아버지의 사십구제에
장터에서 / 황상순
어느 동네서 왔을까, 저 할마시 아침을 등에 지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싸전 옆 나물 함지 빽빽한 곳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디밀고 앉는다 대광주리 속 뭉쳐진 다섯 개 털복숭이 낯선 햇빛에 놀라 얼굴을 파묻는다 허리춤 뒤적이는 할머니에게 불을 켜드리며 이걸 팔아 어디 쓰시려구요 여쭈어도 애잔한 것들 앞에 두고 또다시 기다리는 일만 남은 할머니는 쪼그라진 입으로 호물호물 담배만 빠신다
종재기의 깻잎장아찌는 몇 장 남았을라나 후 - 내뱉는 담배연기에 또 다른 강아지가 눈에 아슴하여 즈 에미 떠난 뒤 마른 젖을 물리던 가슴이 중천 햇빛에 스물스물 바스라진다
젖먹이를 팽개치고 내빼는 건 인간밖에 없지라 신명나게 짤각거리는 엿 장사 가위소리 목덜미 벗겨지던 어미 개 울음소리로 귓가에 쟁쟁거려 오냐오냐 그래그래, 내가 몹쓸 할망구지 남은 두 마리 얼른 보자기 씌워 진종일 굽은 다리를 펴 휘정휘정 일어설 때에 채 여미지 못한 홑겹 저고리 안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위태로운 저 까만 건포도 두 알
풀잎에 눕다 / 황상순
서랍을 정리하다가 생각한다 얼마만큼을 비워야 깨끗해지는 것이냐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그냥 두어야 하느냐 왈그랑 달그랑 방안 가득 끄집어내어도 온갖 발자국 손때 묻은 잡동사니 줄지를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밑바닥은 또 얼마나 많은 부스러기들 떨어져 있어 손끝을 멈칫거리게 할 것인지 오늘 비우고 또 내일 모레 버려도 버려도 못 비울 것들 뙤놈 속고쟁이처럼 주야장창 껴입고 있던 닳아진 솔기마다 노릿노릿 땟국물 배인 무쇠 화로 마냥 사타구니에 줄창 끼고 있었던 이것들 저것들 한가득 질펀히 게워낸 방바닥에 앉아 생각한다
얼마나 비워야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이냐 얼마만큼을 더 버려야 나비처럼 풀잎에 누워서 사뿐 잠들 수 있는 것이냐
오디 / 황상순
뽕나무에 올라 까아만 오디를 따먹을 때 보리밭 이랑에 숨어 쉬야를 하던 고 계집애 하얀 엉덩이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 진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든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흔적 1 / 황상순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삼류시인 / 황상순
애야, 생순아 이 실 좀 꿰어다오 햇살 한 올 길게 손에 들고 계신 할머니 이 바늘은 귀가 깨졌잖아요! 세상에나, 헛것을 들고 여태 씨름하였네 낙타가 배꼽을 잡고 웃겠구나 할머니 앉으셨던 마루 끝, 사막을 마악 건너온 낙타 한 마리 서성이고 있다
생순아, 네가 깎고 있는 바늘 귓구멍은 뚫어 놓았느냐 바람 휑한 네 고쟁이나 제대로 깁을 수 있겠느냐 부엌바닥 부지깽이보다 못한 詩
낙타가 하늘 보며 웃고 지나갈 와지끈 허리 부러진 詩라도 버려져 삭아지는 생선가시 따위가 아니라 눈 먼 바늘, 귀 떨어진 詩라도 누군가 새하얀 실을 손에 들고 지긋이 눈을 감고 한 번 겨누어만 준다면
방울토마토 / 황상순
쥐방울만한 것이, 저도 과일이라고 한 대접 수북 씻겨 내왔다 한 입에 툭 넣기 미안해 반쯤 깨무니 찔끔 토마토 냄새가 난다 어쭈 요것 봐라, 기특하여 손이 계속 나간다
깔보지 마라 작다고 토마토 아니냐, 저도 태어날 땐 가슴에 온 세상을 다 품었으리라 저 낳은 어민 뿌듯한 마음으로 삼칠일을 다 채워 조신하였으리 너는 언제 네 힘으로 작은 생명 하나 키워 본적 있느냐
설령 네 지금 모습이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마음이야 바다처럼 커도 상관없지 않겠니
생각하다가 그만 하나하나 작은 목숨 한 대접을 다 비운다
가정식 백반 / 황상순
얼마만의 푸짐한 식사인가 노숙자 박씨가 오후 늦게 가정식 백반집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한 상에 이천오백 냥, 소주까지 곁들였다 달걀 프라이 접시 손에 들고 후르륵 짭짭
밑바닥까지 싹싹 핥는다 게눈 감추듯 하나 둘 비어지는 접시들 기어이 밑창까지 뚫려버린 예금 통장 아껴 둔 꽁치구이 일랑 통째로 씹어 삼키려다 커-억, 가시처럼 목에 걸려오는 오글오글 젖을 파는 새끼돼지들 그림 네 '가화만사성'은 어느 벽에 걸려 있느냐 네 어린 돼지들은 어디 가고 없느냐 그만 물에 만 밥알이 되어 둥둥 뜨고 마는 박씨 눈물 찔끔 나게 목구멍이 아파서 숟가락 내던지고 다급히 소주를 들이킨다 쯧쯔, 박씨 그 소주로는 안 되겠소 밥 한 덩이 김치에 싸 꿀꺽 삼켜 보소, 채근하지만 목에 박힌 가시, 너무 깊고 크다 '가정식 백반' 유리문에 서성거리던 저녁 해가 홀 가득히 왈칵 피를 토해낸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곧 불을 켜야 하리라
어름치 사랑 / 황상순
동강(東江) 어름치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맑고 시린 거센 물살에 쌓아올린 돌탑 나 언제 그대 빈 가슴에 목숨 한 조각 얹은 적 있었던가 혼자 달아오르고 혼자 허물지 않았던가
사랑한 다음엔 미련 없이 죽으리라 흰 배 드러내고 물위로 떠올라 반짝이며 흐르다가 비오리의 한끼 먹이가 되리
내 혼은 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굽이굽이 강물 위를 날으리라 기화천 계곡 깊은 언저리 늦은 눈발로 날려가 바람꽃 한 송이로 피어나도 좋으리
동강 어름치처럼 목숨 다하여 사랑한 후엔
고생금 할망 고백기 / 황상순
그러니 어쩌겄냐,
나이 서른둘에 혼자된 몸
아침 한나절 물질에 쭈글해진 손으로
중산간 묵정밭을 갈 때
황소같은 힘으로 모난 돌 치워주던 윗동네 박씨
고맙고도 감사해서 -
볕이 너무 좋았던가 배 들어차 놓은 것이 둘째다
게민 셋째는 어떵허난 나온거우꽈
너도 알지 안햄시냐 사변 전에
한낮에는 토벌대가 진을 치고
밤에는 보도연맹이 부엌바닥에서 잠을 잤지
마을 사람 몬딱 굴비두름 엮여져
송악산, 모슬포로 끌려갈 때
유채 섶 가운데 몰래 숨겨 주었던 얼금뱅이 순경
아궁지 속에서 끌려나와 죽은 위원장인지
정말 나도 모르켜
춘삼월 유채꽃 하영 흐드러지면 지금도
뱃속에 애 든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와야
경허난 어떵허크냐, 나 홀말 다 되어시난
이 어멍 죽거들랑
네 아방 하르방 다 데꼬간 바당에나 던져다오
(곡기를 끊은 사흘 뒤 고생금 할망은 기어코 바닷속
깊이 자맥질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여싸나 이어도사나.
昇天 / 황상순
작은 산사를 향해 올라가는 산길엔 늦가을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일어 낙엽송 마른 잎들이 첫 눈인 양 부슬부슬 날려왔다
아직 난로를 놓지 않은 법당 안에서 온 몸 떨며 시리게 앉아있던 나는 활활 타오르는 유품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과 손바닥을 비벼 댔다
첫 산달이 가까운 사촌 누이는 태워야 할 옷가지와 부른 배를 부여안고 산비둘기 울음을 울었다 채 입지도 않으신 잘 다려진 한복이며 속 내의들 막내가 사다 드린 나이키 운동화가 좁은 골짜기에 연기를 올리며 오래도록 타올랐다
남기고 가믄 안된다 싹싹 비우고 가야제 요사채 방에 모여 제상 위 음식들을 나눠먹고 누군가 건네는 음복 소주 몇 잔에 취해 밖을 나서자 바라춤에 맞춰 울리던 목탁소리, 운판소리 언제인양 풍경 홀로 남겨진 절간 마당, 지상에 내려 누워있던 수많은 낙엽들이 날갯짓하며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작은 아버지의 사십구제에
장터에서 / 황상순
어느 동네서 왔을까, 저 할마시 아침을 등에 지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싸전 옆 나물 함지 빽빽한 곳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디밀고 앉는다 대광주리 속 뭉쳐진 다섯 개 털복숭이 낯선 햇빛에 놀라 얼굴을 파묻는다 허리춤 뒤적이는 할머니에게 불을 켜드리며 이걸 팔아 어디 쓰시려구요 여쭈어도 애잔한 것들 앞에 두고 또다시 기다리는 일만 남은 할머니는 쪼그라진 입으로 호물호물 담배만 빠신다
종재기의 깻잎장아찌는 몇 장 남았을라나 후 - 내뱉는 담배연기에 또 다른 강아지가 눈에 아슴하여 즈 에미 떠난 뒤 마른 젖을 물리던 가슴이 중천 햇빛에 스물스물 바스라진다
젖먹이를 팽개치고 내빼는 건 인간밖에 없지라 신명나게 짤각거리는 엿 장사 가위소리 목덜미 벗겨지던 어미 개 울음소리로 귓가에 쟁쟁거려 오냐오냐 그래그래, 내가 몹쓸 할망구지 남은 두 마리 얼른 보자기 씌워 진종일 굽은 다리를 펴 휘정휘정 일어설 때에 채 여미지 못한 홑겹 저고리 안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위태로운 저 까만 건포도 두 알
풀잎에 눕다 / 황상순
서랍을 정리하다가 생각한다 얼마만큼을 비워야 깨끗해지는 것이냐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그냥 두어야 하느냐 왈그랑 달그랑 방안 가득 끄집어내어도 온갖 발자국 손때 묻은 잡동사니 줄지를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밑바닥은 또 얼마나 많은 부스러기들 떨어져 있어 손끝을 멈칫거리게 할 것인지 오늘 비우고 또 내일 모레 버려도 버려도 못 비울 것들 뙤놈 속고쟁이처럼 주야장창 껴입고 있던 닳아진 솔기마다 노릿노릿 땟국물 배인 무쇠 화로 마냥 사타구니에 줄창 끼고 있었던 이것들 저것들 한가득 질펀히 게워낸 방바닥에 앉아 생각한다
얼마나 비워야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이냐 얼마만큼을 더 버려야 나비처럼 풀잎에 누워서 사뿐 잠들 수 있는 것이냐
오디 / 황상순
뽕나무에 올라 까아만 오디를 따먹을 때 보리밭 이랑에 숨어 쉬야를 하던 고 계집애 하얀 엉덩이
첫댓글 나무에 달린 사과를 따 바지에 쓱쓱 닦아...한 입 뭉텅 깨무는 그 향기로움이 시에서 베어 나옵니다. 작가의 이름을 안 써 놓으면 동산님의 시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그리고 "옥수수를 기다리며"란 제하의 시와 무당벌레 그림 또한 일품입니다.
'소나기 그친 뒤 /장독대 빈 독에 달이 들었다 /찰랑찰랑 달 하나 가득한 독 /어디 숨어있다 /떼지어 나온 개구리 달 내놓아라 달 내놓아라 /밤새 아우성이다 ' 어쩜 요렇게 예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마냥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