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관광 10주년 오늘(18일) 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만 10년 째가 되는 날입니다. 금강산 관광이 그동안 남북관계에서 차지해 온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참 의미가 깊은 날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요. 지금 상황은 그렇게 기뻐할 분위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지난 7월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이 기약없는 중단 사태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식/현대아산 사장 : 금강산에서 공동행사 긴밀히 협의했는데, 북에서 여러 사정상 현대아산과 하는 것은 문제 없지만 그래도 자제하자는 뜻을 전달받고….] 금강산 관광의 위기는 남북관계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특히 지난 12일날 남북간의 직통전화를 끊겠다는 선언과 함께 다음달 1일부터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밝혔는데요. 북한의 통지 내용을 살펴보면 좀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북한이 다음달 1일까지 시간을 20일이나 시간여유를 줬다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이 해 온 행태를 보면 당장 내일부터 뭘 하겠다든가, 아니면 적어도 이번 주말부터 뭘 하겠다는 식이었지, 시간을 20일씩이나 주면서 기다려준 적은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까 그 때까지 뭔가 조치를 좀 취해달라' 이런 뜻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통행을 전면 차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완전히 막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막겠다는 것도 아니고 '참 애매한 표현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결국 종합적으로 보면 전반적인 경고를 통해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를 촉구하고는 있는데, '남북관계를 완전히 틀어막기에는 자기들도 부담이 있다' 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북한이 계속해서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가 무시하면 북한은 오기에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정부가 북한에 군 통신자재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든가 대북지원을 하는 민간단체에 남북협력기금을 다시 지원한다든가 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데요.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북한이 강경조치를 누그러뜨릴 지는 미지수입니다. 어찌보면 북한이 강하게 나온다고 '우리가 왜 북한에 유화책을 써야 하느냐' 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SBS 안정식 기자
[1998년] 금강산관광 1호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금강산 관광 1호선인 현대금강호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43분 동해항을 출발, 4박5일의 일정으로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 현대금강호에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총지휘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관광객 8백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백66명 등 모두 1천3백65명이 승선했다. 한반도 분단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북한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해항을 떠난 금강호는 19일 새벽 3시쯤 북방어로한계선을 통과, 출항후 10여시간이 지난 오전 4시쯤 북한 장전항에 도착해 구룡폭포, 만물상, 해금강 등 3개 코스로 나누어 관광한 후 22일 새벽 무사히 동해항에 도착했다. 이번 관광은 남북간 경제협력과 인적교류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조선
[1884년] 국내 최초 우표 발행
← 구한말 우리나라 최초 우표. 왼쪽 위부터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개화파 홍영식과 생사를 같이 했다. 홍영식은 첫 우정총감에 올라 첫 우표를 발행하는 공을 세웠지만 갑신정변 실패로 그가 참살되면서 우정총국도 폐지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발행된 것은 1884년 11월 18일. 아직 우표란 용어가 없었는지 우표에는 한글로 ‘대조선국 우초’, 영문으로 ‘COREAN POST’라고 쓰여있었다. 우표가격은 당시 통용화폐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된 5문·10문이었다. 원래는 25문·50문·100문까지 5종을 일본 대장성에 제조를 의뢰했으나 우정총국이 폐지된 이후 나머지 3종이 도착하는 바람에 미발행 우표가 됐다. 발행우표도 실제로 사용됐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조선 갑신정변으로 우정업무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1895년 미국에서 인쇄된 태극우표, 1897년 가쇄우표, 1900~01년 이화소형우표 등이 발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우표가 한국에서 통용되었고 8·15해방 후 일본에서 인쇄된 해방조선기념우표가 1946년 5월 1일 처음으로 발행되었으며, 같은 해 광복1주년기념우표가 서울 정교사에서 인쇄·발행되었다. 1946년 이후 1992년 12월말까지 발행된 우표는 모두 1,707종이며, 현재 정보통신부에서 발행한다. 우표의 창안자는 인쇄업을 하던 영국의 J. 차머스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 최초의 우표는 영국의 우편제도를 개혁한 R. 힐에 의해 1840년에 발행되었다. 힐의 개혁에 의해 우편요금을 선납하게 되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이때 나온 우표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담긴 1페니짜리 흑색 우표로서 '페니 블랙'이라고 불렸다./브리태니커
[1884년] 우정총국, 우정업무 개시
조선 후기인 1884년(고종 21년) 11월 18일, 우리나라도 역참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통신제도로 우체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인 우정총국을 개국했다. 이에앞서 개화기 선각자 홍영식은 일본과 미국 등을 둘러본 후 근대 우정제도 도입이 절실함을 느끼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직제를 공포했다. 우정총국 청사는 견평방(堅平坊)에 있던 전의감(典醫監)을 고쳐 사용하였고, 병조참판 홍영식을 우정총판으로 임명했고, 박영효 등 15명이 사사(司事)가 되어 사무를 분담했다.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이 먼저 개국하여, 최초의 근대우표 5문, 10문의 2종이 발행됨으로써 한국최초의 근대식 우편업무가 시작되었다. 이는 비록 일본보다는 10년 뒤쳐졌지만 청국보다는 앞선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 영국, 홍콩 등과 우편물교환약정을 맺고 우정업무를 개시했으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개업 축하연날 갑신정변이 발발하여 12월 9일 문을 닫았다. 1895년 우체사가 개국할때까지 조선은 역참제를 다시 이용했어야 했다. /조선
[1982년] 권투선수 김득구 사망
← AP통신은 1982년도 `스포츠10대뉴스`를 발표하면서 김선수의 사망을 5위로 올렸다. 1982년 11월 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데저트 스프링스 병원. 김득구(23살) 선수가 사망했다. 챔피언 레이 맨시니의 주먹에 의식을 잃은 지 99시간만이었다. 김 선수는 지난 11월 14일 미국의 라스베이가스 시저스팰리스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진 프로복싱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인 미국의 레이 붐붐 맨시니(21)에게 14회 KO패 당한 후 의식을 잃고 데저트스프링스병원에서 긴급뇌수술을 받았다. 김선수는 수술 후 5일간의 처절한 생존투쟁과 갖가지의 의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원한지 99시간15분만인 이날 사망했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그는 14살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구두닦이, 껌팔이를 거쳐 서울 구로공단 보세공장에서 생존의 문제와 처절히 싸웠다. 16살에 시작한 권투는 지겨운 바닥생활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조선
[1903년]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 체결 1903년 11월 18일 워싱턴에서 파나마 대표 필리프 뷔노 바리야와 미국 국무장관 존 M. 헤이는 파나마 지협의 운하 건설 부지를 미국에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미국이 신생공화국 파나마에 금전적 보상과 보호 보장을 하고, 파나마는 그 대가로 미국에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독점적 건설권을 부여할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국은 1903년 1월 22일 당시 파나마를 통치하던 콜롬비아에게 비슷한 조건을 제시했다가 거부당했다. 파나마는 미국의 도움으로 그해 11월 3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고, 3일 후 미국은 독립을 승인했다. 미국은 이 운하지역을 통치하고 요새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파나마는 그 대가로 독립을 보장받았다. 또한 파나마는 미국으로부터 일시불로 1,000만 달러를 지급받고 9년 후부터는 연간 25만 달러를 지급받게 되었다. 이 조약은 1904년 비준되었고, 1914년 운하가 완공되었다. 조약의 해석문제나 미국의 해당지역 파나마인에 대한 차별 등으로 인해 간헐적인 분쟁이 발생했으며, 1978년에는 미국이 해당지역에 대한 통제권과 2000년 이후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파나마에 이양한다는 내용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2년] 영국 작가, 화가 루이스 (Percy) Wyndham Lewis 출생
← Self Portrait With Hat (1932) 1882년 11월 18일 태어남 / 1957년 3월 7일 죽음
"내게 만물(萬物)의 겉모습을 보여달라.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의 겉모습에 열광한다." - 윈덤 루이스, 1937
루이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예술과 산업과정의 관계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추상적인 소용돌이파(Vorticist) 운동을 주창한 영국의 화가이자 작가이다. 1914년 소용돌이파 문예지 <블라스트 Blast>에 실린 루이스의 글은 이미지즘 시의 경향을 보이지만, 그림의 구상은 거친 형상을 격렬하고 극적으로 처리해 속도와 기계문명을 찬양하는 미래파(Futurism) 운동과 공통점이 많다. 1918년 첫소설 <타 Tarr>를 출판했고, 1930년 부유한 문학애호가들에게 일격을 가한 풍자소설 <신의 원숭이들 The Apes of God>로 런던 문단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0년대에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파시즘을 찬양하는 책들과 논문을 발표해 많은 친구를 잃고 평판이 나빠졌으며, 1930년대말에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방송공사(BBC)의 기관지 <리스너 The Listener>의 미술평론가가 된 그는 마이클 에어턴,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칭찬하는 인상적인 기사들을 썼고, 1951년 시력을 잃을 때까지 활동했다.
[2005년] 2005 APEC 정상회의 공식 개막 2005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아펙) 모임의 절정인 정상회의가 18~19일 이틀 동안 부산 벡스코(부산전시컨벤션센터)와 아펙 하우스인 누리마루에서 열린다. 아펙 정상회의에는 의장국인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21개 회원국 정상 및 대표자가 참석한다. 첫날의 1차 정상회의는 ‘무역자유화의 진전’이라는 의제로, 합동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의제(DDA) 지원 등을 논의한다. 19일 누리마루에서 열리는 2차 정상회의에선 ‘안전하고 투명한 아태지역’을 의제로 다룬다. 부산 아펙 정상회의는 이날 정상 선언문과 의장인 노 대통령의 공식 기자회견으로 이번 회의의 성과와 의의를 정리한 뒤 폐막한다. 한편, ‘아펙 반대, 부시 반대 국민행동’과 부산시민행동은 18일 오후 4시 부산 수영강변도로에서 10만명 규모의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한겨레
[1988년] 광주특위 청문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광주특위 청문회가 1988년 11월 18일부터 열렸다. 광주특위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으로 1988년 7월 13일 구성된 바 있다. 청문회에서는 5.17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일부 정치 군인들에 의한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취해졌을 가능성이 드러났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조작여부, 광주사태에서의 미국의 역할, 공수부대의 지휘책임 등이 중점적으로 추궁됐다. 핵심적인 발포문제는 피해자측과 계엄군측 증인들 간에 주장이 엇갈려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이 실제로 있었고 이것이 사태악화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
[1952년]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Proust, Marcel, 1871~1922) 사망
파리 근처 오퇴유 출생. 20세기 전반의 소설 중 질·양에 있어서 모두 최고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의 작자이다. 아버지 아드리언 프루스트 박사는 보스 지방 출신인 위생학의 대가로 파리대학교 교수였으며, 어머니 잔은 알자스 출신의 유대계 부르주아지 집안 규수였다. 섬세한 신경과 풍부한 교양을 갖추어 모자간의 마음의 교류는 프루스트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된다. 아버지의 고향 이리에, 할머니와 피서 갔던 노르망디의 해변, 파리의 샹젤리제가 유소년기의 작가가 경험을 쌓은 장소들로 모두가 후에 소설로 옮겨져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9세 때부터 천식(喘息)에 걸렸는데, 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숙환이 되었다. 또 어떤 시기부터 자각하게 된 동성애의 습벽이 그의 인생에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리의 콩도르세중학으로 진학하여 상류사회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동인지 《향연(饗宴)》을 발행하였다. 또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면서 카이야베 부인, 스트로스 부인 등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이 작가로서의 인간관찰의 안목을 길러 주었다. 《향연》 시대의 문장은 A.프랑스의 서문을 얻어 《즐거움과 그 나날》(1896)에 종합되었는데, 동료들간에서도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병약무위(病弱無爲)하게만 보였던 프루스트가 일관하여 문학적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발굴된 방대한 미발표 원고에 의해 밝혀졌다. 《장 상퇴유》는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었는데, 1896∼1900년에 걸친 작품으로 추정되며, 또 《생트 뵈브에 거역해서》는 1908∼1910년경의 습작인데,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대성될 일관된 노력이 남긴 행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 《스왕가(家) 쪽으로 Du Co te de chez Swann》는 1911년경에 대체로 완성을 보았으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여 1913년이 되어 가까스로 자비출판되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l'Ombre des jeunes filles enfleurs》가 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이것은 이듬해에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루스트는 비로소 연래의 꿈이었던 문학적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죽음의 예감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성을 위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일생과 바꿀 대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모두 맛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작품 외에 2권의 문집, 10여 권의 서간집과 미발표 원고가 있다. /naver
[1928년] 미키 마우스의 ‘증기선 윌리’ 개봉
20세기 만화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이끌어온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곳은 기차 속이었다. 1928년 아내 릴리와 함께 기차여행 중이었던 월트 디즈니는 문득 창고 속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던 시절, 그가 주는 빵부스러기를 받아먹어 친구처럼 지내던 쥐 ‘몰티마’를 떠올렸다. 몰티마의 모습에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채플린의 이미지를 덧씌우면 어떨까. 디즈니는 쥐의 이름을 ‘몰티마 마우스’로 지었다. 그러나 아내는 몰티마 대신 ‘미키’를 제안했고 그 순간 ‘미키 마우스’는 20세기 최고의 스타 자리를 예약했다. 그림은 동료 만화가 어브 아이워크가 형상화했다. 눈이 왕방울만하고 손에 장갑을 끼지 않은 미키 마우스는 먼저 단편영화 ‘미친 비행기’와 ‘갤러핀 가우초’에 등장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한 해 전 성공을 거둔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를 떠올린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에게 제 목소리를 찾아 주기로 하고 자신이 직접 미키의 목소리를 맡았다. 1928년 11월 18일,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최초의 유성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가 뉴욕 콜로니 극장에서 개봉됐다.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몰아닥친 세계대공황에도 미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파산 직전에 있던 한 회사는 미키를 그려넣은 시계를 2년간 250만개나 팔아 디즈니에게 사례금을 지급했다. 캐릭터가 돈이 된다는 최초의 사례였다. /조선
[1626년] 로마, 성베드로대성당[San Pietro Basilica] 봉헌
가톨릭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그리스도교 세계최대의 성당. 바티칸시국(市國)에 있다. 옛 성당 건물은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지은 것인데, 이것이 황폐해지자 교황 니콜라오 5세(재위 1447∼55)가 B. 로셀리노에게 개축을 명령하였다. 1452년 로셀리노는 우선 제실(祭室)의 증개축(增改築)에 착수하였지만 1455년 교황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뒤 약 50년이 지나서 다시 시작하려하자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3)가 옛 성당을 모두 부수고 새 성당을 짓기로 하여, 당시 건축가들의 여러 제안 중에서 D. 브라만테의 안을 받아들여 1506년 공사를 시작하였다. 브라만테의 구상은 그리스십자형 평면설계에 로마의 판테온을 보고 착상한 돔을 얹으며, 주주(周柱)를 두르고 정탑(頂塔)을 그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514년 중앙돔을 받칠 네 기둥을 세우는 중에 죽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S. 라파엘로는 G. 상갈로와 F. 조콘도의 도움을 받아 브라만테의 고안은 전례(典禮)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라틴십자형으로 고쳐서 공사를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1520년 라파엘로도 죽자 상갈로의 조카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공사를 이어받았는데, 그 동안 교회의 재정적 압박과 유명한 <로마의 약탈>로 인해 공사가 진전되지 못했다. 1546년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는 독자적 구상을 가지고 공사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을 넘었다. 그는 다시 라틴십자형에서 그리스십자형으로 바꾸고 돔을 지탱하는 원통형부분의 외관효과를 강조하고, 성당 안의 앱스와 예배실의 설계를 바꾸었다. 지금 볼 수 있는 건축적 특징의 많은 부분이 그의 구상에 의한 것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그가 남긴 목재의 모형을 보고 G. 포르타가 돔을 완성하였다. 그 후 17세기에 파울로 5세(재위 1605∼21)의 뜻을 받아 C. 마데르노가 신랑(身廊)을 서쪽 전방으로 연장하고, 나르텍스[前廊(전랑)]를 만들어 라틴십자형 방식으로 고쳐 1614년에는 웅대하고 화려한 정면(파사드)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사를 시작한 뒤 120년이 지난 1626년 11월 18일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새 성당의 헌당식이 이루어졌다. 이 날은 기이하게도 옛 성당이 헌당되고 나서 130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공사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1656∼1667년 G.L. 베르니니가 커다란 주랑(柱廊)을 둘러싼 성당 앞광장을 정비하고 이 주랑에서 교황청으로 통하는 계단인 스칼라레지아를 1666년에 완성하였다. 동서로는 186.36m, 남북으로 137.5m이고 돔의 높이 132.5m, 지름 42m의 규모인 이 거대한 성당에는 르네상스 및 바로크 조각이 많이 있다. A. 캄비오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성 베드로상》, 미켈란젤로 초기의 《피에타》, A. 카노바의 《클레멘스 8세의 묘비》, 베르니니의 《성 베드로주교좌》와 《우르바노 8세의 묘비》 등이 유명하다. 특히 돔 바로 아래, 즉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베르니니가 세운 청동상 《대천개(大天蓋)》는 세계 최대의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yahoo
[1952년] 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사망
1905. 6. 3 평북 정주~1952. 11. 18 서울. 호는 일사(一蓑). 1926년 3월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구마모토[熊本] 중학에서 수학한 뒤 1934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했다. 동(同)대학 대학원에 입학해서 1938년 9월까지 국어학을 연구했는데, 이 기간중 1936년 11월부터 1938년 7월까지는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했고 1938년 8월부터는 조선일보사 안에 있는 조광사에서 향토문화연구소 일을 맡아 1943년까지 계속했다. 1940년 9월에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을 창설해 해방될 때까지 민족문화연구에 주력했으며, 해방된 1945년 10월에는 새로 출발한 경성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 10월 국립 서울대학교 창립과 동시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6·25전쟁중이던 1950년 10월에는 수복과 더불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관리책임자로 취임해 학원의 재건에 힘썼고, 1951년 12월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1952년 11월 18일 화농성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조선어학회 도서부 간사(3대), 한글학회 이사, 진단학회 위원, 서지학회 회장, 우리어문학회 위원, 한국산악회 학술조사 위원, 조선일보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48년에 나온 〈훈민정음통사 訓民正音通史〉를 비롯한 국어학사 관계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이전의 향가·이두 등의 자료까지 다루고 있으며,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그 기원·명칭·발달을 논의하고 훈민정음 이본(吏本)에 대한 고증을 하는 등 훈민정음의 모든 부분을 포괄해 연구했다. 국어사 관계자료의 정리와 해석에 있어서의 업적은 〈계림유사 鷄林類事〉·〈훈몽자회 訓蒙字會〉에 대한 연구와 〈고어재료사전 古語材料辭典〉의 편찬이다. 〈훈몽자회고(考)〉·〈계림유사연구〉는 각각 〈동방학지〉 1권과 2권에 실린 유고인데, 〈훈몽자회고〉는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훈몽자회〉 저작의 경로 및 내용을 밝히고 최초로 저자에 대한 고증을 했으며, 판본의 비교 검토를 통해 최고본을 밝혀내는 성과를 보인 논문이다. 〈계림유사연구〉는 〈계림유사〉의 판본에 대한 서지학적 해제(解題)와 더불어 고대국어연구의 전제조건으로 한자음·고어·방언의 지식을 강조하고 그에 의거한 주해를 보인 것으로 방법론적인 면에서나 실제자료의 해석에 있어서나 오늘날에도 이 방면의 연구에 많은 암시를 주는 업적이다. 〈고어재료사전〉은 15세기 이후의 한글 문헌에 나오는 고어를 망라하여 정리한 것으로 각 항목의 용례에 성조(聲調)를 표시했는데, 이것은 국어사 연구에 있어서 성조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사실로 그의 안목과 성실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많은 국어사 자료들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던 시기에 국어사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고, 그의 저작의 많은 양을 차지하는 해제작업은 오늘날에도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1977년] 전 외무장관 최덕신 미국에 망명 최덕신(崔德新, 1914년 9월 17일 ~ 1989년 11월 16일 북조선)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김일성이 다니던 만주의 화성의숙 교장이었던 최동오의 아들이다.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군에서 근무하던 최덕신은 1946년 귀국하여 그해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 제3기특별반을 졸업하고, 1949년 미국 포트 릴리(영어: Fort Riley) 육군종합학교를 졸업(초등군사반), 1950년 미국 포트 베닝(영어: Fort Benning) 보병학교를 졸업(고등군사반)하였다. 그 뒤 국군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여 5.16 직후 외무부 장관, 주 서독 대사, 통일원 고문, 주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1972년) 등을 지내가다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이후 북조선에서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청우당 당수 외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의 여러 직위를 맡았으며, 조국통일상도 수상했다. 2007년 현재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북조선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 중 첫 부분인 1부부터 3부까지가 최덕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밖에 2004년 1300만년전 유인원 화석 일명 인류진화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스페인서 발굴 2004년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고향 아칸소주 리틀록에 ‘대통령 도서관’ 개관 2002년 한국기자협회 주최 제1회 재외동포기자대회 개막 1997년 우수 DB 대상 신설 1994년 한국-짐바브웨 국교 수립 1993년 駐호치민 한국총영사관 개설 1992년 유명우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다시 획득 1992년 한국-크로아티아 국교 수립 1992년 한국-슬로베니아 국교 수립 1991년 전 체코대통령 구스타프 후사크 사망 1987년 전국우표전시회 개최 1987년 일본 소니사, 미국의 CBS레코드사 인수 1982년 한국형 해군경비함 첫 진수 1978년 남미 가이아나서 사이비종교단체 `인민사원(People`s Temple)` 집단자살, 914명 사망 1976년 문양자, 종별사격대회서 스탠다드권총부문 세계신기록 수립 197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1970년 서독, 폴란드 국교정상화 가조인 1967년 영국, 파운드화 평가절하. 세계적 통화위기 촉발 1961년 문교부, 사립대 정비 일환으로 전국 12개교 폐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증수회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정 1958년 국가보안법 신안 국회에 제출-보안법파동의 시작 1957년 상용한자 1300자 채택 1957년 북한적십자사, 납북인사 337명의 명단 통고 1957년 캄보디아 영세중립국 선언 1955년 소련수뇌 일행, 인도 방문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1952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 작고 1951년 여객선 남해호 진도앞바다서 침몰. 70명 사망 1943년 일본의 자연주의 소설가 도쿠다 슈세이 사망 1936년 독일-이탈리아, 스페인의 프랑코정권 승인 1934년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스파리 사망 - `교회법전`을 편찬 1903년 미국-파나마, 파나마운하 조약체결. 건설-운영-관리-보호에 대한 모든 권리를 획득 1901년 미국의 여론조사통계가 조지 갤럽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