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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마지막 주일)
십자가, 그 깊이와 높이
사50:4~9상; 시31:9~16; 빌2:5~11; 눅23:44~56
저는 요즘 뉴스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양의 소식을 몇 꼭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조민 양이 고려대 의전원 입학이 취소되었고, 또 고려대 학부 입학도 취소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복지부에서는 의사면허도 취소절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목만 잠깐 본 뉴스에서는 고등학교 입학까지 취소될지 모른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학력이 지금은 고졸이 되었지만, 이제 중졸로 끝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조민 양 어머니는 이미 고등학생 표창장 위조로 4년 실형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정치적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문제가 첨예하게 정치적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저의 입장은 아무래도 한 쪽의 입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의 마음은 그 젊은이의 마음이 어떨까 하는데 가 있습니다. 서로 정적이 되어 싸웠던 정치가 본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30을 갓 넘긴 젊은이가 고졸 아니면 중졸로 강등되어 버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그래도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산 삶일 텐데, 그런 자신의 과거가 몽땅 부정당하고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 아픔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로써 그 젊은이의 마음이 자꾸 마음에 밟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시라도 너무 힘들어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정치는 참 비정하다 못해 냉혹합니다. 어쩌면 정글의 논리가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 곳이 정치입니다. 정말 총만 안 들었지 전쟁입니다. 논두렁 시계 사건처럼, 정권 말년에 모욕을 주는 일은 이번에도 또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적들에게 받는 모욕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만, 같이 한 길을 가던 동지였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받는 모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안겨 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보여졌으면 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이랬으면 하는데로 나아가고 이렇게 되어야만 해, 라는 이미지로 굳어집니다. 그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때, 그것도 냉혹한 검찰과 하이에나 같은 언론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진다고 생각될 때, 그 수치감과 모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은 한 주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일련의 코드가 그대로 나옵니다. 예수님을 치사할 만큼 냉혹하게 고발하던 검찰들(율법학자들과 제사장 그룹들), 그저 자기들 유리한대로 부초처럼 흔들리던 여론, 고스란히 드러나는 배신, 그리고 모욕과 수치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날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팔레스틴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 본문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시는 장면만 읽었습니다만, 사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참여하시는 22장 14절 이하의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그 이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 잡히시고 밤새도록 헤롯궁과 빌라도 법정, 그리고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모독과 재판을 받다가 다음날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장면까지, 23장 마지막 절까지가 오늘 복음서의 본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을 대충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그 사이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뇌에 차서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하시던 겟세마니의 기도,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 가장 믿었던 제자 베드로의 배신, 그 이후 이어지는 모욕. 누가복음은 이 모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때리면서 모욕하였다. 또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면서 말하였다.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그들은 그 밖에도 온갖 말로 모욕을 하면서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눅22:63~65)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 감성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욕과 수치는 십자가가 주는 매우 중요한 코드입니다. 동시에 모욕과 수치는 우리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는 아주 중요한 코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듯, 우리의 깊은 곳에 있는 상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이 사건은 우리에게 거절당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모욕과 수치심, 낮은 자기 가치감과 죄책감, 압도되고 함정에 빠진 느낌, 불안과 우울, 절망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어린이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진정한 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 대신,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의 나를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로서의 나, “마땅히 그래서는 안되는 존재”로서의 나는, 진짜 우리의 생생한 내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내가 아닙니다. 이런 나는 내가 만든 “사물”이며 일종의 “작은 우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마땅히 결함이 있어서는 안되고, 마땅히 사랑받지 못하면 안 되고, 마땅히 가치 없고 쓸모없으면 안 된다는 깊은 원망(바램)이 있습니다. 동시에 마땅히 완벽해야 하고, 마땅히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땅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땅히 유능해야 하며 언제나 안전해야 하고 언제나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깊은 원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혹은 “마땅히 그래서는 안되는” 이 의식적 무의식적 당위가 우리의 진정한 삶을 얼마나 축소하고 사물화해 버리는지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 당위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거의 신이 되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작은 우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욕과 수치는 그 작은 우상, 신이 되려는 우리의 당위를 짓밟는 치명적인 상처입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두었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치명적인 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모욕과 수치를 가차 없이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오래전에 이 모욕과 수치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500여년 앞선 구약의 제2이사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일명 “고난의 종의 노래”에 그 구절이 나옵니다만, 이 구절 외에도 이사야 이곳 저곳에 이 고난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야는 모욕과 수치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내는 한 인물을 그리고 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자신이라는 사람도 있고, 포로 생활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든 여기에 나오는 “나”는 모욕과 수치를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고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고난의 종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자신을 의롭다고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니, 모든 모욕과 고난을 마음 상하지 않고 견디어 내겠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 되면 대단한 경지에 까지 올라간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말없이 수용할 만큼 우리 내면이 정화되고 초연함에 이른 사람들인가요? 누군가가 이 구절을 빗대어서 당신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욕과 고난이 왔을 때 적극적으로 감당하시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크게 반항 하던가, 아니면 자신을 심하게 억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복음사가들은 이 고난의 종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고난의 종이 되어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며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다 감당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고난의 종이나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오는 모욕과 수치를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우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상처들, 다시 말하면 거절당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낮은 자기 가치감과 죄책감, 압도되고 함정에 빠진 느낌, 불안과 우울, 절망 이 모든 것들을 대책 없이 다 불러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여러 사건과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크고 작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모욕과 수치를 받게 되고, 그것들은 우리 속에 있는 더 깊은 상처들을 불러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본문,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서 여러 군상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채찍으로 때리며 골고다로 끌고 가는 로마 병정들,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 그 뒤를 구경삼아 쫒아가는 많은 군중들, 그 중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들(그 고통스런 와중에도 예수님은 이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말씀하시지요.), 또한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해 보라지” 비웃고 있는 백성의 지도자들도 있고, 예수님 양 편에서 십자가를 지게 된 두 죄수들도 있습니다(그 중 한 사람은 “너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조롱했고, 또 한 사람은 “주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청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고백하는 로마 백부장 (여기서 본다는 뜻의 헬라어 <호라오>는 단순히 본다는 의미를 넘어 관찰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체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까지 쫓아가 그 시신이 어떻게 안장되었는지 살피고 부활을 준비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도 있습니다.(여기서 살핀다는 뜻의 헬라어, <쎄아오마이>는 찾아본다, 육안으로 보지만 초자연적인 것을 본다, 안다, 깨닫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이겠지요. 어떤 이들은, 십자가의 겉 표면만 보고 오늘 세 명의 똑같은 죄인이 처형을 당했어, 말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십자가의 깊이로 내려감으로써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깊이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높이가 높아질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내려갔을 때/깊어졌을 때, 지극히 높고 뛰어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분명 모욕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소외와 버림받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낮은 자기 가치감과 죄책감, 압도되고 함정에 빠진 느낌, 불안과 우울, 절망 이 모든 것의 상징입니다.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의 총합입니다. 우선 오늘 모욕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의 “마땅히 그래야 하는”, 또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나”를 의식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시어,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혹은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런 십자가의 깊이로 깊이깊이 내려갈 때,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주보 테오리아에 있는 글을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이 되시어, 제가 신들처럼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존재가 되시어, 제가 무한하고 대단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시어, 제가 불사의 존재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열등한 존재가 되시어, 제가 우수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약한 존재이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불완전한 존재가 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완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찬성을 받지 못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찬성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틀리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옳을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실패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성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되시어, 제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되려고 저와 다른 이들을 들볶을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당신께서 제가 제 자신에 대해 경멸하는 모든 것이 되시어, 제가 당신 안에서 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제가 자유로울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깊이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래서 부활의 높이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