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자 경1 (S12:61)
Assutavā-sutta
1. <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서 >
3.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도(*1)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벗어나려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는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활기찰 때도 있고 의기소침할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내려놓을 때도 (*2)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도 여기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벗어나려하는 것이다.”
4. “비구들이여,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라고도(*3) 부르는 이것에 대해서
염오할 수 없고 탐욕이 빛바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4)라고 움켜쥐고
내 것으로 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5)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여기에 대해서 염오할 수 없고 탐욕이 빛바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5.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차라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자아라고 할지언정
마음을 자아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일 년도 머물고 2년도 머물고 3년도 머물고 4년도 머물고 5년도 머물고 10년도 머물고
20년도 머물고 30년도 머물고 40년도 머물고 50년도 머물고 100년도 머물고 그 이상도 머문다.(*6)
그러나 마음이라고도 마노라고도 알음알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기 때문이다. (*7)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숲에서 돌아다니면서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는 놓아버리고 다른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8)
그와 같이 마음이라고도 마노라고도 알음알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
6. “비구들이여, 이 경우에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잘 마음에 잡도리한다. (*9)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7.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 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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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지 못한(assutava)’이란 무더기(蘊), 요소(界), 감각장소(處), 조건의 형태(緣),
마음챙김의 확립 등에 대한 파악(uggaha)과 질문(paripucchā)과 판별(vinicchaya)이 없는 것이다.
‘범부(puthu-jjana)’라고 하였다. 많고(puthu) 다양한 오염원(kilesa) 등을 산출(janana)하는 등의
형태에 의해 범부라 불린다.
그리고 성스러운 법을 등지고 저열한 법에 빠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포함되기 때문에 범부라고도 불린다.
혹은 [범(凡)으로 옮긴] puthu란 분리된 것(vusuṃ)을 뜻한다.
계행과 배움 등의 공덕을 갖춘 성자들로부터 분리된 사람(jana)이라고 해서
범부(puthujjana)라고 한다.(SA.ⅱ.97~98)
(*2) "'활기참(ācaya)'이란 향상(uḍḍhi)을, '의기소침함(apacaya)'이란 퇴보(parihāni)를,
'받음(ādāna)’이란 태어남(nibbatti)을, ‘내려놓음(nikkhepana)’이란 부서짐(bheda)을 말한다."(SA.ⅱ.98)
(*3)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라고도’는
심, 의, 식이 동의어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⓵ 먼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는 眼·耳·鼻·舌·身·意의 감각기능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쓰이고 있으며,
아울러 한 생과 다음 생을 통해서 개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의식의 잠재적인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⓶ 마노[意,mano]는 몸(kāya)과 말(vaci)과 더불어 의도적 행위를 하는 세 번째 문으로 나타나며 (의행, 업행),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入處, ajjhattika āyatana] 혹은 감각기능[根, indriya] 가운데 마지막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마노의 감각장소는 다른 다섯 감각장소가 받아들인 대상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역할도 하지만,
정신적인 현상(dhamma)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지는 특수한 감각장소 혹은 감각기능이다.
⓷ 마음[心, citta]은 개인적인 경험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생각이나 의도나 감정의 주관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훈련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해탈해야 하는 것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4) “‘이것은 내 것이다(etaṃ mama)’라는 것은 갈애에 의한 거머쥠이다. 108가지 갈애가 있다.
‘이것은 나다(esohamasmi)’라는 것은 자만에 의한 거머쥠(Māna-gāha)이다. 9가지 자만이 있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eso me atta)'라는 것은 견해(diṭṭhi)에 의한 거머쥠이다. 62가지 견해가 있다.
(*5) “‘움켜쥔’이란 갈애 때문에 집어삼켜 받아들인 것이다.
‘내 것으로 삼고’란 갈애 때문에 이것은 내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집착한’이란 견해(diṭṭhi) 때문에 집착하여 받아들인 것이다.”(SA.ⅱ.98)
(*6) “[문] : 세존께서는 왜 이것을 말씀하셨는가?
삶의 첫 단계에서 생긴 몸은 중간 단계까지 지속하지 못하고 중간 단계에 생긴 몸은 …
삶의 마지막 단계까지 지속하지 못하지 않는가?
마치달구어진 철판에 던져진 참깨처럼 형성된 것들은 매 지점이나 매 단계나 매 구간마다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그러나 몸은 연속적인 차례에 있어서 긴 시간동안 지속한다.
그것은 마치 등불이 밤새 연속적으로 연결되어서 타는 것과 같다.
물론 등불의 불꽃은 연료가 다하면 다음의 심지로 건너가지 않고 거기서 꺼지지만.”(SA.ⅱ.99)
(*7)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는 것은
낮 동안에 생기고 소멸한 마음은 밤 동안에 생기고 소멸한 마음과 다르다는 뜻이다.
(*8) “원숭이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밀림의 숲은 대상이라는 숲(ārammaṇa-vana)이다.
그 숲에 돌아다니는 원숭이처럼 마음은 대상이라는 숲을 통해서 생겨난다.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잡는 것처럼 [마음은]대상을 취한다.
어떤 때는 형색이라는 대상을 거머쥐고 일어나고, 어떤 때는 소리 등의 다른 대상을,
어떤 때는 과거의 대상을, 어떤 때는 미래의 대상을,
어떤 때는 안의 대상을, 어떤 때는 밖의 대상을 거머쥐고 일어난다.
그와 같이 대상이라는 숲에서 돌아다니는 마음도 의지할 대상을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하나의 대상을 거머쥐고 생겨난다고 알아야 한다.”(SA.ⅱ.100)
여기서 유념할 점은 마음은 매순간 항상 다른 대상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주석서들은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 등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
(*9) 주석서에 의하면 본 경을 설한 순서는 이러하다.
세존께서는 이 비구들이 물질(rūpa)에 대해서 지나치게 붙들려 있었을 때에는
먼저 이들이 물질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정신(arūpa)에 확고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런 뒤에 다시 정신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물질에 확고하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 여기서 세존께서는 이제 비구들이 물질과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ⅱ.101)
(*10)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랜다(nibbindaṃ virajjati)’는 것은 도(magga)를,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virāgā vimuccati)’는 것은 과(phala)를,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는 등은 반조(paccavekkhaṇa)를 설하신 것이다.”(SA.ⅱ.101)
각묵스님옮김 『상윳따니까야』 제2권 290-295쪽
첫댓글 배우지 못한 자 경1 (S12:61)은 ... 非색인 심의식과 ...色인 물질... 을 언급하시네요...
여기서... 非색이 색을 직접 경험할 수 없으므로 ... 비색인 심이 색을 인지하려면 ...
즉 마음이 대상을 인지하는데는...
非색과 색... 그 둘 사이에서 마음작용인 심소(촉수상사)... 라는 중개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非색인 심의식이 대상인 색을 알게 됩니다.
심과 대상사이에서 이 둘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법,... 심소법은 심과 색을 연결한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은 대상이었던 色을 아는 것이 아니라 ....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난 정신작용인 法을 대경으로 하여 아는 것이지요...
concept-reality (위오기교수님 글 참조^^)
이런 [비색-심소-색]의 구조에서 ...
비색과 색...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난 법(심소 : 촉수상사작의)은...
분명 非색은 아니고... 그렇다고 색도 아니고...
다만 無색! ~~ 입니다... 아닌가요?
결국 존재(有=bhava)는 매순간 다른 ... 새로운 ...
[非색(심의식) - 無색 (법) - 색]으로 구조화되었다고 ~~ 보면 어떤가요?
@해맑은 //이런 [비색-심소-색]의 구조에서 ...
둘 사이에서 일어난 法(촉수상사작의)은... 분명 非색은 아니고...
다만 無색! ~~ 인 것 아닌가요?//
심의식은 비색인데, 촉작의수상사는 무색이다 라는게 과연 어떤 차이를 염두에 두신 것인가요? 촉 등은 색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색의 영향이 쬐~~금 있다는 취지이신지?^^
@이크벨 네~^^ 이크벨님... 맞습니다.
무색(촉수상사)은 색을 緣으로 일어납니다.
색에 따라 각각 다른 새로운 무색이 일어납니다.
오~~~~그러네요....뭔가 경안이 열리는 기분입니다. ^^ [非색(심의식) - 無색 (법) - 색] 의 배합(?) 정도에 따라 욕계 색계 무색계 존재가 나누어지는 듯 합니다.
'삼계'를 '법계'라고 한 맥락이 여기에 있는 거 같습니다.....
'非색'인 <심의식>의 한계는 '명색'까지 입니다.
'색'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런데도 ..... 우리가 ........ 짜장면[=명색]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 말하자면 물질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색[=지수화풍의 四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 가능하게된 <'색'의 섭취>를 근거로 ........ 볼펜, 짜장면, 길가의 돌맹이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라고 우기는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가 ........... 無色이라고 우기는 것이 ...... 사실은 '名'이고 ......... 色이라고 우기는 것이 사실은 '名色'이라는 지적.
@아위자 따라서...........
욕계----물질식.
색계----촉식.
무색계----의사식.
3계 공통----識食.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위자 결론적으로........
3界는 識住處. 거기에서 2處는 <무색계와 색계>이고....... 색계 내부에 '욕계'가 있음.
연기된 것인 '身'을 근거로............ '色'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임.
'身'은 身行[=사대와의 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
결국은.......... '行'을 파악하지 못하면[=아빈냐를 얻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불가능한 것임.
@아위자 억울하지만 ......... 어쩔수 없음.
界[=3界, 18界 등등]를 조건으로 '見'이 생겨날 때.......... '邪見'이 생겨나면..... 극단을 추구하게 되고......... 그로인해............ <외입처 계열의 '觸'>이 연기되어 ........... 악화되면 <물질식>을 하게 되는 것임.
界[=3界, 18界 등등]를 조건으로 '見'이 생겨날 때.......... '正見'이 생겨나면..... 中을 추구하게 되고......... 그로인해............ <외입처 계열의 '觸'>이 연기되더라도........ 識을 포함한 삼사화합을 간파하여.........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를 피함.
@아위자 名과 色을 조건으로 한 <觸>!
名色을 조건으로 한 <觸>!
<식>을 조건으로 한 '명색'이며, 그 '명색'을 조건으로 한 <식>이라는 호연연기는.......... 다람쥐 채바퀴 돌리는 '윤회'.
@아위자
“비구들이여, 이 경우에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잘 마음에 잡도리한다.
@아위자 그 <연기>를 내용으로 하는 <'사성제'라는 '앎'>.
@아위자 지집멸도(법주지)--------고집멸도(열반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본론의 글 중에서...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 라는 번역은 하기 원전을 근거로 보면...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일 것 같습니다. Imasmim sati idam hoti; imasmim asati idam na hoti [Majjhima viii,9 <M.ii,3>]
인용하신 경문이 '심의식'과 사대로 이루어진 '까야'를 서로 대비시키고 있지만, 이 경을 심과 색 사이의 인식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 원숭이가 숲에서 돌아다니면서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는 놓아버리고
다른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원숭이는 심(의식) = 非색
나뭇가지는 색 = 색
잡았다 = 인식이 일어남(=촉수상사. 無색의 集)
놓아버리고 = 그 인식이 사라짐(=촉수상사. 無색의 滅)
그런데... 왜 ... 원숭이는 이 나뭇가지... 저 나뭇가지를 ... 잡을까요?.... 왜?
@해맑은 나뭇가지가 '법' 이라는 말씀이지요?^^
@이크벨 아니요... 나뭇가지는 색 = 색!... 단지 대상입니다.
나뭇가지를 <잡는 것>이 법... 잡을 때 촉수상사가 일어남...
잡는 행위는 색에 대한 마음작용으로 無색!
오온 중에 수상행식은 무색이지만...
색이 없는데도 수상행식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있을까요?
색에 대한 수상행식이 오온입니다.
@해맑은 나뭇가지는 색 = 색!... 단지 대상입니다. 나뭇가지를 <잡는 것>이 법... 잡을 때 촉수상사가 일어남... 잡는 행위는 색에 대한 마음작용으로 無색! 오온 중에 수상행식은 무색이지만... 색이 없는데도 수상행식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있을까요? 색에 대한 수상행식이 오온입니다.//
감사합니다. 중요한 말씀인거 같습니다.
//나뭇가지를 <잡는 것>이 법...//
//색에 대한 수상행식이 오온입니다.//
비색은 심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비색과 심 사이에 뭔가를 설정하는 게 필요하고 그게 '법'이다 라고 하시는데, 경의 어느 부분을 보시고 그런 깊은 결론에 이르신 건지 저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경을 반복하여 읽으면 ... 어느새 그 장면들이 동영상으로 떠오르고....
원숭이와 나무가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마음작용>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만... ^^
이크벨님에게 높은 지위를 제안하는 상사의 말을 귀를 통해서 들었을 때 ...ㅋㅋㅋ ...
드러나지 않는 < 마음작용들>이 느껴지지 않을까요?
또 '비색은 색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명제 중 직접 경험한다는 말은 오감을 통한 경험을 말씀하시는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짜장면을 경험하는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몸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고, 심의식 측면에서 짜장면은 명색으로만 경험될 뿐이다...이 말씀이신지요?
//또 '비색은 색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명제 중
직접 경험한다는 말은 오감을 통한 경험을 말씀하시는건지요? //
이크벨님... 말 그대로...
<중개인 없이 非색이 색을 알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눈(감성물질)이 형상을 경험하지... 심의식이 직접 형상과 부딪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의식이 직접 부딪히는 것은 법이라는 스크린에 나타난
名色(촉수상사의 옷을 입고 나타난 색)입니다.
심의식은 색이 아니라 名색을 직접 경험할 뿐입니다.
이 名이 개념(빤냣따)입니다. 개념화된 색=명색을 경험!..
@해맑은 그런데도 착각을 하지요...
내가 직접 색을 경험했다고요... .
중간에 있는 名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것이 인식의 오류... 치(moha)의 그물에 걸려든 것...ㅋㅋㅋ
치(moha)의 그물에서 벗어나신 분이 아라한?
치의 소멸은 곧 탐진의 소멸이고..
치의 소멸 = 곧, 빤냐 = 무명에 대한 탐을 소멸 = 심과 대상 사이에 明이 환하게 비추고 있음.....
@해맑은 감사합니다.
심의식이 직접 부딪히는 것은 법이라는 스크린에 나타난 名色(촉수상사의 옷을 입고 나타난 색)입니다. 심의식은 색이 아니라 名색을 직접 경험할 뿐입니다.//
심의식은 색이 아니라 명색과 부딪칠 뿐, 이 명색이 법.....
심의식을 비색, 심의식과 색 사이의 법을 무색으로 하셨는데....
非색'과 '無색'은 어떤 차이인가요? 늬앙스는 다르게 느껴지는데 선뜻 그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크벨님께서 ... 저절로 알아질 때까지 숙고를 계속 하시면서...
어느 순간 <아! 그렇구나!> 하고 ...
非색'과 '無색'은 차이가 분명해지시길 바랍니다.
非와 無의 차이! ...ㅋㅋㅋ 철학적 질문이 되어버렸네요...
저는 아닌 것(非)은 다른 것이고...
없는 것(無)은 있는 것의 상대개념으로 ...봅니다.
글고, 심의식을 색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인식의 대상으로서 '법'개념을 상정하는데, 그렇다면 그 법 개념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평소 아위자 선생님께서는 내입처, 외입처를 말씀하시면서 법은 외입처인데 법이 정신적 개념이라면, 정신이 밖에 있다가 마노의 대상이 되는 게 말이 되느냐고....역정을 내신 걸 기억합니다. ^^
//글고, 심의식을 색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인식의 대상으로서 '법'개념을 상정하는데,
그렇다면 그 법 개념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 이크벨님...
네~^^ 그렇지요...
非색과 色 사이에 들어있는 無색(法)이 정신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언뜻보면 그렇게 느껴집니다만... ^^
여기서 無색의 無는 100% 없다는 절대적인 無라기 보다...
心의 대상인 色(100%)에 비하여 상대적인 無라는 말입니다.
@해맑은 즉 無色은 밖에 있는 色이 심의식과의 관계에서 名色으로 변신하여
非색과 색의 가운데인 法의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法은 어떻든간에 色과 연결된 無色이라는 말입니다.
오온 중에 수상행은 분명 무색인데 수상행이 색이 없는데 일어날까요?
그런데도 혹자가 심의식의 대경인 법을 100%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名색(=법)을 생기게 한 뿌리인 色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法은 名색이면서 無색인데...
법(=명색)을 절대적인 무색(100%정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100% 정신적인 것은 非색입니다.
가운데 있는 法은 非색의 대경으로 색과 연결된 無색입니다.
삼계도 법이라면....
(계,처,연기는 법 개념이니까)
'색계'의 모습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색'이 아니고, '무색계'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색' 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ㅋㅋㅋ <우리가 생각하는 > 것은 ... ㅋㅋㅋ
항상 인식의 오류(癡)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
어느 경우에나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관점을 가질 때 ...
비로소 바른 관점이 들어올 여지가 눈곱만큼이라도 생기는 것이지요...
계,처,연기를 법으로 보는 三觀은 ...
[非색-법(無색)-색] 구조에서...
가운데 법(無색)을 非색인 심의식과의 관계에서 관하는 것...
즉 세 가지 경우로 법(無색=名색)을 관하는 것이지요...
心의 입장에서 대경인 가운데 법(名色)을 界로 관하고
意의 입장에서 대경인 가운데 법(名色)을 處로 관하고
識의 입장에서 대경인 가운데 법(名色)을 緣起된 것으로 관하는 것...
이것이 삼관(三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