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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성호준
마스터스에 취재를 오면 마감을 끝내고, 그러니까 한국 시간 자정을 넘어 골프 코스 가장 남쪽 저지대인 아멘코너 쪽으로 내려가 맥주를 한두 잔 마실 때가 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는 코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데 매우 관대하다. 코스 안 여러 곳에서 술을 판다. 맥주를 사면 로고가 새겨진 플라스틱 컵을 주는데, 그게 괜찮은 기념품이 된다. 컵 모으는 재미 때문에 얼큰하게 취해 맥주 컵을 여러 개 포개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맥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친구에게 마스터스 맥주 컵을 챙겨줄 수 있다. 기자실에서는 맥주를 원하는 대로 그냥 주기 때문에 컵을 구할 수 있지만 코스에 나와 마신 맥주 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경험까지 담아줄 수 있는 진짜 마스터스 컵이다.
오거스타 잔디는 융단처럼 매끈하지만 때론 풀비린내가 난다. 그 향기까지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래의 개울이 휘도는 아멘코너 쪽에서 마신 맥주 컵엔 여기서 일어난 수많은 드라마와 그에 따른 함성과 탄식도 담을 수 있다.
오거스타 내셔널 12번 홀로 타이거 우즈, 프레드 커플스, 저스틴 토머스가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깃발 꽂힌 천국이라는 오거스타 내셔널 코스에 나와 맥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마스터스 시그니처 음식인 에그 샌드위치와 피멘트 샌드위치가 각 1.5달러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따끈한 바비큐 샌드위치와 맥주 두 잔을 추가해도 17달러면 뒤집어쓴다는 것, 감자칩에 바비큐 소스를 찍어 먹으면 한국 안주 비슷한 맛이 난다는 것, 마스터스 특수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골프장 바깥이라면 햄버거 세트 하나 가격에 둘이서도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 오거스타 내셔널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저렴하게 대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어려울 때 경기장을 찾아준 관중을 고집스럽게 패트런(후원자)이라고 부르고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식지 않는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5일 코스에서 맥주를 홀짝이다 보니 김주형이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 스코티 셰플러 같은 거물들과 동반 연습라운드를 하게 되는 걸 보게 됐다. 김주형은 최고 골프 스타들의 이너 서클에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나이키 모자를 쓰고 있는데 거대 기업이 후원 선수들을 한데 모아 끌어주고 밀어주고 있지 않나 의심도 들게 된다.
타이거 우즈. AP=연합뉴스
오거스타 내셔널은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와 더불어 골프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절룩이며 가파른 언덕을 걷는 우즈를 먼발치에서 보게 되는데, 그냥 봐도 알 수는 있지만, 맥주를 한 모금 걸치고 나면 영험한 장소의 기를 받아 감각이 증폭된다. 우즈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느끼는 통증이 땅을 통해 전달된다.
오르막보다 내리막길에서 우즈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우즈는 원한다면 진단서를 내고 카트를 타도 되겠지만, 카트를 타느니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이 사내의 고집을 보게 된다.
우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모든 관중의 3분의 1은 될 법한데,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우즈의 우직함이 그가 존경을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도 관중의 95% 이상이 백인인데 이런 스포츠에서 유색인종으로 최고 스타가 된 우즈가 대단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샷 장면만 나오는 기자실 TV가 아니라 코스에서 연습라운드를 보다 보면 우즈가 과거에 비해 수다쟁이가 된 것도 알 수 있다. 우즈는 젊은 시절 연습장에서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른 선수들과 눈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친구 프레드 커플스와 비슷해졌다.
커플스는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공을 치는 시간보다 옆 선수와 떠드는 걸 좋아했다. 우즈가 그렇게 되고 있다. 나이가 들고 풍파를 겪으면서 사람이 얼마나 더 성장하는지 알게 된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맥주. 성호준 기자
코스에 앉아 지나가는 선수들을 보면 그들이 인터뷰룸에서 한 얘기들이 떠오른다. 우즈는 “나는 악착같은 고집이 있다. 여러 번 수술을 받고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이겨내려는 열정이 있었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다”라고 했다. 그는 또 “마스터스에 올 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시간에 감사하고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고 약간 쓸쓸한 톤으로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다른 대회에서 5분 남짓 두세 개 뻔한 답만 하던 선수들이 오거스타에선 30분 가까이 어려운 질문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답한다는 거를 다시 알게 된다. 믿음 깊은 신자가 고해성사하듯 마스터스에서 선수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골프를 일종의 종교처럼 만든 마스터스 창립자와 회원들의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다 화들짝 놀랐다가 핸드폰을 기자실에 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된다. 오거스타에서는 우즈도 핸드폰을 가지고 나올 수 없다. 핸드폰이 없어 당황하다, 우리가 얼마나 기계의 노예가 됐는지 알게 된다. 핸드폰 없이 상념에 빠지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된다.
맥주잔을 절반쯤 비운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으면 이 코스를 거쳐 간 벤 호건이나 아널드 파머 같은 이의 흔적을 보게 된다. 흐릿해진 기억에 환한 불이 켜지기도 한다. 한때 오거스타에서 우승을 다투며 8번 홀 언덕길을 힘차게 오르던 최경주와 양용은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지나가고 결국 자연만 남는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2004년 마스터스에서 3위를 한 최경주. AP=연합뉴스
오거스타 내셔널 코스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는 일종의 명상의 시간이 된다. 골프장을 걷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골프가 아니라 골프를 하는 사람들의 풍경이란 걸 깨닫게 된다. 누가 언더파를 쳤고, 누가 오버파를 쳤다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의 얘기를 써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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