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약산 진달래꽃... 김소월...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경상도 버전
내 꼬라지가 비기 실타고
갈라카모
내사마 더러버서 암 말 안코
보내 주꾸마
영변에 약산
참꽃
항거석 따다 니 가는 길빠다게
뿌리 주꾸마
니 갈라카는 데 마다
나뚠 그 꼬슬
사부 자기 삐대발꼬 가뿌래이
내 꼬라지가 비기 시러
갈라 카몬
내사마 때리 직이 삔다 케도
안 울 끼다
충청도 버전
이제는 지가 역겨운 감유
가신다면유 어서 가세유
임자한테 드릴건 없구유
앞산의 벌건 진달래
뭉테기로 따다가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리지유
가시는 걸음 옮길 때마다
저는 잊으세유 미워하지는 마시구유
가슴 아프다가 말것지유 어쩌것시유
그렇게도 지가 보기가 사납던가유
섭섭혀도 어쩌것이유
지는 괜찮어유 울지 않겄시유
참말로 잘가유
지 가슴 무너지겼지만
어떡허것시유 잘 먹고
잘 살아바유
전라도 버전
나 싫다고야
다들 가부더랑께
워메~나가 속상혀서. 주딩 딱
다물고 있을랑께
거시기 약산에 참꽃
허벌라게 따다가 마리시롱
가는 질가상에 뿌려줄라니께
가불라고 흘때마다
꼼치는 그 꽃을 살살 발고
가시랑께요
나가 골빼기 시러서
간다 혼담서
주딩이 꽉 물고 밥 못 쳐묵을
때까지 안 올랑께
신경 쓰덜말고 가부더랑께
겁나게 괜찬응께 워메 ~
참말로 괜찬아부러ㅈ
뭣땀시 고로코름 허야 써것쏘이?
나가 시방 거시기가 허벌나게
거시기 허요이~~
https://youtu.be/dX8L5pPfx5k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은 일제항쟁기를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았던 민족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는 소월이며, 본관은 공주(公州)다.
국권 침탈의 시기,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 민족이 강탈 당해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고 있을때
민족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이요,
저항 시인이었다. 저서는 시집 <진달래꽃>이 유일하다.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이 깃든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겨레의 아픔을 시로 그려냈다.
이 시집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은 아사돌곳〔한반도〕 최고의 명승지요,
그곳에 핀 진달래는 전국 최고의 진달래다.
또 시어에 나오는 진달래는 님이기도 하지만 조국임이 분명하다.
마치 만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이듯이.
이는 이흥렬의 가곡 바우고개에서도 10여 년 동안
머슴살이에 왜 하필 진달래를 안고서 눈물짓겠는가?
시인의 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며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 태어났다.
바다가 있는 영주군 곽산면 남단동에서 자랐으며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혔다. 영변의 약산은 인근 고을 명산이다.
그는 민족의식이 강했던 오산학교를 다니다 3.1운동 때 만세를 주동하였다가 학교가 폐쇄되자
1923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 상과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바로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였지만 민족의식이 강해서 일본말을 잘 쓰지 않고
늘 한복을 입었다.
지금까지 소월의 얼굴은 생전의 사진이 없어 초상화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왔다.
북에서 발행하는 “문학신문”[1966년 5월10일부터 7월2일]은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2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여기에 오산학교 학생시절 사진이 실려 있다.
이를 토대로 그림으로 복원한 것도 있다.
소월이 오산학교의 3.1만세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한때 도피 생활을 했던 사실도 처음 밝히고 있다.
북에서 20년 넘게 어둠속에 묻혔던 소월의 문학이 복권된 것은 1992년.
김정일이 “주체문학론”(조선노동당출판사)을 발표하면서이다.
진보적 작품을 창작했던 신채호, 한용운, 김억, 정지용 등과 함께
직접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들의 복권을 지시했다고 한다.
93년 완간된 북한 《문학예술사전》은 김소월에 대해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
애국적 감정과 민족적 정서를 민요풍의 아름다운 형식으로 구현해
근세 시문학의 운율과 형식 발전에 기여했다’고 공식 평가했다.
이로써 소월은 드물게도 남북이 동시에 기리는 시인이었다.
1930년 무렵 일제의 탄압은 극심했고 소월의 고통도 비례하여 커졌다.
나라밖으로의 망명을 생각하고 경찰서에 연행당한 뒤 돌아와
아내에게 망명 의사를 타진하고 다음날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문학신문 기행문에는 당시 북에 살아남은
소월의 가족들(아들 준호·은호·락호와 둘째딸 구원)은
소월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증언했다.
‘소월의 부인 홍단실(洪丹實)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봉지를 발견하였다’면서
소월의 사인은 자살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월이 죽고 이틀 뒤인 1934년 12월 27일 조선일보 기자가 생가를 직접 찾았고
그의 사인을 뇌일혈로 보도했다.
사흘 뒤 동아 일보는 ‘한가히 향촌생활을 하는
소월 김정식이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24일 오전 8시에 돌연 별세하였는데
그가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 한다.’고 짧게 부고를 전했다.
또 스승인 김억(金億1896~?)이나 소설가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김광식(1921-2002) 시인의 처제 홍성화의 증언을 듣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전했다.
한편 김광식은 1953 조선일보 투고문에서 각저병에 시달렸다는 의견도 썼다.
최근 단국대 석좌교수 권영민은 김소월의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며 소월이 생전 심한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었고,
고통이 극심해질 때면 통증을 잊고자 아편을 조금씩 복용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2012.05.31]
그러나 남에서 어렵게 살아온 손녀가 증언한다.
“할아버지가 자살했다고 써놓고 아편 먹고 숨졌다는 얘기도 들려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뇌일혈 같은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솔직히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뭔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 [이상 손녀 김은숙의 증언 –월간 조선 2015년 5월호]
《문학신문》 〈소월 생가 탐방기〉에 따르면 소월의 장남 준호는 목수,
둘째 은호는 평북 경공업국총국 상급지도원,
막내 낙호는 평양 설계 연구기관 연구사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생가 사진이 전한다.
북에 후손이 살고 있고 그곳에 생가도 있었다.
태어나서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계희영이 숙부 응렬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탐방기에 따르면 오산학교 재학 시절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 항쟁에 참여하여 잡혀 가던 도중에 요행히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배재 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에 종사하면서 시 창작에 정진한 것이다.
《조선중앙일보》 12월 30일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씨의 돌연 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 12월 30일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됐다. 《조선중앙일보》 1월 22일부터 26까지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오르고, 이어 《신동아》 2월호에 소월을 추모하는
<조시(弔詩)>를 발표했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
(《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됐다.
조연현은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면서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이라고 평했다.
그 이외 여럿의 평이 있지만 대동소이하고 꼰다리 다시 꼬는 식이다 .
누구도 민족적이고 저항적인 경향에 대하여 말한 이는 없다.
가져온 글 https://cafe.daum.net/bilee12245/clhS/1725?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