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40:27-31 앙망하는 자의 하나님 24.8.11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앙망하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2차 대전 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3천 5백만 명에서 6천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전쟁 중에 직접 상해를 입어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자연 사망률도 크게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연구하던 한 학자는 많은 자연 사망자의 병명을 ‘낙심’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염증,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아무 희망도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등으로 너무 크게 낙심한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낙심은 삶의 의욕을 빼앗아 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특히 성도에게 있어서 낙심,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게 하는 무서운 대적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그 어려운 시기가 길어지게 되면 믿음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할 수 있고 낙심하여 심한 경우 불신앙하는 사람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에 처하게 하시거나 그 고난의 때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나 구원하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다만 죄와 허물로 오염된 우리를 연단하여 정결케 하시고 더 강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천오백 년 전에 어거스틴이 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에 보면 로마가 기독교국가로 바뀌고 나서 고트족에 침략당하여 짓밟히고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신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기에 로마의 이전 신들이 진노해서 이런 멸망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유익을 주신 것은 기억하지 아니하면서 적들의 손으로 당한 어려움과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섭리로써 이런 재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올바르고 칭찬받을 만하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며,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좀 더 나은 상태로 옮겨 주거나, 혹은 이 세상에서 좀 더 나은 목적을 위하여 그들을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란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품성을 교정시키고 정결케 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고난의 때에도 동일하게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앙망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앙망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말미암아 더 강건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약속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27절에 “내 길은 하나님께 숨겨졌고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 길이 숨겨졌다'는 말은 오랜 포로 생활의 고통으로 인한 낙심에서 나오는 백성의 탄식인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형편을 더 이상 돌아보시지 않는다는 불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지도, 지키시지도, 돌보시지도 않는다는 원망입니다. 그리고 송사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은 듣지도 않으시고 보지도 않으신다, 눈을 막고 귀를 막고 계신다, 그래서 도우심이 없는 것이라는 낙담입니다.
이들의 탄식처럼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미리 정하시고 약속하신 시점에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다가 다시 큰 나무, 숲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고난을 당할 때 어떠했습니까? 여러 곤란한 상황, 즉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 할 때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격멸과 모욕과 조롱의 고난을 당할 때 어떠하셨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했을까요? 불평하며 원망했습니까? 이때 예수님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이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42:4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 말씀 앞 3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한 것입니다. 잠24:10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 미약한 자입니까? 환난 날에 낙담하는 자입니다. 누가 어린 아이입니까?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신다, 내 사정은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신다고 탄식하는 자가 어린아이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분명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1. 먼저 우리의 사정이 하나님께 숨겨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창조자요, 절대자이십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형편과 작은 사정까지도 낱낱이 알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출3:7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바로의 종살이로 얼마나 고된 삶을 사는지 보고 듣고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내려가서 건져내고 데려가려 하노라고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의 손을 놓지 아니 하사 일으켜주시고, 다시 회복하도록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미래의 일에 대하여 의심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가까이에서 지키시고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2.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멀리 계시지 않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전도하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행17:27).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각 나라는 모두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신의 우상을 만들고 각 신들에게 고유한 영역을 부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은 농경신이 되기도 했고 어떤 신은 전쟁의 신, 또 어떤 신은 바다의 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신들의 이름을 잘 외워두었다가 하는 일이 바뀔 때마다 다른 신의 이름을 불러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각 지역마다 심지어 산마다 신이 다릅니다. 다른 신을 부르고 섬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홍해도 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도 함께 하여 길을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하나님이고 아말렉과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산에서나 바다에서나 광야에서나 전쟁 중에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능히 의지할 수 있는 절대자, 전능자가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28,29절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고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이 피곤해서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곤비하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하나님은 곤비치 아니한 분입니다. 명철하여 다 아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아니하고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사59:1). 귀를 지으신 이가 어찌 듣지 않겠으며 눈을 지으신 이가 어찌 듣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시94:9).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 없음과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정을 아뢰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낙심부터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즉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입니다. 낙심은 불신앙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3.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구겨진 지폐라도 그 가치는 그대로 남아있듯이 비록 모진 세파에 맞서 버텨오느라 찌들고 망가지고 상하여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런 존재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며 아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죄와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고 싶은 사랑하는 자녀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여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 돕기는커녕 우리의 대적이 되신다면 절망뿐이고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셨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롬5:8).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롬5:10).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었나니, 내가 너를 낳았나니, 내가 너를 피값으로 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 49:15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사 44:21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나훈아 씨의 노래 중에 ’영영‘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나봐... 영원히 영원히 영영 못 잊을 거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으리라“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잊지 않으시겠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 환난 속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 신앙을 지켜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좌절하고 넘어질지라도 그 때마다 다시 낙심하지 않고 일어서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혹 ‘낙심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반드시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고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