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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몽
손 창 섭
누이와 매형 사이의 그 기이한 부부 싸움은 거의 이틀거리로 있었다. 그것은 정말 기이한 부부 싸움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매형은 때리기만 하고 누이는 맞기만 하게 마련이었다. 매형인 상근(相根)은 아내를 구타하는 데 상당히 숙달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치 복싱 연습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눈앞에 겨누었다가 연거푸 아내의 어깨와 등을 내리족치는 것이다.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누이의 어깨와 등에서는 퍽퍽 소리가 났다. 몇 번 만에 한 번씩 상근(相根)은 아내의 옆구리를 발길로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누이는 어찌 된 판인지 한 번도 대적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남편이 덤벼들기 시작하면, 누이는 재빨리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앉은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다. 남편의 주먹이 떨어질 적마다 움칠움칠 놀라면서도 그냥 몸을 더 웅크릴 뿐이다. 간혹 “아야― 아야ㅡ’ 하고 유창한 비명을 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참말 비며으로 듣기에는 너무나 느리고 부드러운 발음이었다. 하기는 누이는 어쩌다가 아픔을 참지 못하는 듯 .
“한 군데만 자꾸 때리지 말아요! 여기저기 좀 골라가면서 때리라구요.”
하고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에게 구원을 청한 일조차 있었다.
“철수(哲秀)야, 좀 말려주렴. 아, 얼른 좀 말려주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만 실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내 웃음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웃어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나는 웃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지극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이와 매형 사이에 빈발하는 그 신기한 부부 싸움은 언제나 돈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상근(相根)은 저녁 먹은 그릇을 치우기도 전에 시급한 용도가 생겼으니 천 환만 내놓으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막판에 남편이 어떻게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누이는 말대답을 했다.
“언제 내게 돈 갖다 맡겼수?”
“그르기 내가 어디 뻐젓이 달래나. 이렇게 사정사정하디 않나.”
“암만 사정해두 없는 돈을 무슨 재간으루 내놔요.”
“거 너무 시시하니 굴디 말라우. 단 십 환인들 내가 쓸데없는 데 쓰는 줄 아나 거 다 요긴동에만 쓰는 거야. 오늘은 꼭 누게다 한탁 멕에 둘 일이 생게서 그래. 술 한 잔만 멕에 놓문 내중에 천 환의 멫십 배, 멫백 배 돼서 돌아올 테야. 자 괘니 그러디 말구 어서 천 환만 내노라우.”
“천 환은커녕, 백 환두 없어요. 툭하문 어린애처럼 없는 돈을 대구 내라구 조르니, 어디 가 도둑질을 해오란 말이오.”
“정말 이러기야. 죽어두 못 내놓갖단 말이디?”
“못 내놓는 게 아니라, 내놀 돈이 없대두 자꾸 성화구려. 난, 무슨 돈 주머닌가요.”
“저엉 그렇대문 좋다, 좋아. 오늘부터 난 네 시나이(남편) 아니구, 넌 내 에미네 아니다. 흥 어디 좀 두구 보자!”
상근(相根)은 말을 마치자 우뜰해서¹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막상 나가놓고 생각하니 더 화가 치밀었다. 그는 이내 되돌아서 들어오더니, 잔뜩 버티고 선 채 아내에게 트집을 거는 것이다.
“내가 돈 천 환 없어 남에게 개망신을 해두 좋단 말이가?”
“여보 누가 개망신을 하랍디까? 어엿이 내 밥 먹구 다니면서, 무엇 때메 남한테 개망신이구 소망신이구 한단 말요.”
“돈이 없는 걸 어떻간단 말야. 꼭 한탁 쓴다구, 것두 사업을 위해 쓴다구 약속하구서 못 쓰문 무슨 망신야. 그래 시나이가 이렇게 망신을 해두 네년은 좋단 말이디?”
“누가 돈 쓰는 약속하랍디까? 당신 맘대루 약속을 했으니까, 망신을 해두 할 수 없지, 어떡해요.”
“이 샹년 뭐야? 너 시나일 뭘루 아니, 좀 뒈데 바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근(相根)의 주먹은 아내의 어깨를 사정 없이 내리쳤다. 누이는 날쌔게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가렸다. 놀랍게 민감한 동작이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동그랗게 몸을 사리는 굼벵이처럼 이미 습성화되어 있었다. 여유를 두지 않고 상근(相根)의 주먹이 피스톤처럼 움직였다.
누이의 어깨와 등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누이는 한층 더 몸을 오그리는 것이었다. 하 견디기가 벅차면 누이도 그예 사정을 했다.
“아이구 정말 간 떨어지갔이요. 좀 쇘다가 때리라요. 얼른요, 좀 쉐 가면서 때리라구요!”
마치 아이들의 콧노래 비슷이 들렸다. 조금도 절박한 맛이 없다. 물론 상근(相根)은 들은 체도 않는다.
“이년, 시나일 뭘루 아니!”
구호처럼 같은 소릴 반복하며, 매질하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노라면 누이는 마침 내 항복하고야 마는 것이다.
“져엉 죽갔이요, 여보. 돈 내갔이요. 아 돈을 낸대니까·……”
그제야 상근(相根)은 매질을 그쳤다. 그 한 마디는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누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펐다.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깨와 등을 만져보았다.
“오늘밤부터는 따루 자요! 지분거렸단 봐라.”
눈을 흘기며 하는 소리다. 그래도 얼굴에는 분노나 비애의 기색이라곤 없었다. 애교를 띤 미소가 얄밉도록 물살처럼 번졌다. 나는 누이를 다시 보았다. 삼십이 넘었지만 역시 누이는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범속한 윤곽미 이기는 하지만.
“그러기 첫마디에 성큼 내놨음 뭏지. 괘니 매두 안 맞구…… 어디 예가 얼얼한가?”
상근(相根)은 흡족한 듯이 웃고 누이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너무 그러문 난 도망가 버리구 말갔이요. 갈 데가 없어 이러구 있는 줄 압네가.”
또 한 번 눈을 흘기고 나서 누이는 밖으로 나갔다. 누이는 남 보는 데서 돈을 다루는 일이 없었다. 밖에서 세어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혹은 돈을 밖에다 어디 감춰두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 누이는 들어오는 길로 백 환짜리 다섯 장을 남편 앞에 내밀었다.
“이거 시시하게 굴디 말라우. 어서 오백 환만 더 내노라우.”
“죽도록 얻어맞은 값은 어떻가구? 그나마 과한 줄 아세요!”
그러면 상근(相根)은 더 군소리 없이,
“에― 거. 할 수 없군!”
한 마디를 남기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기발한 스포츠의 한 게임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다. 그것은 참말 현대식 가정 스포츠일지도 모른다. 스포츠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나 태연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스포츠를 구경하기 위해 누이네 집에 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나는 지금 하
늘 옷을 잃어버린 선녀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놈의 찬란한 옷을 찾아 입지 못하는 한, 나는 영 다시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하늘 웃음 찾아내려는 듯이. 방 가운데는 먹고 남은 저녁 그릇들이 너분히 널려 있을 뿐이다. 한구석에는 두 살배기 재순(在順)이가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서는 웃통을 벗어젖힌 누이가 손바닥만한 거울 조각을 문지방에 세워놓고 화장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만 멋쩍게 웃어버 리고 말았다.
식기를 챙겨가지고 부엌으로 나갔다. 나는 이 집의 식모나 다름이 없었다. 저녁 설거지만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삼십이 넘은 대장부의 체신에, 꼴이 아니지만, 할 수 없었다. 누이는 저녁마다 화장을 하고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이는 술집 작부였다. 그러한 직업에는 누이는 수재적이었다. 그 수재의 힘으로 몇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다. 누이의 그 행동성은 강한 생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슨 회사 전무취체역²이니, 상무취체역이니 하는 명함을 누구 앞에서나 내놓기 좋아하면서도, 몇 달 가야 단돈 십 환을 들여오지 못하는 상근(相根)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 역시 저녁 설거지를 맡아 놓고 하면서도 과히 욕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릇을 일일이 부셔 시렁에 얹고, 나는 제창³ 물까지 한 통 길어다놓고 들어왔다. 누이는 여적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나는 바람벽에 기대앉아서 누이를 바라보았다. 누이에게서는 강한 인간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 냄새를 즐기는 것이었다. 참말 세상에는 인간 냄새를 풍기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내 시선이 자기에게 부어지는 걸 의식한 누이는 얼굴을 돌렸다. 애교 있게 웃었다. 확실히 명랑하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누이는 본시 고민이나 오뇌라는 것을 전연 모르는 기질이었다. 도대체가 숙명적으로 심각해질 수 없는 인간이었다.
“넌 정말 총각으루 늙을 셈이니?”
“글쎄, 낸들 아우.”
“애두, 어쩌문 그렇게 여자에 대한 욕심이 없을까!”
누이에게 있어서는 남녀 관계와 돈만이 인생의 전부였다. 누이의 화제는 언제나 그 두 가지 문제에서만 시작되었다.
“욕심이야 왜 없어요. 나두 누이 같은 여자만 있으면 담박 덤벼 들었을지 몰라요. 사실이에요. 누이만큼 예쁘구 애교 있는 여자가 있으면 말이웨다. 가만하구 있어두 밥이 생기구 옷이 생기구, 그러다가 주먹만 한 번 내둘으면 용돈두 나오구, 술값두 나오구. 얼마나 좋아요!”
나는 과연 오래간만에 명답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좀처럼 누이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이의 얼굴엔 틀림없이 도취적인 흥분이 얇게 번졌다. 누이는 마치 여자끼리 그러 듯,
“애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하고, 눈을 흘기더니 내 다리를 꼬집었다. 그러고 나서 누이는 옆방에 들어 사는 춘자(春子) 얘기를 또 끄집어냈다. 애가 좀 깔끔해서 탈이지 여태 숫처녀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노상 겉으루는 새치미를 따지만, 삼십이 다 된 오울드 미슨데, 사내 생각이 없을 줄 아니. 한 번 슬쩍 건드려만 봐, 영락없지 뭐.”
“누나하군 좀 다를걸.”
“어이구, 말 좀 말어. 수염이 석 자라두 사람은 먹어야 사는 거야. 점잖은 사람이 어딨어. 남자구 여자구, 나이 들면 다아 저 볼 재미를 채우구 싶은 거야!”
언제나 이야기가 남녀 문제에 걸치게 되면, 누이는 놀랍도록 다변해지고 또 대담해지는 것이었다. 누이는 처녀 시절부터 그랬다. 여자보다 남자 친구가 더 많은 편이었다. 자연 여러 가지 불미한 풍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여러 번 정학 처분을 당했고, 집에서도 쫓겨나면 외가에 가 살았다. 그래도 간신히 여학교를 나오자 어른들이 먼저 서둘러서 이내 정혼을 했다. 누이는 거의 매일 약혼한 남자 집에 드나들었다. 남자 편의 부모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무슨 색시가 화류계 여자처럼 저 모양이냐고 했다. 마침내 파혼을 제의해왔다. 파혼한 지 한 달 만에 임신이 밝혀졌다. 외가에 가서 해산을 하고, 몇 달이 지나서 유아는 어느 집 양자로 보냈다. 얼마 뒤, 누이는 이십 살이나 층이 지는 남자에게 출가를 했다. 그러나 일 년이 차기 전에 누이는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김빠진 영감태기 하고 무슨 재미에 살겠느냐는 것이었다. 반년쯤 있다가 이번에는 시골 중학교 선생의 후처로 갔다. 그래도 거기선 이 년이나 살았다. 남편의 동료인 독신교원과 지나치게 접근했다가, 행실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거기서도 배척을 받고 돌아왔다. 이남으로 피난 온 이후에도 상근(相根)이가 두번째의 사내였다. 남자와 사귀는 데는 거의 천재적이었다. 그런 만큼 남자 없이는 살지 못하는 누이였다. 누이에게 있어서 남녀 관계란, 단순히 자웅(雌雄)의 뜻으로만 통하는지도 모른다. 요즈음도 누이와 상근(相根)은 그 동물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밤마다 바빴다. 윗목에서, 재순(在順)일 안고 자는 나를 그들은 조금도 꺼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내가 잠들지 않고 있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누이 부부는 저희 하고 싶은 짓은 다 했다. 그들이 잠들기 전에는 나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내가 내 육체의 일부분을 애무해보는 것은 이런 때였다. 제대를 하고 내가 누이를 찾아온 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되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잠을 못자서 마치 심한 신경 쇠약에 걸린 것처럼 되어 있었다. 누이 부처는 밤 시간만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이의 출근을 위해서 언제나 남보다 이른 저녁을 먹는 우리는, 상을 물리고 나도 그대로 낮이었다. 화장을 하면서 남편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 말고, 누이는 갑자기 날더러 바람이라도 쏘이고 오라는 수가 있다. 나는 얼른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재순(在順)이를 안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등 뒤에서는 영락없이 문고리 잠그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당황한 심정으로 어릿어릿 주위를 살펴보곤 하였다.
화장을 끝낸 누이는 재순(在順)이를 깨워 젖을 물렸다. 젖을 먹여놓고 직장에 나가면, 누이는 밤 열한시나 되어야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동안 집에 혼자 남아서 애보기도 겸해야 하는 것이었다.
쿵, 쿵, 쿵 약한 소리로 또 바람벽이 울려왔다. 이어서,
“홍(洪)주사, 홍(洪)주사.”
하고, 나를 부르는 강노인(姜老人)의 음성이 들려왔다. 뜰에서 혼자 놀라고, 재순(在順)이를 문밖에 내놓고, 나는 얼른 옆방으로 갔다. 강노인(姜老人)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요 위에 사지를 펴고 엎드려서 죽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으으으, 으으으.”
하는 그 신음 소리는 똑 무슨 짐승의 소리 같았다. 나는 말없이 노인의 허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손에 힘을 주어서, 그 허리를 아래서부터 주물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좀더, 좀더, 아이구 으으응.”
노인은 그래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 뼈만 남은 허리를, 나는 사정없이 힘껏 주무르기도 하고 쥐어박기도 했다. 어떤 때는 우적우적 뼈 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손을 멈추기도 했다. 그 정도라야 노인은 효과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반 시간 가량이나 그러고 나면 내 이마와 등에도 땀이 내뱄다. 강노인 (姜老人)은 여러 해 전부터 신경통으로 고생해오는 것이었다. 하루에 몇 번씩은 으레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저리고 쑤셔서, 당장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야단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밤중이건 새벽이건 바람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서 나를 찾는 것이었다. 노인에게도 딸자식들이 있기는 했다. 본시 딸만 오형제를 낳아 길렀다는 것이다. 그중 차녀는 대구서 양부인 노릇을 하고, 삼녀는 간신히 미장원을 나와, 다달이 돈푼이나 들여오게 되자, 어떤 놈팡이와 얼려가지고, 인천서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어느 다방의 레지로 있는 넷째 딸은 거기서 먹고 자고, 집에는 한 달에 두세 번 다녀가는 정도였다. 현재는 제본소에 다니는 장녀와, 미장원에 가서 심부름을 해주는 막내딸만이 같이 살고 있다. 막내딸의 벌이란 저 하나 입치레도 될까 말까 한 정도라, 장녀의 수입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배라먹을 년이 어쩌자고 계집애만 다섯씩이나 싸놓았는지 몰라! 그래 사내 하날 못 낳구. 온 죽일 년 전 먼저 가버리구 날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고통이 좀 가셔지자 노인은 버릇이 된 말을 또 씨부렁대기 시작했다.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은 마누라가 노인은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귀한 아들 하나 못 낳아주고, 하찮은 딸만 다섯이나 쏟아놓고 죽은 것이 더 한스러웠다. 딸이란 자식이 아니라고 노인은 우겨댔다.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했다. 딸 열이 아들 하나를 못 당한다는 것이다.
“으으으, 인제 한결 나이. 자네두 팔이 아프겠네. 어서 그만 쉬게! 으으으.”
나는 내려앉아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노인은 비로소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바로 누웠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며, 한참 더 앉아서 말동무가 되어달라고 했다. 애원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노인의 이야기는 늘 같은 말이었다. 역시 딸만 낳아놓고 죽은 마누라에 대한 푸념이거나, 자기의 신세타령 이었다.
“자네가 내 아들이라면, 나는 오늘 죽어두 한이 없겠네. 이봐, 홍(洪)주사, 날 좀 보게. 난 참말 불쌍한 늙은이야!”
선망에 찬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으레 나더러 자기 사위가 되어달라고 졸랐다. 나는 좀 딱했다. 그저 씩 웃고 말았다. 무어라 대답하기 난처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나는 정말 노인의 요청에 명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큰딸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인의 희망대로 춘자(春子)와 결혼 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 제대 당시부터 별러온 신사복 한 벌을 장만하지 못한 처지였다. 춘자(春子)와 결혼하여 와병 중에 있는 장인과 처제를 거느릴 자신이 내게는 도저히 없었다. 노인과 막내딸 춘희 (春姬)만 없다면, 나는 춘자(春字)와 결혼해도 좋겠다. 죽든 살든, 합심해서 살아나가 보자고 용기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을 바라보는 내게는 그러한 용기마저 솟지 않았다. 내게서 만족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노인은 마침내 저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돈이 있나, 자식 이 있나, 몸이나 성킬 하나·…….”
하고, 훌쩍훌쩍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거북해지는 것이다. 조금도 나는 노인에게 동정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춘자(春子)는 종잇장처럼 흰 얼굴이었다. 희다 못해 푸르게 보이기도 했다. 스물일곱이었다. 국민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오래전부터 국민학교 교원 자격 검정고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어서 시집갈 생각이나 해요! 한사쿠 공분 해 뭘 해. 선생이 되문 그래 만년 처녀루 늙을 셈이오?”
언젠가 누이가 한 말에, 춘자(春子)는 대뜸 눈썹을 곤두세웠다.
“개돼지처럼 먹고 자구 아이만 낳문 젤인가요. 자기의 취미와 재능을 살려 가치 있는 생활을 해야 사람이죠.”
“여자가 취미나 재능은 해서 뭘 해요. 그저 알뜰한 살림 재미를 봐야지.”
춘자(春子)는 경멸하는 눈으로 누이를 보았다.
“재순(在順) 엄마는 그래서 알뜰한 재미에 취하셨군요. 내 걱정일랑 말구 재순(在順) 엄마나 어서 그 알뜰한 재미를 실컷 즐기세요.”
춘자(春子)의 얼굴에는 조소에 찬 미소까지 어렸다. 그러나 누이는 태연했다.
“누군 종류가 다른가!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우. 과년하두룩 시집 안 간다구 버티던 사람이 한 번 사내 맛을 보문 더 사죽을 못씁데다.”
춘자(春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입술이 떨렸다. 차차 그 낯빛이 도로 해쓱해지면서, 경멸과 조소가 뒤섞인 표정이 되었다. 춘자(春子)는 일부러 입을 열지 않은 채 저희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도 춘자(春子)는 누이와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다. 춘자(春子)가 경멸하고 있는 것은 누이만이 아니었다. 누이의 남편인 상근(相根)은 물론 자기 부친마저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평시의 언동으로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그 눈은 언제나 누구에게 대한 멸시와 조소가 차 있었다. 춘자(春子)의 눈은 마치 남을 경멸하고 조소하는 작용을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 같았다. 그러한 춘자(春子)도 왜 그런지 나만은 경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눈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대할 때만은 그 눈에서 경멸과 조소의 빛이 완전히 걷혀지는 것이다. 그럴 때 춘자(春子)의 눈은 놀랍도록 신선했다. 총명한 눈이었다. 누이는 다자꾸⁴ 춘자(春子)를 건드려보라고 나를 충동하였다. 그렇게 깔끔하고 팩팩한 여자가 도리어 살림은 앙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때도 나는 씩 웃어버리고 말았다. 춘자(春子)를 건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춘자(春子)와 마주 앉을 때마다, 그 날씬한 허리를 안아보고 싶어서 나는 가슴이 떨리곤 했다. 끼니때나 잘 때가 아니면 상근(相根)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저녁을 먹고 누이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늘 혼자서 재순(在順)일 데리고 놀았다. 그럴 때 춘자(春子)는 영어나 수학책을 들고 곧잘 나를 찾아왔다. 단정하게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모를 데를 가리킬 뿐, 춘자(春子)는 용건 이외의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불빛에 더욱 해쓱해 보이는 그 얼굴을 건너다보며, 나는 심한 피로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 허리며 무릎이며, 엉덩이가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통째로 나는 안아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금도 불순한 욕망은 아닌 것이다. 이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욕망을 누르기 위해서 나는 그지없이 피로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나는 누이의 소견을 춘자(春子) 앞에 종시 털어버 리고야 말았다.
“누이는 날더러 자꾸만 춘자(春子)씰 건드려보라고 권한답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구 말았습니다.”
춘자(春子)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마침내 이런 소리까지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춘자(春子)씨 부친께서도 나보구 한사코 사위가 되어 달라구 조른답니다. 그때마다 나는 뭐라구 할 말이 없어서 정말 딱해집니다.”
춘자(春子)는 얼어붙은 듯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마저 끊어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모로 움직거려 상반신을 벽에다 기댔다. 바위처럼 내리누르는 피로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눈을 감고 열병 환자처럼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나두 나의 죄는 아닙니다. 그렇다구 물론 춘자(春子)씨 죄두 아닙니다. 정말입 니다. 누구의 탓두 아닙니다. 춘자(春子)씨의 부친이나 우리 누이의 잘못두 아닙니다. 그저 명확한 사실은, 우선 나에게는 한 벌의 신사복이 필요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뿐입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염색한 군복만을 입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윽고 춘자(春子)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일어나 나갔다. 잠시 뒤 집 후원에서는 여인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왔다. 어둠도 그 소리를 아주 덮어버리지는 못했다. 땅속으로 길을 찾아 흐르는 물줄기처럼 가느다란 울음소리는 어둠 속을 새어왔다.
내가 누이네 집을 찾아왔을 때, 상근(相根)은 인사가 끝나자, ˙남북석탄주식 회사(南北石方척牀式會社) 상무취체역(常務取締役) 오상근(吳相根)’이라는 명함올 내놓았다. 앞으로는 국가의 원조도 받을 수 있는 아주 유명한 회사라고 했다. 그동안은 활동력 있는 수완가가 없어서 운영난으로 거의 정리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을, 요즘 와서 상근(相根)의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새 자본주를 끌어 대가지고, 착착 재건 준비 중에 있는데, 불원 정식 발족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회사만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렇게 초라한 흙벽돌집의 단칸방을 얻어 지내는 궁색한 꼴을 면할 뿐 아니라, 고급 승용차를 슬슬 굴리고 다니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나를 위해서 과장 자리 하나는 자기가 책임지고 마련하겠노라는 것이었다. 상근(相根)은 아침저녁 밥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뛰어나가곤 했다. 그가 연락처로 정하고 밤낮 나가 살다시피 하는 곳은 ‘모란’이라는 다방이었다. 날마다 거기서 동지들과 만나 재건 준비의 제반 연락과 타협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나보고도 같이 나가보자고 했다. 회사의 중역이 될 인물들에게 미리 인사를 해두는 것이 앞으로 유리하리라는 것이다. 나도 동감이었기에 하자는 대로 상근(相根)을 따라 나가보았다. ‘모란’은 큰길에서 골목으로 쑤욱 들어가 있는 별스레 우중충한 다방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저쪽 구석에 둘러앉았던 서너 너덧 명이 상근(相根)을 향해 앉은 채 고개를 끄떡해 보였다. 상근(相根)은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 다가가서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옆의 걸상을 끌어당겨 놓고 내게도 앉기를 권했다.
“이 사람은 내 처남이웨다. 제대 군인인데, 일본서 대학을 나온 수잽네다!”
상근(相根)은 그러고 나서, 고불통대⁵를 닦고 있는 오십이 다된 사내를 가리키며,
“부사장님께 인사드리게.”
했다. 나는 내 이름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다음에는 단추 떨어진 구제품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전무취체역 .”
나는 먼저 모양으로 이름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신경질적인 얼굴에 캡을 쓴 감사역과 콧등에 흉터가 있는 총무부장에게도, 나는 같은 식으로 일일이 통성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북석탄주식회사 부사장, 전무취체역, 감사역, 총무부장이라는 큼직한 명함을 한 장씩 내놓았다. 이 명함의 직함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풍채를 바라보며, 나는 자꾸만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인사를 시키고 난 상근(相根)은 친구들을 둘러보며,
“자아, 누구 차 한 잔 안 사니.”
했다.
“좀 기달려 보우. 얼마 있음 전주⁶가 나올 테지.”
구제품 양복의 대답이었다.
“제에기. 그럼 누구 담배라두 한 대 주우.”
코에 흉터 있는 사내가 담배를 내밀었다. 그는 내게도 한 개비 권했다. 피울 줄 모른다고 했더니,
“허어 , 그거 참 부럽습니다.”
하고 도로 집어넣었다. 점퍼에 캡을 쓴 친구가 마침 옆을 지나가는 레지에게 오늘 신문을 좀 보여 달라고 청했다. 레지는 잠깐 거들떠보고는 잠자코 가버렸디. 역시 기다려도 신문을 가져오지 않았다. 캡 쓴 사내는 얼굴색이 변해가지고 카운터 쪽으로 갔다.
“사람을 너무 괄시화지 말아요. 그래두 단골손님 아니오. 당신넨 영업이니까좀더 친절스레 손님을 대해야 할 거 아니오.”
캡은 서너 종류의 신문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구제품 저고리가,
“문(文)감사,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우. 돈 없음 어디 가나 괄시 받게 마련야. 그러나 예서두 쫓겨 나문, 안심하구 모일 장소두 없지 않소!”
하고 웃었다.
“그래 서울 천지에 다방이 여기뿐이란 말요?”
“암, 다방이야 많지. 찻집은 얼마든지 있단 말요. 그렇지만 밤낮 와 살면서두 운이 좋아야 차 한 잔쯤 팔아주는 패를 환영할 덴 없단 말유.”
“옳은 말야! 이거 어디 이렇게 궁해서야 견디겠나. 어서 남북석탄회사가 활발히 움직여야겠는데, 어디 돈 낼 놈이 제대루 말을 들어 줘야지 .”
이 패에서는 그중 연장자인 고불통대가 하는 말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수건으로 열심히 닦고 있던 고불통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신문을 펴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신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는 그들의 일에 기대를 걸지 아니하였는데, 며칠 뒤 밤늦게 돌아온 상근(相根)은 당장 무슨 수라고 생긴 듯이 어서 이력서를 한 장 써놓으라고 했다. 꼭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다음날 나는 이력서를 써주었던 것이다. 상근(相根)은 소리를 내서 읽어 내려갔다. 생년월일을 읽고 나서,
“음, 그러면 서른한 살이군. 우선 그만하문 나이루는 과장 자격이 되네.”
하고, 다시 읽어가다가, 학력란에 이르러 동경 모 사립대학 예과 일학년 중퇴라는 조목을 보더니, 이래선 안 된다고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회사 규칙상 과장 이상은 반드시 대학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장하면 체면을 보아서라도 들어주기는 하겠지만, 위신 문제도 있고 하니, 아예 학력을 속이자는 것이다. 지난번에 자기가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느냐고 하며, 어서 대학졸업으로 고치라고 했다. 나는 허위 이력서를 꾸며서까지 과장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상근(相根)은 나를 경멸하듯이 큰 소리로 한바탕 웃었다.
“자넨 상게⁷두 세상이란 걸 모르네 기레.”
그의 논법에 의하면, 서로 속이고 속고 하는 게 세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력서를 도로 받아놓은 채, 고칠 생각은 않고 어름어름 며칠을 넘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곧 회사가 발족한다고 하며 상근(相根)이 편에서 이력서를 재촉했다. 나는 전번에 썼던 것을 그대로 내놓으며, 평사원이라도 좋다고 했다. 상근(相根)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폐양 감사두 저 싫으문 만다구, 저엉 그렇대문 할 수 없디. 그러나 자넨 영 출센 글렀네.”
그러고 나서 이력서를 들고 나갔던 것이다. 다음날 상근(相根)은, 수일내로 사무실을 정리하고 들게 될꺼라고 하며, 같이 나가자고 해서, 나는 한 번 더 따라 나가 보았다. 그날, 소위 부사장이라는 고불통대는 나에게 인사과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인사과장이란 제일 중요한 부서라고 하며, 첫눈에 믿음직할 뿐 아니라, 오(吳)상무를 보아 중역 회의에서 가결했으니 앞으로 직무에 충실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지 어느새 보름이 넘었건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 뒤 상근(相根)의 입에서는 남북석탄회사 얘기는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요즈음 와서 누이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점심만 먹고 나면, 이내 ,외출하는 날이 많았다. 저녁에도 집에는 돌아오지 않고, 그 길로 직접 출근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날일수록 한결 긴 시간 화장에 공을 들였다. 따라서 평시보다 더욱 명랑한 표정이었다. 눈에는 미태(媚態)가 넘쳐흘렀다. 오늘도 그러한 날이었다. 점심 그릇을 챙기고 들어오니까, 누이는 화장에 여념이 없었다. 손바닥만 한 거울을 문턱에 세워놓고 부지런히 얼굴을 문대고 있었다.
“어느새 나갈라우?”
“어디 가볼 데가 있어서 그래.”
누이가 일찍 나가는 날은 나만 골탕을 먹었다. 왜냐하면, 저녁 때에 가서 재순(在順)이가 엄마를 부르며 지독히 보채기 때문이다. 습관이 되어서 저녁때만 되면 젖이 생각나는 것이다. 좀체 울지 않는 애인만큼, 한 번 행악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그걸 달래노라면 내가 땀을 빼곤 했다. 화장을 하고 난 누이는 딴사람 같았다. 약간 보태 말하면 눈이 부실 정도였다. 화장의 신비성에 나는 놀라는 것이다. 현저히 예뻐질 뿐만 아니라,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섯 살쯤은 당겨 보였다. 요술처럼 달라진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새삼스레 매혹적인 그 미모에 감탄했다.
“너두 아주 신품은 아닐 테지?”
누이는 사정없이 정체 모를 미소를 내게다 퍼부었다. 나는 갑자기 취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느라고 드로즈만 남기고 누이는 홀딱 벗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뭇사내가 누이에게 녹아나는 까닭을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외면하고 있었다.
“병신이 아닌 댐에야, 삼십이 넘두록 무사할 수 있을라구.”
나중에 생각해보면 모두가 야비한 수작인데, 즉석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웃었다. 화를 낸다는 것이 엉뚱하게 그만 웃어버리고 만 것이다. 자기 저녁은 하지 말라고 이르고 누이가 나가버린 뒤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한 나의 머릿속에 춘자(春子)의 영상이 환히 떠올랐다. 눈처럼 희다는 말이 있다. 춘자(春子)의 피부가 그랬다. 마주 앉았을 때 스커트 밑으로 내민 무릎이 눈에 뜨이면 나는 가슴이 아팠다. 형벌처럼 불행과 고독을 짊어진 춘자(春子)는, 터무니없는 자존심으로 간신히 자기를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내저었다. 모두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옆방에서 또 강노인 (姜老人)이 벽을 탕탕 치며 나를 불렀다. 나는 언제나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에 하는 버릇으로 씩 웃고 옆방으로 갔다. 강노인(姜老人)은 역시 요 위에 엎드.려 죽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허리에 올라탔다. 두 손으로 힘껏 노인의 야윈 허리를 주물러 올라갔다. 반 시간 가량이나 나는 그러한 동작을 계속한 것이다. 노인의 신음 소리가 누그러지는 걸 보.고 나는 내려앉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노인은 죽은 마누라를 원망하는 소리는 늘어놓지 않았다. 몹시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보고 좀 바투 오라고 했다. 다가앉았더니 노인은 내 손을 잡아서 갈비뼈가 앙상한 자기 가슴 위에 얹었다. 자기 가슴의 고동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르지 않다고 대답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노인은 재우쳐 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강노인(姜老人)은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여느 때 없이 숨이 자꾸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다고 했다. 이어서 죽을 것만 같다고 했다. 기운 없는 소리였다. 좀 뒤에 노인은 춘자(春子)가 다니는 제본 공장을 대강 일러주고, 딸을 좀 불러다 달라고 했다. 나는 일단 우리 방으로 가서 재순(在順)이를 업고 나왔다. 그러면 얼른 다녀올 테니 조심하라고 하며, 나는 노인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내가 돌아서려니까, 노인은 손을 저어 말렸다. 그러고는 상반신을 움직여 겨우 일어나 앉았다. 한결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인제 겨우 육십 인데 그렇게 쉬 죽을라구!”
노인은 만족한 듯이 웃었다. 왜 그런지 나는 약간 실망을 느끼며, 대문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는 재순(在順)을 업은 채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나는 큰길로 나와서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목적이 없었던 것이 차차 걷는 도중에 나는 춘자(春子)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나는 그러한 자신에게 놀랐다. 그러면서도 돌아서려고 하지 않고 강노인(姜老人)에게서 들은 방향을 향해 나는 걸음을 계속했다. 한 시간쯤 뒤에 나는 쓰레기가 쌓여 있는 공터에 나타났다. 그 한 귀퉁이에 함석지붕을 얹은 바라크?가 서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춘자(春子)가 있는 제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열어놓은 창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십여 명의 남녀 직공들이 종이 북데기 속에서 분주히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춘자(春子)를 찾아보았다. 얼른 눈에 뜨이지 않았다.
“뭡니까?”
한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소릴 질렀다. 까닭 없이 적의를 품은 눈이어서 나는 좀 당황했다. 난 얼떨결에 춘자(春子)의 이름을 댔다. 춘자(春子)의 일하는 모양을 나는 몰래 바라보고 그대로 돌아가려던 참이라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리는 가운데, 춘자(春子)도 있었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몸을 숨겼다. 이내 춘자(春子)가 쫓아 나왔다. 모욕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이 춘자(春子)의 얼굴을 스쳐 갔다. 계속해서 춘자(春子)의 얼굴이 붉어졌다. 드문 일이었다.
“웬 일이셔요?”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씩 웃고 말았다. 여기에 찾아온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오셨어요.”
춘자(春子)는 너무했다. 거푸 묻는 바람에 나는 그만,
“부친께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해버렸다. 춘자(春子)는 약간 놀란 눈으로 자기 부친의 병이 갑자기 악화됐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춘자(春子)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춘자(春子)는 공장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캐러멜을 한 갑 사서 재순(在順)에게 쥐어주었다.
“재순(在順)이 잘 가거라, 응!”
춘자(春子)는 재순(在順)의 등을 가만히 투덕거려 주었다. 그리고는 바삐 공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강노인(姜老人)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게 들었다. 기실 그렇게 생각된 것이 아니라, 그러기를 바라는 심리였는지 모른다. 대구 가슴이 설랬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강노인(姜老人)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춘자(春子)는 요즘 와서 수험 준비에 더욱 열중하기 시작했다. 차기 검정고시에는 기어코 응시하겠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협력만 해주신다면…….”
춘자(春子)는 뒷말을 흐려버리고 말았다. 이내 새침해졌다.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상하게 그 말이 내게는 잊혀지지 않았다. 두고두고 그 말을 감초 씹듯 했다. 물론 그것은 내가 협력만 해주면 어김없이 합격될 자신이 있다는 뜻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교원 자격만 얻으면, 모범 교사가 될 자신이 있다는 말을 춘자(春子)는 그전에 한 일이 있었다. 그리 되면 최소의 생활 보장은 문제없으리라는 말도 했다. 그러한 말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 자신을 위해서 나는 좀더 냉정해져야겠다고 결심 했다. 그럴수록 춘자(春子)의 야윈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과연 춘자(春子)는 나날이 더 파리해가는 것만 같았다. 춘자(春子)는 너무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겹치는 무리는 춘자(春子)를 극도로 피로하게 했다. 그 피로를 춘자(春子)는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했다. 강한 자존심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춘자(春子)는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했다. 그러고도 아침은 일렀다. 늦잠을 자는 우리가 일어나 보면, 춘자(春子)는 벌써 출근한 뒤였다. 공장에서는 어슬해야¹⁰ 돌아왔다. 우선 육체가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게다. 저러다가, 노인보다도 춘자(春子)가 먼저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게는 들었다. 그래도 춘자(春子)는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원 자격을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만이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영양 부족도 겹쳐서 자연 춘자(春子)는 여위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묘한 것은 그처럼 축진¹¹ 얼굴이나 몸집이 조금도 매력을 잃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춘자(春子)의 가느다란 몸을 힘껏 끌어안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춘자(春子)를 껴안은 채 자꾸만 울었다. 인제는 하는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나는 공연히 서러워 울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린애 울음소리에 놀라 나는 꿈에서 깼다. 조그만 재순(在順)의 몸뚱이를 나는 잔뜩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춘자(春子)와 마주 앉을 때마다 나는 그 꿈 생각이 났다. 금시 눈을 감으며 춘자(春子)의 몸을 끌어안을 것 같은 착각에 나는 가슴이 찌르르 하곤 했다. 어제 저녁이었다. 강노인(姜老人)의 요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불려서 옆방으로 갔다. 한참 동안 노인의 허리를 주물러주고 내려앉았을 때였다. 춘자(春子)도 옆에 있었다. 노인은 언제나처럼 딸만 낳아놓고 죽은 마누라를 원망하고 나서, 날더러 또 자기 사위가 되어달라고 했다. 오륙이 진¹² 부친과 어린 동생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춘자(春子)는 삼십이 다 되도록 시집을 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다 말이 났다가도 남자 쪽에서 쑥 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나도 불쌍하지만 저것도 가련하네. 여자란 남자와 달라, 때를 놓치면 아주 폐물이야! 어서 자네가 좀 돌봐주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역시 또 씩 웃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춘자(春子)는 싸늘한 시선으로 부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경멸과 증오가 불타올랐다. 가끔 입가에 가벼운 경련이 있었다. 실컷 중얼거리고 나서 노인은 잠이 들어버렸다. 춘자(春子)는 책을 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없는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춘자(春子)는 끝내 입을 다물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서고 말았다. 이 시간이 주는 압박을 나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방을 나오기 전에 나는 커다란 실언을 한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춘자(春子)씨를 끌어 안구 우는 꿈을 말입니다. 아주 우스운 꿈이지요.”
나는 왜 그런 소릴 지껄였는지 모르겠다. 그예 나는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핑 돌았다. 춘자(春子)는 지독한 여자였다.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가만히 책장을 넘겼다. 그 손끝이 몹시 떨렸다. 우리 방에 돌아온 나는 갑자기 전신에 피로를 느꼈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서 눈을 감았다. 나라는 인간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내 귀에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집 뒤란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였다. 어둠도 그 소리를 덮어버리지는 못했다. 땅속으로 스며 흐르는 물줄기처럼 가느다란 울음소리는 어둠 속을 새어나왔다.
누이는 종내 집을 나가고야 말았다. 어린 재순(在順)이마저 팽개친 채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제 저녁에 누이 부처는 대판 싸움을 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상근(相根)은 치고, 누이는 맞기만 하는 기묘한 싸움이었다. 이번에는 쉽사리 싸움의 결말이 나지 않았다. 워낙 상근(相根)이가 요구하는 액수가 컸기 때문이다. 오천 환을 강요한 것이다. 누이는 몇 차례 얻어맞더니, 천 환을 내주고 타협을 지으려 했다. 상근(相根)은 듣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아주 유망한 대회사가 설립되는데, 그 준비회합을 갖는 오늘 저녁에 자기가 주식(酒食)을 한턱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아니 뭐요? 당신이 한턱을 내요? 아 대회사가 생기는 판이니, 돈 가진 사람두 많을 거 아뇨? 어째서 하필 × × 두 쪽밖에 없는 당신이 낸단 말요?”
누이는 처음으로 열기를 올려 몰아세웠다.
“바늘 구멍만 한 에미네 소갈머리루 허투루 챙겐하지 말라우. 누군 돈이 아깝지 않을 줄 알아! 다 앞을 내다보구 선수를 써두는 거야. 그래 둬야 내게 중역 한자리가 돌아온대는 걸 좀 알라우.”
“에이구, 메스꺼워서 내 원! 아 그 알랑한 중역요? 시작두 하기 전에 깨지군 하는 회사의 중역 말예요? 그 잘난 중역은 해서 뭘 하는 거요? 대체. 그런 엉터리 중역보다는, 차라리 길거리에서 담배 장사라도 하는 게 몇 곱 났겠소.”
“뭐야, 이 썅년아! 거리에서 담배 장수나 해먹다 죽으란 말이가, 그래. 사나일 뭘루 아니 너. 그래두 상게 쥐둥아리질이야!”
상근(相根)은 일단 중단하였던 매질을 다시 계속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방어 태세를 취하여도 사정없이 내려 닥치는 상근(相卞艮)의 주먹을, 누이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누이는 몇 번이나 나에게 구원을 청했다. 겁에 질려 악을 쓰고 울어대는 재순(在順)을 부등켜안은 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생활화된 이러한 부부 싸움을 위해서 내가 중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이들의 생활권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이는 할 수 없는지 마침내 삼천 환을 내주고야 말았다. 그래도 상근(相根)은 이천 환을 더 졸라보다가, 자기도 손이 아팠던지 드디어 단념하고 나가 버렸다. 누이는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꼼꼼히 화장을 하고 나서 주점에 출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통행금지의 사이렌이 울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상근(相根)이도 은근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하며, 상근(相根)은 불을 끄지 못하게 했다. 자정이 지나도 종시 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횡포한 손님들의 강권에 못 이겨 폭음을 하고,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아마 주인집에
서 자고 오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이야기하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밤 시간이 늦기 때문에 본시 늦잠들을 자는 편이건만, 이튿날 아침 상근(相艮)은 첫새벽에 일어나 술집으로 쫓아가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거기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제 저녁에는 초입 무렵에 잠깐 얼굴만 내대고, 앞으로는 못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고 이내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상근(相根)은 얼굴이 푸르죽죽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도 퀭해졌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근(相根)은 풀이 죽었다. 매를 맞고 분하니까, 어디 아는 집에라도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짐짓 위로 비슷한 말을 했다. 누이는 점심때가 되어도 영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갔음직한 곳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재순(在順)이가 얼마나 찾으며 우는 통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재순(在順)은 내가 업고 나섰다. 전에 들어 살던 주인집에 가본다는 상근(相根)이와 나는 한길에서 갈라졌다. 아이를 업은 채 나는 무작정 거리를 싸다녔다. 재순(在順)인 내 등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더 무거웠다. 나는 자꾸 추켜올리면서 걸었다. 내 이마와 등에도 땀이 내뱄다. 애를 업은 나의 초라한 꼴이
가게 유리창에 비쳤다. 그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내 몰골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나!”
번번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견딜 수 있는 데까지는, 현재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인거나처럼 나는 또 얼마 동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얼마 만에 나는 어느 뒷골목 공터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한쪽 모퉁이에는 헛간 같은 함석지붕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은 물론 전에 한 번 와본 일이 있는 제본 공장이었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갔다. 유리 없는 창문으로 나는 그 안을 넘겨다보았다. 역시 그 안에서는 남녀 직공들이 부산히 종이를 다루고 있었다. 마침내 한 남자가 나를 발견해주었다. 그는 용하게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청하지도 않는데, 그는 큰 소리로 춘자(春子)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뭇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춘자(春子)도 나를 보았다. 좀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춘자(春子)는 이내 일손을 멈추고 정문으로 돌아 나왔다. 물론 타고난 대로 창백하고 싸늘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 누이가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요? ……그럴 거예요!”
틀림없이 비웃는 어조였다.
“그래서 누이를 찾아 나왔다가, 이 앞을 지나게 돼서 잠깐 들여다본 겁니다.”
그래 놓고 보니, 내 행동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았다. 춘자(春子)는 신기하게 약간 낯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처럼 춘자(春子)는 또 캐러멜을 한 갑 사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재순(在順)이가 깨거든 주라는 것이다. 나는 춘자(春子)를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누이는 우리가 나온 틈에 집을 다녀갔다. 고리짝을 뒤져서 자기의 밴밴한¹³ 옷가지는 다 싸가지고 간 것이다. 한편 누이는 강노인(姜老人)에게 쪽지를 맡겨놓고 갔다.
저녁 × × 時까지, 아무도 모르게 재순(在順)일 업고 서울역으로 나와 주기 바란다. 꼭 나오너라. 내용 얘기는 만나서 하겠다.
나는 상근(本目根)이나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단독으로 처리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그 시간까지 안 돌아오면 할 수 없다. 누이보다도 재순(在順)이를 위해서 시간이 되면 나는 역에 나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길에 있는 이발소까지 시계를 보러 나는 몇 번이나 왕복했다. 상근(相根)은 종시 돌아오지 않았다. 재순(在順)이를 업고 나는 서울역으로 나가 보았다. 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이 옆에는 제법 미끈하게 차린 사내도 서 있었다. 누이는 얼른 재순(在順)이부터 받아 안았다. 분주히 젖을 물리고 나서, 그 사내를 가리키며,
“이 이가 너희 매형이다!”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누이와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 이가 재순(在順)이의 본 아버지야. 부산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기 날 팽개치구 달아난 줄 알았더니 그동안 피신하구 있었다는구나 글쎄. 어떤 사정이 있어서 숨어 지냈대. 그런데 인제 그 사건두 무사히 다 해결이 나구 해서, 혹시 서울이나 오문 내 소식을 알까 싶어 왔다가, 용케 만났지 뭐니!”
누이의 말이 내게는 곧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짓말만 같았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 나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누이의 말이 사실이면 어쩌구, 거짓이면 어쩌냐. 그 진부가 누이의 행복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부산행 열차의 개찰이 시작되었다. 누이는 더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이삼 일 뒤에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여태 너 군복두 못 벗었으니 어떡하니. 여보 얘가 내려오거든, 우선 양복부터 한 벌 해 입혀야겠수. 그리구 오기만 하문 매형이 곧 취직을 시켜주신대!”
“그야 다 이를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처남인데.”
사내는 수첩을 내서 한 장 쭉 째더니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고는 양복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만 환 뭉치를 하나 꺼내주었다. 여비로 쓰라는 것이다. 그밖에 딴말은 나눌 사이도 없이 그들은 개찰구를 통과해버렸다. 승객들이 다 나간 뒤에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더 남아 있었다. 이제는 어디로든 나도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 내가 월여¹⁴를 머물러 있는 것도 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누이를 찾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차라리 나는 누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합실을 나섰다. 밖에는 어둠을 뚫고, 자동차가 수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어두운 쪽을 골라서 걸었다. 십 여 살짜리 조무래기 한 놈이 앞을 막아섰다.
“아저씨. 하숙 안 가셔요?”
“오냐 가자! 가구 말구. 어디라두 가자!”
나는 소년을 따라 걸었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불현 듯 창백한 춘자(春子)의 얼굴이 눈앞을 얼씬거렸다. 뒤이어 여자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숨죽여 우는 젊은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이러한 착각을 나는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어둠 속을 헤치고 소년을 따라 걸었다.
=끝-
2016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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