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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하는 은혜로운 찬송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이곡을 작사한 분이 크로스비(Fanny J, Crosby)입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크로스비는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맹인으로 살았지만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텐데..... 세상에서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은혜의 고백입니까?..... 사물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써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진짜 보는 것처럼 고백한 크로스비 영적으로 정말 멋진 여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보는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더 갈급하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또 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가끔 봅니다..... 무지개는 태양 빛이 대기 중에 남아 있는 물방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빛이 굴절돼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본 무지개는 반구형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무지개는 반구형이 아니라 완벽한 원형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지개를 볼 때 반쪽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도 있습니다...... 바다위에 떠 있는 빙산 뽀족한 부분만 봐서는 결코 빙산 전체를 볼 수 없기에 빙산의 일각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3절 뿐이 되지 않지만 사도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보지만 진정 영적안목을 통하여 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비교하며 무엇을 선택할지라도 분명한 판단을 하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의 영혼입니다.
16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속사람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 있는 내 영혼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그러나 속사람 영혼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겉 사람 육체는 쇠하여 낡아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게 살려고 외모뿐 아니라 온통 건강에 관심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정보, 음식에 대한 정보 방송매체는 앞 다투어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나 음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챙긴다며 이것 저것 건강식품 먹으면서 운동을 하지 않습니까!~~
저도 아침식사 후 비타민등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그리고 비엔나레공원 그리고 늪지에서 아침운동 만보를 걷는데 꼭 만난 형님 펄 되는 어른을 마주치는데 한번 쓰러진 것 같아요 걸음걸이 몸의 균형 온전치 못해요 그렇지만 양쪽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방송 들으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렇지만 곧 회복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제 아침도 순간 지나치는 길에 주님께 그 어른을 위해 걸으면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너도 나도 건강입니다.
겉사람 육체를 위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하여 노력한 결과 오늘 내가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사는 데 누가 뭐라고 해!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할 말 없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속사람 영혼을 들려다 보니 영혼이 굶주려 헐벗고 가난하게 되었다면 불쌍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 마지막책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교회 중에 책망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아멘이신 주님께서 이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 행위를 보시고 책망 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그져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하시는데 너희들을 내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 지적하셨습니다.
계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신이 부자라며 폼 잡았습니다. 그래서 자랑 합니다. 부자이니까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라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겉모습은 풍족합니다. 그러나 속사람 영혼을 들여다보니 가난뱅이요 거지임을 주님이 보시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속사람 영혼이 굶주리고 벌거벗은 줄을 눈이 있어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 입니다.
우리 예수님 이런 부자들의 안타까움을 보시고 처방을 내리시는데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19: 9-10...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에 달구어 연단되어 만들어진 순금처럼 굳어진 내 마음을 하나님 말씀의 검으로 부서 뜨려야 해요 그래서 단단히 굳은 심령이 말씀으로 녹아져야 합니다......말씀과 영적인 교류 없이는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유명한 제지 공장을 찾아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제지공장에 가니까 신문지 조각, 더러운 종이 뭉치 이런 것들이 창고에 꽉 차 있어서 심한 악취가 나니까 코를 잡고 하는 말이 세상에 제지공장이 깨끗한 종이 만드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더럽고 추한 종이가 있는지 몰랐다며 공장장에게 말하니까 공장장이 폐하, 지금 보시는 종이는 재료입니다. 이것 쓴 것 내버리고 코풀다가 내버리고 짐승의 퇴비가 섞여있고 해서 냄새나지만 이런 것들이 공장에 오면 이것을 새로 제조해서 좋은 편지지가 나옵니다. 여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주일쯤 지나고 여왕 왕궁에 아주 좋은 편지지가 배달이 되었어요. 그것도 그림도 아름답게 그리고 아주 냄새도 향기로운 냄새가 나은 좋은 편지지를 보고 여왕이 기뻐서 야~ 이 편지지 참 좋다. 그것 가지고 편지 써야겠다. 그런 마음을 여왕이가진겁니다. 공장장이 편지지에 메모를 적어 놓았어요. 폐하!, 폐하가 싫어했던 그 폐지가 바로 지금 이 종이입니다. 폐지가 공장을 통하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메모를 남겼답니다........ 제가 예화를 읽으면서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성경은 새사람 됨의 은혜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후5:17.....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새롭게 되었느니라.,
겉 사람에서 속사람으로 새롭게 변화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임을 믿습니다....... 폐지 같은 겉 사람이 우리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보혈의 능력으로 속사람 내 영혼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17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영광을 위해서 수고하며 땀 흘리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영광에 때문에 환난을 피하지 않았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가 이방 복음전도자로 살아갈 때 가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핍박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고후11:23-27......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바울이 당한 환난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받는 환난을 경하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은혜의 고백을 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거의 대부분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습니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앞으로 개발 될 곳에 미리 땅을 사고 기다립니다.....사람들은 미래를 보장할수 없기에 젊어서부터 미리 노후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노후준비를 하지만 사실 은퇴 후 얼마나 더 잘 살겠습니까?
목사은퇴 나이를 보통 70세 이라고 합니다. 은퇴 후 교회에서 준 위로금 적은 연금가지고 살아가는데 제가 20년 더 산다면 90살입니다. 이것은 노후 준비입니다.
그러나 정작 준비해야 할 사후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해요~~~~ 노후는 잠깐이요 사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이 세상에 미련이 아직은 있어요? 장인 장모님이 90세이지만 아직은 건강하시기에 제가 위로의 한마디 한다고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러니 일어나기가 힘들고 아파도 더 몸 챙기고 더 오래 살아야지요 그런데요 장인어른이 한술 더 뜹니다. 조카 중에 결혼하면 8명 자녀 낳겠다고 할아버지 앞에 자신 있게 말한 손자가 있어요 지금시대 이렇게 말한 청년들 드물지요 그래서 장로님 입버릇처럼 손자자랑을 그렇게 합니다. 손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 네가 건강해야 손자가 낳은 8명 중에 한 명은 내가 업어 주어야하니 더 잘 먹고 건강 챙기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영광 천국 가는 것 확실히 믿지만 당장 죽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전히 살고 있는 세상에 애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적당히 하십니다....... 천국에 대한 맛을 너무 많이 보여주면 빨리 인생을 마칠까 싶어 조금만 맛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마음 붙이지 못하도록 때때로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하십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어려움이 다 들있지요
그런데요 장로교 아버지라고 부른 칼빈은 말하기를 “성도들이 이 세상에 과도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환난을 주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빈곤, 질병, 흉년, 화재, 강도, 전쟁 등의 재난과 재앙들을 주심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들 들어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데려가심으로 슬프게 하시고, 교만을 꺾으십니다. 질병인 육체의 가시를 주어서 바울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합니다. 욥을 보세요 다 하나님이 빼앗았지만 환난을 주시고 그런 가운데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하나님이 가져가셨던 것을 갑절을 욥에게 되돌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당한 고난 핍박 환난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절대로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주셔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피할 길까지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향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잠깐 누리는 영광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마다 특색이 있지만 그 표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보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보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십계명에 명시되었듯이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물속이나 어느 곳에서도 형상이나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 멧시지를 새겨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느껴보려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섬겨요 이것은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큰 약점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하나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 가운데 보디발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 아내와의 동침은 불륜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해 오는 비하인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이 “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 말에 대해 보디발 아내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멍한 얼굴을 했다는 것입니다...... 상상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디발 아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화려한 자수로 장식이 된 커튼을 찢어가지고 방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이집트 신상을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리 씌우고 눈에 들어오지 않게 가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보디발 아내는 “ 요셉!~~다 됐어요. 이제 신은 우리를 보지 못해요”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그렇지만 나의 신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분의 눈은 결코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빛과 어둠이 다르지 않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보이는 하나님으로 속사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요셉의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 트라이안(Tryan)은 유태인의 유명한 학자였던 여호수아(Josha) 랍비를 만나 “랍비여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랍비가 “폐하께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보면 죽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하자 황제는 다시 “그러나 그러한 말로 나를 설복시키려하지 말라. 나는 꼭 하나님을 보아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랍비는 궁전을 비취인 정오의 찬란한 태양을 가리키며 “폐하! 그렇다면 저 태양을 바라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태양을 바라본 황제가 “너무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하자 랍비는 “그렇습니다. 폐하! 피조물의 광채도 바라보기 어렵거늘 어찌 창조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오직 성경 통하여 만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의 예수님을 보면서도 말하기를 저는 보아야만 믿겠다고 고집 부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라 그리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를 넣어보라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 말씀에 도마 손으로 상처 난 예수님 옆구리를 만져보기나 했겠습니까? 다른 말이 필요없지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합니다. 이런 도마를 보시고 격려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주향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눈 영적안목을 가지고 진정 자신을 먼저 보십시요 오직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 새롭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현세의 영광이 아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항상 사모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