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시편73,25).
비로소 시인은 ‘영적 정상’(쉐퍼)에 달한다.하늘에서나 세상에서나 하느님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그분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다른 바랄 것이 아무것이 하나도 없다.하늘과 세상,곧 우주에서 그의 유일한 소유는 하느님이시다.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악인의 번영도,자신의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장 소중하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게 된다.(암브로시우스)
시편 73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73편에서는 시인과 악인들의 삶이 대조를 이룬다.시인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하느님이 선하시다고 했지만,악인들은 평안하고 오히려 마음을 깨끗이 보존한 자신은 불행함을 이해할 수 없다.이 문제는 결국 하느님이 그의 마음의 반석이 되시고 그가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으로써 그분의 선을 체험한다는 확신으로 해결된다.시인은 인간 실존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마음의 상태에 집중함으로써 神正論의 문제를 넘어서서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성장의 이야기를 교훈 형태로 전한다.따라서 이 시편은 시인의 아픈 마음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선은 물질적인 축복보다는 하느님과의 내적 친밀감에서 드러난다는 메시지와 함께 마음의 다스림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3-2 시편 42-89편/바오로딸)
실천적 상대주의
122.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는 그릇된 생활 양식을 낳습니다.교황 권고<복음의 기쁨>에서 저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따라서 만연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인간의 무한한 힘의 숭배와 더불어,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희생시키며 살아가고,환경 훼손과 사회의 부패를 낳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123. 상대주의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빚을 명분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질병입니다.이와 같은 논리로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익에 보탬이 안 되는 노인을 유기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는 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경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논리이기도 합니다.이들은 그러한 힘이 사회와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절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우리 저마다의 욕망과 즉각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 이외에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인신매매,조직범죄,마약 매매.피의 다이아몬드 매매,멸종 위기 동물 가죽의 매매를 어떻게 제한하겠습니까?가난한 이들의 장기를 팔거나 실험에 이용하려고 구매하고,부모의 바람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같지 않겠습니까?이와 같은‘쓰고 버리는’논리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쓰레기를 양산합니다.그러므로 환경에 해로운 행위를 방지하는 데에 정치적인 조치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문화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용 보호의 필요성
124. 인류를 배제하지 말아야 하는 통합 생태론에 대한 모든 접근에서 노동의 가치를 포함시키는 것은 필수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회칙<노동하는 인간>에서 이를 잘 설명하셨습니다.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시어,그곳을 보존하게(돌보게)하셨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일구도록)하셨습니다(창세2,15참조).그래서 노동자와 장인이“한 세대의 골격을 유지합니다”(집회38,34).현실에서,피조물의 현명한 발전을 촉진하는 인간의 개입은 세상을 돌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이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께서 사물에 심어 넣으신 가능성이 전개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땅에 약초를 마련해 놓으셨으니,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집회38,4).
125. 우리가 인간과 그 주변 세계의 올바른 관계를 성찰하려면 노동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말할 때,현실에 대한 인간 활동의 의미와 목적을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이는 육체노동이나 농업뿐 아니라 사회 연구 개발부터 기술 개발 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존 현실의 변화를 포함하는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온갖 형태의 노동은 우리가 다른 존재와 맺을 수 있고 또 맺어야 하는 관계의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아사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에 대한 관상적 찬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영성도 노동에 대한 부요하고 건전한 이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예를 들면,샤를 드 푸코 복자와 그 제자들의 삶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6.우리는 수도 생활의 위대한 전통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본디 수도 생활은 도시의 타락을 피하고자 세속을 벗어나는 것을 선호하였습니다.그래서 수도승들은 사막을 찾아간 것입니다.그들은 사막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나중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은 그의 수도승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영적 독서와 더불어 육체노동의 도입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사람들은 묵상과 노동의 상호 작용으로 인간의 성숙과 성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을 실천하면 환경을 더욱 잘 돌보고 존중하게되어,세상을 건전한 냉철함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127.우리는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임을 확신합니다.그러나 우리 인간이 관상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잃으면 노동의 의미를 왜곡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인간은“물질적 복지를 도모하고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며 영신 기능을 계발할 수 있는”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노동은 이렇게 개인의 다양한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여기에서 창의력,미래 설계,재능 계발,가치 실현,타인과의 대화,경배와 같은 삶의 여러 측면이 나타납니다.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의 사회 현실은,편협한 기업 이윤과 모호한 경제적 합리성을 뛰어넘어,“계속하여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요구합니다.
128.창조 때부터 우리는 노동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인간의 노동을 점진적인 기술 발전으로 대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이는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것입니다.노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의 길입니다.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은 언제나 위급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방편이 될 뿐입니다.가난한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커다란 목적이 되어야 합니
다.경제는 일종의 기술 발전을 촉진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일자리를 기계로 대체한 결과,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이는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거슬러 행동하는 또 다른 길이 될 뿐입니다.또한 일자리의 감소는“모든 사회적 공존에 필수적인 신뢰,의존,법규 존중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사회 자본’의 점진적 손실”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다시 말해서,“인정 손실에는 늘 경제적 손실에 따르며 경제적 역기능에도 늘 인적 손실이 따릅니다.”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기업 행위입니다.
129. 지속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의 다각화와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하는 경제의 증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예를 들어,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다양한 소규모 식량 생산 체제가 있습니다.이러한 체제에서는 땅과 물을 적게 사용하고 쓰레기도 적게 배출합니다.이는 소규모 경작지,과수원,농원,사냥,야생 작물 채취,지역적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규모의 경제는,특히 농업 분야에서 영세농들이 결국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영세농들이 다른 다양한 생산 방식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 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기업 활동은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기업이 특히 일자리 창출을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긴다면 그 활동 지역의 풍요로운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알랴,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김용택)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