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갈초려(諸葛草庐) : 류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찾았을 때 누추한 초갓집에 살았다.
- 류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힘을 보태준 이야기에서 -
♣ 삼고초려(三顧草廬)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人材)를 구하러 몸소 누추(陋醜)한 곳까지
찾아다니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후한 말(後漢末)의 혼란(混亂)한 시대
에 류비(劉備)는 백성을 구제할 큰 뜻을 품고 뛰어난 인재를 구(求)하려
했다.
어렵게 만난 서서(徐庶)를 조조(曹操)의 모의(冒擬)로 떠나 보내면서 소
개(紹介) 받은 사람이 제갈량(諸葛亮)이었다. 제갈량(諸葛亮)은 류비(劉
備)가 찾아올 때마다 자리를 피했으나, 3번이나 찾아오는 정성을 받아
들여 류비(劉備)를 돕기로 했다. 이후로 제갈량(諸葛亮)은 한(漢)나라가
망(亡)하자 류비(劉備)를 한(漢)나라를 이은 촉한(蜀漢)의 황제(皇帝)로
세웠다.
제갈량(諸葛亮)은 류비(劉備)가 죽은 후 류비(劉備)의 뜻을 이어 나라를
튼튼하게 기반을 다지고, 한(漢)나라를 망하게 한 위(魏)나라를 정벌(征
伐)하러 가면서 2대 황제 류선(劉禪)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렸다.
여기에 전대(前代) 류비(劉備)가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회상(回想)하며
“삼고초려(三顧草廬)” 라는 말을 썼다. 이전에도 영웅(英雄)이 인재를
간곡(懇曲)하게 찾아다닌 경우가 많았지만, 류비(劉備)와 제갈량(諸葛
亮)의 일화(逸話)를 대표적으로 들게 되었다.
▲ 天下第一流 : 천하제일의 인물이며, 만세에 그 정신은 흐른다
이 현판은 촉한(蜀漢)승상인 제갈량(諸葛亮)의 무후사(武侯祠)글씨의 본보기이다
<天下第一流> 上書“漢丞相諸葛武侯祠”的字樣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의 공명원(孔明苑)
공명원(孔明苑) 안은 동서(東西)의 폭(幅)이 그렇게 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諸葛亮)이 화살과 쇠뇌촉(-弩鏃)의 연발(連發)이 가
능(可能)한 무기(武器)를 지닌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산굴잔도(山窟
栈道)를 지나는 형상(形象)을 만들어 두었고, 발굴(發掘)된 약간의 실
물(實物)도 있다. 거기다가 제갈량(諸葛亮)이 군대(軍隊)를 이끌고 전투
(戰鬪)를 하던 전쟁터(戰爭址)의 유지(遺址)를 사진(寫眞)으로 전시(展
示)해 두었는데, 사진(寫眞)은 유명한 가정(街亭)、오장원(五丈原)、정
군산(定軍山)、팔진도(八陳圖)의 옛터 등 한번 볼만한 가치(價値)가 있
는 것이다.
▲ 공명원(孔明苑)의 폭을 조금 넓게 잡아서
▲ 삼국문화진열관(三國文化陳列舘)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①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②
▲ 삼국시대유물전시품(三國時代遺物展示品) ③
실제로 이러한 옛날의 현지 전쟁터를 한 번 가볼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공명원(孔明苑)에서 더욱 세세히 살펴보았다. 이런
유물(遺物)과 사진은 공명(孔明)의 종적(蹤迹)을 기록(記錄)해
둔 것으로, 비록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황(狀況)이 변하기는 하
였지만, 역사(歷史)에 포함(包含)되어 그 시대의 중요한 정황(情
況)이나 전쟁(戰爭)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는 증거물(證據物)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그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심리(心理)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 청아관(聽鵝舘)이라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집이란 말인가? 아니다.
항상 싸움터의 진지(陳地)를 생각하고, 병사들의 함성을 듣는다는 뜻이다.
제갈량(諸葛亮)과 얽힌 성어(成語) 중에 “요아모선(搖鵝毛扇)”이란 말이
있다. 搖<흔들-요>、鵝<거위-아>자인데 진지(陳地)를 말한다.
毛<털-모> 가벼운 깃털을 말하고、扇<부채-선>자을 쓴다.
전해오는 말로는 제갈량은 항상 손에는 우선(羽扇)을 잡고 작전을 지휘하였는
데, 후세 무대에서 제갈량 같은 책사(軍師)를 연출할 때 손에 여러 우선(羽扇)
을 갖고 나왔다. 그래서 “요아모선(搖鵝毛扇)” 이란 말은 ‘계책을 꾸며 방도를
마련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흔히들 그런일에 “요아모선(搖鵝毛扇)”의 방책이라도 있나? 식으로 쓴다.
♣ 제갈량(諸葛亮)과 관계된 성어(成語)로는
삼고초려(三顧草廬)、칠종칠금(七縱七擒)、요아모선(搖鵝毛扇)、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仲達 : 司馬懿의 字)을 쫓아낸다(死諸葛能走生仲達)、
족식족병(足食足兵)、초출모려(初出茅廬) 등 몇 가지가 있다.
▲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의 좌측에 있는 계련루(桂蓮樓)
▲ 제갈량전(諸葛亮殿)과 혜릉(惠陵) 사이의 연화지(蓮花池)
▲ 결의루(结義楼) : 도원결의(桃園結義)를 기념하는 누각
▲ 결의루(结義楼) : 측사면에서 촬영
< 계 속 >
첫댓글 삼국지를 읽으며 제일 안타까운 일이, 제갈공명이 유비가 아닌 사람을 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눈으로 보게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읽어본 삼국지 이야기가 성도 무후사 곳곳에 있어서
세부적으로 쪼개어 사진과 설명을 붙이고,
중요한 한자어 및 고사성어에 해설까지 해 보았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답니다. 그런데도 역사는 너무 잔인합니다.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써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