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10년 결혼생활 종지부 찍은
김지미, 네 번째 이혼 결심 후
미국으로 출국한 사연
한국에서 여배우로 대표되는 영화인 김지미가 남편 이종구 박사와 10년의 결혼생활을 뒤로한 채 이혼이라는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너무 다른 성향으로 갈등을 겪던 노부부는 그 갈등으로 인해 지난 3년간 독방을 쓰며 각자의 삶을 살아오다 결국 이혼에 이른 것.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을 치른 예사롭지 않은 김지미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취재/신규섭 기자 ●사진/이현구 기자
“모든 결혼은 내게 힘겨운 선택이었고,
남편들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평생을 영화와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아온 김지미 씨가 네 번째의 결혼도 파경으로 끝을 맺었다. 이같은 사실은 그녀의 별거 소식이 전해지고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월 말 김지미 씨의 측근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혼서류를 제출한 직후 그녀는 딸이 있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그녀를 만날 기회는 차단되었다.
11년 전인 92년 저명한 심장병 전문의 이종구(70세) 박사를 배우자로 맞았던 그녀가 생활 패턴과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거리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20일 전부터 별거에 들어간 사실은 이혼의 전초전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지난해 4개월 동안 미국에 체류하며 생각할 시간을 가졌던 그녀는 지난 1월 초 귀국한 직후 이 박사와 사실상 결별을 염두에 둔 별거를 선택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다 내 팔자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그녀의 도미 후, 그녀의 친지를 통해 추가로 확인된 사실은 그녀가 지난 1월 22일 법원에 이혼서류를 제출했으며, 10여 일이 지난 지난 2월 2일 그녀는 언론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니. 내 팔자가 이런 걸…”이라는 쓸쓸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결혼생활마저 파경으로 끝을 맺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그녀의 소회가 얼마나 쓸쓸했을까.
뒤늦게 사실 확인만 했을 뿐, 그녀의 별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예가에서는 이미 그녀의 이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저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김지미 씨를 대신해 이종구 박사를 찾았다. 몇 년 전부터 압구정동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이 박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병원 관계자에게 기자의 신분을 밝혔지만, 그들은 완강한 제지로 맞섰다. 병원 관계자들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이 박사의 비서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현재 이 박사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을 예정이라며, 돌아가줄 것을 당부했다.
“몇 군데 잡지사 기자들이 찾아왔지만, 박사님이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셨어요. 지금은 환자가 몰릴 때라 그럴 짬도 없으시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별거 기사가 나간 후 이 박사는 일체의 인터뷰를 사양하고 있다고 했다. 또 최근에는 이 박사가 일년 후에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다고 전했다. 나이 일흔한 살에 겪는 이혼이라 이 박사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행과 침묵으로 언론의 관심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두 사람. 10년의 결혼생활 동안 별다른 잡음 없이 평온한 듯 보이던 두 사람을 둘러싸고 이혼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한 달여 전 노부부의 별거 사실이 신문지면을 통해 알려지면서부터다.
젊은 시절을 캐나다에서 보내고 귀국해 중앙병원에 근무하던 이 박사와 결혼한 김씨는 그동안 이 박사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개업의로 독립하도록 뒷바라지하는 등 헌신적인 내조를 해오며 다정하고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왔다.
김지미가 누군가. 한국 영화계의 대모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할 사람은 아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은 이미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해온 그녀였기에 이혼 소식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외적인 타이틀로 만난 부부는 잘 안 된다
그녀의 나이 쉰둘, 이종구 박사의 나이 예순에 새 가정을 일구었다. 여자 나이 쉰 무렵이면 자신의 일에서 성취를 하며 활발한 활동을 할 나이다. 일에 있어 정력적인 그녀도 마찬가지. 그 좋은 나이에 그녀는 이종구 박사를 만났다. 당시 이 박사는 그녀 어머니의 주치의였다. 위독한 어머니를 돌봐준 사람이 이 박사다.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는 이 박사가 홀아비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넌지시 알려줬다. 홀몸인 딸이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못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그녀에게 새 짝을 지어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이 박사는 괜찮은 사윗감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언니와 이 박사와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어머니를 보살펴준 담당 주치의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이 박사가 “집으로 방문해도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주치의를 괄시할 수 없어 집으로 초대했고, 그런저런 인연으로 마침내 지난 92년 그녀 인생에서 네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동부이촌동의 성당에서 결혼식이 조용하게 거행되었지만, 명망 있는 박사와 여배우의 결혼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독한 감정의 이끌림 없이 대외적인 조건에 맞춰진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여배우와 의사의 결혼이지요. 저도 그랬지만, 이 박사도 힘들었을 거예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한 셈이죠. 대외적인 타이틀로 맺어진 부부는 잘 안 돼요. 아무것도 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상대와 하는 결혼이 괜찮죠. 체면, 타이틀 그런 것 다 필요 없어요. 껍질을 벗은 인간과 만났을 때가 가장 편한 거죠.”
최근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결혼생활의 굴곡 많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전혀 다른 공간에서, 그것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입지를 굳힐 정도로 자기 울타리가 높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을 쉽게 허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고, 자연 두 사람 사이에 쳐진 유리벽의 강도는 점차 커져 갔다.
매 맞을 각오로 내 감정에 충실하며 살았다
그런 갈등을 한국 여성의 굴레로 짊어지고 살 만큼 어리석지 않은 김지미가 이혼을 결정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그녀는 일이든 생활이든 자신을 속이며, 가식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행동이 잘못이었다면 매를 맞고 심판을 받을 각오로 산 여자.
여느 여권운동가보다 당당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 그녀였다. 그녀에게 가식적인 부부생활의 연장은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녀의 당당함은 지금까지 그녀의 삶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강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한국의 리즈 테일러란 명성을 얻은 그녀였다. 사실 그녀와 리즈 테일러는 닮은 부분이 많다. 우선 타고난 아름다움이 닮았다.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은 리즈와 그녀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태고의 아름다움으로 10대에 이미 영화계에 입문한 것도 그렇고, 영화배우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도 닮았다. 또 에이즈와 관련된 봉사활동을 했다는 점도 비슷한 점이다.
어디 그뿐이랴. 김지미를 한국의 리즈 테일러로 부르기에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김지미를 외국 유명배우에 빗댄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이건 순전히 리즈가 그녀보다 나이가 많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밝혀두고 싶다. 하지만 개인사적으로 두 사람은 더욱 긴밀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격정적인 사랑의 화신이었다는 점이 그렇다.
리즈 테일러 하면 아름다움 다음으로 떠오르는 게 여덟 번의 결혼식이다. 횟수로야 리즈를 당할 재간이 없지만,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감안하면 네 번의 결혼이 결코 리즈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이혼 소식은 충격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녀의 결혼과 이혼 소식이 우리 사회에 던진 파장은 적지 않았다. 첫 결혼이 그랬다. 여고 시절 한국 컬트 무비의 창시자란 명성을 얻은 괴짜 감독 김기덕의 눈에 띄어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녀가 같은 일을 하면서 결혼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정을 꾸렸던 첫 번째 남편 홍성기 감독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아줌마로 살고 싶다
그러나 매번 흥행에 실패하는 감독 남편을 둔 ‘명배우’ 아내의 심적 고통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키 어렵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모든 결혼은 그녀에게 힘겨운 선택이었다. 첫 결혼에서 힘들었다. 그녀가 돈 버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그때 다가온 사람이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 최무룡이다.
배우들끼리 연기를 하다 보면 친구 이상으로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 함께 연기를 하다 보면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하루 종일 촬영장으로 옮겨 다니면서 같이 있다 보면 속에 있는, 남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도 하게 된다. 그렇게 동료로 만난 최무룡과 사랑에 빠진 그녀였다. 그러나 그 생활도 아들 하나와 딸아이 하나를 낳고 이혼으로 끝났다.
최무룡의 영화 실패로 이혼에 이르렀던 당시, 그녀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그후 76년 그녀는 가수 나훈아와 깜짝 결혼 발표를 했다 4년 만에 다시 헤어졌다. 그동안의 결혼생활을 반추하며 그녀가 남긴 말은, 결혼생활에서 그녀가 느꼈던 상실감, 공허감을 느끼게 해준다.
“내게 남편들, 남편이었던 사람들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어요. 그 모든 것을 다 내가 했으니까요. 누구도 날 도와주거나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노력해서 다 얻었죠. 여자로서 불행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남자들도 나와 살았던 것이 불행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다시 네 번째의 이혼. 천직으로 주어진 배우의 길에서 최선을 다했고, 자신을 지탱해준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던 김지미. 그녀는 몇 달 전 한 언론인에게 그래도 다시 태어난다면 아주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혼도 한 번만 하고, 아이도 적게 낳고 편안하고 평범하게 살면 고만고만한 스트레스를 받는 동네 아줌마로 살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운명이 있다면 그녀의 편은 아닌 듯하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게 인간사인가 보다.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 언제나 남는 것은 그녀 자신뿐이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당한 김지미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늙어도 아름답고, 이혼해도 여전히 당당한 그녀가 김지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