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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한국의 명시 감상 (1)
행 복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이야기
이번에 소개하는 <한국의 명시감상(13)>에서는 특정시(特定詩)의 내용을 감상하기보다는 1940년대부터 근 20년간에 걸친 청마(靑馬) 유치환과(柳致環)과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의 실로 세기적(世紀的)인 희대(稀代)의 사랑 이야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한다.
유치환의 호는 청마(靑馬). 청마는 1908년 통영(統營) 출생이다. 유명한 연극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청마 유치환의 실형(實兄)이다. 청마는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다니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延禧專門)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 유치환은 고향 통영에서 같은 학교[통영여중]에서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이영도에게 사랑의 혼(魂)을 쏟아 붓는 수많은 편지를 띄운다. 늦게 찾아온 진정한 사랑을 불꽃의 혼으로 승화(昇華)시켜 시와 편지로 연민(憐憫)의 정(情)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친다. 따라서 여기 소개하는 유치환의 시, <행복>은 감수성(感受性)이 예민(銳敏)한 사춘기(思春期) 소녀로부터 황혼(黃昏)의 노년층(老年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회자(膾炙)되고 애송(愛誦)되는 시이기도 하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행복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전체적으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만을 원하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참사랑'의 의미를 조용히 깨우쳐준다 하겠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깨달음 때문에 시적 화자는 행복한 느낌으로 우체국에 가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쓴다. ‘에머랄드 빛 하늘‘ 이라든가 ‘환히 내다뵈는‘ 이라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화자(話者)의 행복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그토록 많은 편지를 창문 앞에서 썼던 당시의 그 통영우체국은 고풍(古風)을 풍기던 옛집은 헐리고 지금은 산뜻하게 새 단장을 하여 옛 정취(情趣)를 찾아 볼 수는 없다. 여러 차례 이 우체국의 이름을 <청마 우체국>으로 고치자는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였으나 청마의 친일행각(親日行脚)의 시비(是非)로 아직까지 이름이 바뀌지 못하고 있다.
'통영문협(統營文協)'에서는 연전에도 유치환이 절절(切切)하게 편지를 썼던 "통영 우체국(지금의 통영 중앙동 우체국)"을 유치환의 호를 딴 ‘청마 우체국’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나섰으며 또 주민들도 많은 내방객(來訪客)들이 이곳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청마’를 떠올리지 않겠느냐는 취지(趣旨)에서 우체국 윗 층 일부를 ‘청마’를 기리는 공간으로 쓰면 좋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다.
본래 청마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8년도에 통영우체국 앞에 청마의 흉상(胸像)이 건립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최근 남종(문정일)이 직접 "통영우체국"에 전화로 확인해 보았다. 현재의 "통영우체국"은 근년에 새로 세워진 우체국이고 청마(유치환)가 정운(이영도)에게 편지를 쓰던 우체국은 "통영중앙우체국"이라 하여 다시 그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그 우체국 앞에 청마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는데 그 시비에는 위에 소개한 시 "행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우체국 담당자의 말로는 우체국으로서는 아무런 추진된 특별 계획이 없고 통영시 당국에서 청마선생의 기념관 건립 등 몇 가지 부대적(附帶的)인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유치환 시인의 생애는 애달픈 사랑으로 대표되는 슬픈 현대사의 일부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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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딸을 데리고 사는 독신녀였다. 이때부터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戀慕)의 시를 썼다. 청마가 이영도(정운)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한편의 산문시(散文詩)와도 같이 서정(抒情)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영도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으로 시조시인이며 호는 정운(丁芸)이다.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정운은 재색(才色)을 고루 갖춘 규수(閨秀)로 출가(出嫁)하여 딸 하나를 낳고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홀로 되었다. 정운은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국어 교사로 부임한다. 이렇게 같은 학교의 교사로 만나게 되자 정운은 청마의 첫눈에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일제하에서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와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靑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는다. 당시 청마의 가누지 못하는 심경을 <그리움>이라는 시로 표현하고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육지]같이 까딱도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내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旣婚者)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의 숫자만도 5,000여 통이었다. 시인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것이며 사랑은 미완성(未完成)을 통해 비로소 완성(完成)되는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남긴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남아 있는 편지 5,000여 통 중에서 200통을 추려 단행본(單行本)으로 엮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마의 시《행복(幸福)》중의 마지막 줄인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이던 '중앙출판사'는 하루아침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시인(유치환)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戀慕)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로부터 시를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節度) 없는 애정의 방황(彷徨)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自省)의 술회(述懷)를 한 일이 있기도 한데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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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이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不倫)>이라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 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置簿)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음을 독자들은 알기 때문이다.
이영도의 경우도 뭇 여인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청마가 유부남이요,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냈던 것이다. 흔히 이별의 원인은 자존심 때문인데 이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비록 일방적이었지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가 혹자에게는 부러운 존재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哀戀)의 글을 쓸 수가 있었으리라. 결과적으로 이영도는 청마의 시세계(詩世界)를 넓혀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매일 연서(戀書)를 보내 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변함없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세간에서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청마의 부인이 남편의 행동을 "예술혼(藝術魂)에 대한 갈증(渴症)"으로 이해하고 이영도시인을 초대하여 세 분이서 함께 식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청마에게는 이영도에 대한 연모(戀慕)가 자신의 필연적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청마의 부인이 이것을 용납했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론 잘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이혼과 이혼 후 생활이 힘들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감안(勘案)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두고서 다른 여인에게 20년 가까운 세월동안이나 연서(戀書)를 날려 보냈던 것은 청마의 선택이었고 그런 청마를 떠나보내지 않고 끌어안아 주었던 것은 청마 부인의 선택이었다.
한국의 명시 감상 (2)
마 음 -김광섭(金珖燮: 1905-1977)-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작가소개 및 작품 감상
김광섭시인은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이며 호는 이산(怡山)이다. 1926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27년 와세다대학 동창회지 <R>지(誌)에 첫 작품 《모기장》을 발표했고 1928년 정인섭(鄭寅燮)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했다.
1933년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학교(中東學校) 영어교사로 있으면서 박용철(朴龍喆)·이웅(李雄)·유형목(兪亨穆)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 <버나드 쇼>의 《무기와 인간》을 번역·상연하는 한편, 평론 《연극운동과 극연(劇硏)》, 《애란연극운동소관(愛蘭演劇運動小觀)》, 《1년 동안의 극계 동향》 등을 발표했다. (참고: <아일랜드>는 <愛蘭(애란)>으로, <핀란드>는 <芬蘭(분란)>으로, <폴란드>를 <波蘭(파란)>으로 각각 표기함). 시인이 중동학교 재직 중, 아일랜드의 시를 강의하면서 반일(反日) 민족사상을 고취(鼓吹)했다 하여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3년 8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광복 이후 상당기간(相當期間) 문화계, 관계(官界),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한편, 45년 <중앙문화협회> 창립, 46년 <조선문필가협회> 창립, 47년《민중일보(民衆日報)》 편집국장, 48년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동경(憧憬, 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反應, 1971)》 등 시집을 통해 주지적(主知的) 시인으로 알려졌고, 작품에는 지성인(知性人)이 겪는 고뇌(苦惱)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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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마음>은 개인의 내면세계(內面世界)를 다루고 있는 순수(純粹) 서정시에 속한다. 인간은 누구나 세속(世俗)에 얽매여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를 찾고 고결(高潔)한 이상(理想)을 이루려 하는 것이 이 시의 모티브이다. 여기에서 화자(話者)의 평온(平穩)한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이며,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把握)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곱고 부드러운 격조(格調)와 적절(適切)한 은유(隱喩)로 아름다운 언어의 조화를 이룬다. 은유와 상징이 잘 구사되어 세련미(洗練味)와 함께 지적(知的) 관조(觀照)도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파문(波紋)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敬虔)한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초기 작품에 속하는 이 시는 자기의 꿈을 잃지 않고 `밤마다 덮음`으로써 시인 자신이 견지(堅持)하고 있는 '지적(知的) 관조(觀照)'를 곱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제1연에서 '물'이라는 사물을 통해 마음의 민감(敏感)한 흔들림과, 그 평온(平穩)함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과 사건이 있어서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둘째 연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음의 평화에 충격(衝擊)을 주어 깨뜨리는 사람(돌을 던지는 사람),' 어떤 현실적 이득을 취하고자 접근하는 사람(고기를 낚는 사람), 그리고 고요함을 어지럽히고 유혹(誘惑)하는 사람(노래를 부르는 사람) 등이 그들이다.
작중 화자는 이러한 사람들과의 얽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요히 자신의 내면세계에 고립되어 침잠(沈潛)하는 길을 택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별, 숲'은 앞에 등장한 방해자(妨害者)들과 달리 그의 평화를 돕고 지켜주는 자연의 사물(事物)들이다. 이 작품에 암시된 바에 의하면, 세속적(世俗的) 욕망(慾望)과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기만 할 따름이며, 사람은 오직 자연 속에서 마음의 고요함을 지킬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꿈을 덮어서 고이 간직'한다. 이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백조(白鳥)'가 오는 날 그를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백조'가 어떤 의미를 가진 은유인가를 단정(斷定)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바람직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따지기보다 백조의 모습을 상상(想像)함으로써 그 분위기와 느낌을 파악(把握)하는 일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고요한 물결 위에 흰 백조가 고요히 떠온다. 그 얼마나 고고(孤高)하고 순백(純白)하며 평화로운 모습인가?
이러한 모습의 백조는 이 작품에서 어떤 드높은 순결(純潔)과 평화의 경지(境地)를 상징(象徵)한다. 그것이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간절(懇切)한 소망이다. 현실의 어려운 굽이와 모퉁이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런 세계를 찾아 떠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와 같은 경지를 소망하여 잠시 황홀(恍惚)한 도취(陶醉)의 상태에 잠겨보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명시 감상 (3)
꽃 -김춘수(金春洙):1922-200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작가소개 및 작품 감상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여 경기중학과 일본의 니혼대학의 예술과 3년을 수료하였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와 마산대학과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제 1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계속 문단에 주목을 받아 1958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상>을, 그리고 다음 해에는 <자유아세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인은 독특한 그의 시론(무의미 시론)을 전개하여 한국 시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1960년대의 소위 <순수(純粹)‒참여(參與)>의 대립(對立)에서 순수시(純粹詩)를 지켜온 시인이다.
그의 작품 경향(傾向)은 대체로 순수와 객관(客觀)을 지향(指向)하는 것으로 보이며, 관념(觀念)의 사물화(事物化) 혹은 언어의 절대화(絶對化)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조금은 난해(難解)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극도(極度)로 절제(節制)된 언어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緊張感)은 우리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認識)으로 인도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놓치고 있는 존재(存在)의 지평(地平)을 열어 보여 주고 있다.
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시화집 <날개>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을 시작했으며, 대구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溫室)'외 1편을 발표하였고 첫 시집 <구름과 장미>가 발행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이어 시 <산악(山嶽)>, <사(四)>,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 문단(文壇)의 주목(注目)을 받았으며 이후 에는 주로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현대시학> 등에서 창작활동과 평론활동(評論活動)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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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의 <꽃>은 얼핏 보기에 아주 감상적(感傷的)인 연애시(戀愛詩)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는 ‘나’라는 고독한 실존이 불안 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요, 절절(切切)한 외침이다. 단순한 산문체(散文體)의 시 같으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 난해시(難解詩)이다. '꽃의 존재'의 의미를 조명(照明)하고 그 정체(正體)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진 이 시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임을 형상화(形象化)하고 있다. 꽃으로 대표되는 사물 속에 담고 있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 곧 꽃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관계는 인식(認識)의 주체(主體)와 인식의 대상(對象)의 관계이다. 시적 대상인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 다시 말해서 내가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 즉 다가가고 싶지만 쉽사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즉 '나'는 '너'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드러내지를 않는다.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本質)이 영원히 우리의 인식 저편에 불가지(不可知)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의 제 1연과 2연에서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니까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아직 나의 시야(視野)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를 찾고 있었고 그 찾는 행위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며, 그러한 ‘이름 부름[命名行爲]’을 통해서 그는 ‘꽃’이 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언어라는 빛'을 부어 줌으로써 그 때까지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내가 부른 것은 그의 '이름'이고 이때의 ‘이름’은 그 대상에 대한 규정(規定)이며,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개별성(個別性)의 부여(賦與)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나무'도 아니고 '새'도 아닌 ‘꽃’이라는 존재의 성격이며, 그 주체를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하여 나타내 보여 주는 바의 그것이다. 따라서 아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은 막연한 것, 즉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꽃은 코스모스나 봉숭아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내가 이름 부르기 전에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다만 막연한 몸짓이었지만 이제 이름을 부른 후에는 그는 어떤 것 즉 꽃이라는 존재자로 내 앞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나에게 꽃이라는 존재의 표상이다. 즉 그는 이제 막연한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는 하나의 ‘의미’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 없는 몸짓인 ‘그’를 불러 꽃이 되게 한 ‘나’는 무엇인가? 이 시의 3연과 4연은 ‘나’와 ‘그’와 ‘너’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나’는 아직 무규정(無規定)의 존재자(存在者)이다. ‘나’가 어떤 안정된 존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서 그가 꽃이 된 것처럼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아직 무엇이라고 이름 할 수 없는 ‘나’는 그러므로 쓸쓸하고 고독한 하나의 불안스런 존재이다. 실존철학에서는 이러한 불안이 내가 나를 각성(覺醒)해 가는 실존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실존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월(超越)하려고 한다. 그러한 ‘나’는 바로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이러한 불안한 세계의 무규정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제 4연에서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며 그 ‘무엇’ 이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 ‘눈짓’이란 우리의 존재의 확인, 즉 우리들의 실존의 근거에 대한 확인이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우선 보는 사람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물(세계)과 만날 때 그것을 시로 표현한다. 우리의 앞에는 언제나 사물이 펼쳐져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진정한 실상(實像)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태도나 방식은 어떤 선입견(先入見)이나 통념(通念)에 의해 왜곡(歪曲)되어 있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도 우리는 그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목수로서 또는 목재 상인이나 식물학자로서 보기 때문에 각기 다르게 생각하며 그 나무를 자기 나름대로 유용하게 쓸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무는 참다운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집 짓는 재료' 혹은 '돈 버는 자원' 또는 '식물학적인 대상'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 그 자체를 참되게 보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버리고 순수(純粹)한 시선(視線)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빛이라는 밝음 속에서 노출되어야 한다.
이때 그러한 밝은 빛을 비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사물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 속에 드러낸다는 일이 된다. 시인은 사물을 보는 사람이므로 그는 사물을 언어의 밝음 속에 불러내어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언어로 불러낸다는 것은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이름 지어 규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시인 김춘수는 한국시에 철학적인 사유(思惟: 어떤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등을 행하는 이성적 작용이며 인간은 이것에 의하여 논리적인 대상을 인식하거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음)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시의 영역(領域)을 넓힌 시인이다. 아름다운 서정시와 전위적(前衛的)인 실험시(實驗詩), 사회비판적인 참여시(參與詩)는 김춘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를 통해 하나의 '사유'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김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 (廢墟)위에서 개인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해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옮겨간다. 이 모든 질문은 ‘언어’의 문제로 귀결(歸結)이 된다.
유랑아제-펴뮤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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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시 한수를 읽으며 바쁜 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서 여유를 즐겨 봅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바닷가에 서 있는 여인이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