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1 모현동 혜봉원 방문
자유인 조동화는 친구 이원홍 달려라지평선자전거동호회장과 모현동의 혜봉원을 관리하는 친구 하태병을 만나고자 방문하였다.
친구 하태병은 학창시절 펜싱선수로 이름을 날리었으며, 군생활은 ROTC학사 장교로 복무 중위로 제대하였다.
친구 하태병이 혜봉원 관리인을 하는 연유는 부친 하규호님께서 혜봉원을 중창하여 설립, 승려로서 이름을 날이었다.
친구 하태병의 형님께서도 혜봉원 옆 2층집에 살면서 혜봉원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혜봉원의 유래를 살펴보면 대한불교 화엄종 종단의 사찰로 조선 인조 때의 승려 연화당을 추모하기 위해 고종 31년 1894년 제자들이 건립했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삼곤사(三坤寺)였다. 이후 운영 유지가 어려워진 이 절을 1955년 금산사의 초대주지 하규호(친구 하태병의 선친)가 인수하여 절을 중창(重創)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서 혜봉정사(慧峰精舍)라고 개칭하였고 1956년 11월 5일 혜봉원(慧峰院)이라 이름 지었다.
혜봉원에는 친구 하태병의 선친 하규호주지의 부도가 혜봉원 안에 있다.
혜봉원은 문화재로서 친구 태병의 형제들이 잘 관리하여 보존했으면 바람이다.
혜봉원의 문화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혜봉원 목조보살입상
●모현동 부도
●오층석탑
●부도밭에 혜봉원 사적비
●불이정사(대웅전)
●소법당
●요사채
●우화루
●해탈문
모현동 도심속 혜봉원에서 이원홍 하태병 조동화 3인이 태병친구 방에서 가보로 간직한 앰프로 옛날 레코드판으로 음악감상을 하며 추억을 나누었다.
또한 DVD영상도 대형TV로 감상했는데 화면도 좋고 소리도 웅장하여 감개무량했도다.
이원홍과 조동화를 친구 태병이가 혜봉원으로 불러주어 곶감을 내 놓아 맛있게 잘 먹었네.
곶감을 먹고 있을 때 방문을 녹크하고 찾아온 사람이 태병친구 바로 아래 친동생이라 했는데 헤봉원 넓은부지 안에 산다했으며 키가 솔찬히 크고 예의 바르고 인상이 잘 생겼드라.
친구 원홍아 오랜만에 만난 태병친구가 나이가 안들어 보이고 동안이드라.
태병친구집 혜봉원에서 뜻깊은 시간이었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시지 말고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하고 건강관리 잘 하세.
태병친구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고 혜봉원에 불자들이 많이 찾아오기를 빌어봅니다.
감사.................
☞불이정사(不二精舍)는 일반사찰의 대웅전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모현동에 있는 혜봉원의 법당 이름입니다.
혜봉원은 대한불교화엄종 소속 사찰로, 이 법당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90호인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익산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益山 慧峰院 木造釋迦如來三尊像)은 모현동 혜봉원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목조석가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이다. 200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좌상은 높이 76㎝, 목조보살좌상은 높이 75㎝이다.
여래좌상과 보살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은 백지묵서(白紙墨書)로, 이에 따르면 1712년 전북 변산(邊山) 개암산(開岩山) 도솔암(兜率菴)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각승 초오(楚悟)와 신옥(信玉)이 이 석가여래삼존상을 제작한 것이다.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76㎝인 중형 불상으로, 상체를 곧게 세우고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밀고 있다. 머리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와 뾰족한 나발(螺髮)이 표현되어 있고, 머리 중앙에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길고, 일자형의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띤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지만, 개금이 두꺼워 잘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大衣)자락은 목에서 가슴까지 U자형으로 늘어져 있고, 그 옆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지 않았지만, 배 부분에 반대쪽 대의자락과 접힌 부분을 표현하였다. 하반신에 늘어진 대의자락은 배에서 좌우로 몇 가닥 펼쳐졌다. 불상 뒷면에는 목둘레에 대의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는 짧게 소매 자락이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이 연판형으로 접혀 있다. 무릎 위에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목조보살좌상은 높이가 75㎝로 중형으로, 높고 커다란 보관(寶冠)에 연화문과 화염문 등이 장식되었다. 목조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보살상의 신체 비율과 착의법을 하고 있는데, 각진 방형의 얼굴에 눈은 가늘게 뜨고, 코는 높고 가늘며,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보살상의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표현은 석가불과 차이가 많이 난다. 보살상은 본존에 비해 어깨가 당당하고, 오른쪽에 걸친 대의자락이나 하반신의 처리 등이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색난이 만든 불상과 양식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치켜들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무릎 위에 올렸다.
혜봉원 석가여래삼존상은 가운데 석가모니불과 좌측 보현보살 불교에서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며, 우측 문수보살은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잃어버려 근래에 새로 제작한것이다.
삼존상(三尊像)은 불교에서 부처와 양쪽에 보살을 배치한 불상을 말합니다.
삼존불 속의 보살은 부처를 도와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삼존상은 불교에서 받들어 모셔야 할 세 분의 존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받들어 모셔야 할 세 분의 존귀한 사람 즉 부처와 양옆에 두 보살이 나란히 있는 불상을 "삼존불"이라고 한다.
절(寺)이란?
절(寺)은 불교의 건축물로, 승려가 상주하며 불상을 모시고 불자들이 종교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곳을 말한다. 사찰(寺刹), 사원(寺院)이라고도 하며, 드물게 정사(精舍)라고 하기도 한다.
죽림정사(竹林精寺)가 최초의 절인데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기거하며
수행하고 설법하던 장소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절은, 부처님이 탄생하고 성불하고 설법하고 열반을 보이신 곳이
곧 절이라 할 수 있으며 부처님께 예경을 드릴 수 있는 곳,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곳 모두가 절이다.
따라서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이 상주하는 곳,
즉 삼보가 있는 공간이면 들판이나 산 속, 어느 곳이나 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절에 대한 다양한 명칭들이 통용되고 있다.
앞에 고유명사를 붙여서 `사(寺)' `암(庵)' `정사(精舍)' `총림(叢林)' 등의 명칭을 쓰는 경우가 그것이다.
오늘날 절의 명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寺)'는 원래 중국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중국에 불교를 전한 서역 스님을 외국인을 접대하는 홍려사(鴻臚寺)에서 접견했기 때문에
스님이 머무는 곳을 자연스럽게 `사(寺)'라 부르게 됐으며
`암(庵)'은 일반적으로 혼자 수행에 힘쓰는 조그만 절을 의미한다.
`정사(精舍)'는 절을 가르키는 범어 `아란야'나 `승가람' 등을 한역 한 것이다.
총림(叢林)은 숲처럼 많은 스님들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하는데
보통 선원 (禪院)과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 3원을 갖춘 곳을 말한다.
그러나 종합수도원으로서의 격을 말할 뿐 절의 명칭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백팔번뇌(百八煩惱)
百 일백 백, 힘쓸 맥
八 여덟 팔
煩 번거로울 번
惱 번뇌할 뇌
불교(佛敎)에서 나온 말로 인간(人間)의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에 걸친 108가지의 번뇌(煩惱), 즉 사람의 마음속에 엄청난 번뇌를 이름.
인간이 지닌 108가지의 번뇌. 6근(根)에 각기 고(苦)·락(樂)·불고 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이에 탐(貪)·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과거·현재·미래로 각각 풀면 108가지가 됨.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엄청난 번뇌를 말함.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108가지 번뇌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중생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의 세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또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관련이 되어 6x3=18에 다시 18을 더해서 36이 된다. 거기에 36개의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기 때문에 36x3=108이 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늘 느끼게 되는 108가지의 느낌을 의미한다.
실제 인간의 번뇌가 108가지라기보다는 그만큼 많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 불교에서는 108개의 알로 염주를 만들어 돌리면서 삼보를 생각하면 108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하며 혹은 본래적 자신의 마음인 일심의 회복을 강조하기도 한다. 비단 염주 뿐만 아니라 종종 절에서 행하는 특수한 기도법인 '108배' 또한 바로 이 108가지 번뇌를 순환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기도라는게 은근히 고통스러운 행위이고 따라서 108개의 번뇌를 해소하려면 기도를 108번 올려서 그 고통으로 108개의 번뇌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상쇄한다.[1] 뭐 이런 개념으로 보면 된다.
===나무위키===
만족
세상에는 자기의 욕심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주 적고 욕심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그저 욕심을 채우려고 애쓰다가 목숨을 마치는 사람이 많다.
설사 하늘에서 보물이 비처럼 쏟아지더라도 욕심 많은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른다.
자기 집 창고에 황금이 태산처럼 쌓였다 한들 욕심 많은 사람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 사주경(四洲經) – 욕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만족이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잘 곳이 있다면 최소한의 소유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바로 그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다.
사실 최소한의 소유만 보장이 된다면 누구에게나 행복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최소한의 의식주의 해결, 그 이상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불행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사실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사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몫은 보다 많이 벌고 쌓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소유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위한 나눔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죽을 때 까지 욕심을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기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은 설사 하늘에서 보물을 비로 뿌려 주더라도, 창고에 황금이 태산처럼 쌓였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또 다른 욕심을 채우면서 죽어 갈 것이다.
이 말이 다른 미련한 사람들 이야기 같겠지만 사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이런 욕심충족의 삶을 끝장내고 만족과 청빈의 삶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남은 생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 것이다.
참된 부자는 욕심을 많이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욕심을 많이 놓아버린 사람이며, 소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만족이 많은 사람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설사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하더라도 흡족하지 않지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사실은 부유하다.
만족함을 아는 것, 지족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요, 인류를 살아 온 모든 성인들의 어진 벗이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