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납 통행료
뜬금없이 납부 고지서가 날아왔다. 도로 공사에서 보내온 고속도로 미납 통행료다. 요금소를 지날 때마다 요금을 정산하는 번거로움을 덜고 빠르게 다니려고 하이패스를 설치한 지 오래다. 하이패스 차로에서 속도를 늦춰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편리함에 익숙해질 무렵, 처음 받아 든 고지서가 영 낯설다. 봉투를 뜯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다. 얼마 전 주말 저녁이었다. 서울에서 나들목을 들어설 때만 해도 해가 남아 있어 하이패스 차로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나 유성 나들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차로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앞차를 따라 출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때 하이패스 차로를 벗어났던 모양이다. 실수는 예고 없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고의가 아닌 실수라 해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불현듯 실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람을 무조건 믿은 탓이 크다. 한때, 일을 빠르게 처리해 볼 심산으로 직원의 말에 따라 일사천리로 처리했던 적 있다. 사실 관리자로서 일하다 보면 직원보다 잘 모르거나 낯선 분야가 부지기수다. 따라서 그러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당시 담당자의 말을 듣고 건물 임대차 계약에 서명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그의 권리 분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건설회사가 부도나면서 수억 원의 계약금을 날린 뒤였다. 나름 일을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해 보고 싶었으나 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믿음은 책임으로 돌아왔다. 여러 궁리를 해 보았으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더구나 언론에서 냅다 떠들어 대어 감사기관에서 특별감사가 나와 곤욕을 치렀다. 감사 결과 내게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 업무상 관리 소홀에 따른 징계는 물론 구상권까지 청구되었다. 직접 저지른 잘못은 아니었지만, 내 이름 석 자를 적은 서명에는 그만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한번 어긋난 일을 계속하여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일로 인하여 내 이름에 주홍 글씨가 새겨져서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 수없이 빛과 어둠을 넘나드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선친께서 귀가 얇다고 걱정하면서‘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고 한 말이 뒤늦게 귀에 들어왔다. 다만 그 일을 통해 믿음은 일을 맡길 수 있게 해주지만, 책임까지 대신 져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지서 한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돌아본다. 하이패스는 통행료를 대신 낼 뿐, 내 책임까지 대신해 주진 않는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믿음이 흔들릴 때 필요한 것은 상대를 탓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는 빠르고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있다. 하이패스나 내비게이션을 믿고, 사람을 믿고 맡긴다. 믿음은 편리하지만, 책임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니 가끔 속도를 늦추고 옆도 뒤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지 싶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 <미납 통행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작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