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림들 간의 당쟁은 禮訟(유교적 예절에 대한 송사) 논쟁을 거치면서 극단으로 치달아 체제가 붕괴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이러자 숙종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皇極蕩平論' 이 나오기도 했고,왕권을 중심
으로 붕당끼리 타협을 통한 탕평정치가 시도되기도 했다.여기서 '황극탕평론' 이란 천자인 황제의 파워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유학최고 경지인 中正의 道이자,大中至正의 道(大道)로 평정(평화) 정치를 한다'
는 이상론이다.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에도 시늉만 했던 이론이나 실행된 적은 없다.그러나 이씨 왕조의
기록에 의하면,영조 17년(1741)까지도 사림들의 붕당정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탕평정치로 王權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자 '蕩平黨' 이 생기게 되었고,또 이들이 파벌화 해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서 '외척세도
청치' 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아무튼 탕탕평평은 고유의 반도 조선사도 아니고,대륙 조선사도 아닌 송사
와 명사의 기록을 페러디해 조선사에 移記한 것이다.
2, 근본적으로 사색당파를 비롯해 사림들의 당쟁과 파당 대립이 심했던 곳은 척박한 지역이 아니라,먹거
리가 풍성하고 산물이 풍요로운 지역의 왕조 정치판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현실에서 보듯 아무곳 에서
나 당파와 당쟁은 생겨나지 않으며,변명하는 반대 이론과 주장 논리 역시 생겨나지 않는다.척박한 지역에
서는 우선먹고 살기가 급하기 때문에 '마적,산적,비적떼' 등이 더 난무한다.탕평정치시기는 사림정치 시기
에서 戚臣세도 정치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 할수가 있다.탕평은 영조(1724~1776)와 정조(1776~18
00)와 같은 현명한 군주를 만났을 때는 붕당간의 타협을 통해 '實學' 과 같은 학문을 일으키고 문예부흥도
할수 있었다.일시적 이지만 백성들을 위한 정치도 할수 있었다.그러나 정조의 사후,어리고 무능한 왕(순조)
이 등극하자 척신세도정치로 옮겨갈수 밖에 없었고,결국은 견제 세력없는 척신들의 부패로 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3, 경종과 영조의 초기까지도 정국을 좌우하던 '노론과 소론' 간의 뜨거운 '충역의리' 논쟁은 멈출 줄 몰랐
다.영조는 이러한 붕당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집권명분을 확립하기 위해 탕평책을시도했다.영조
는 노론의 지지로 국왕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노론만을 두둔했다가는 언제 어떤 참화를 당할지 알수 없는
판국이었다.이런 현실은 영조 4년(1728년)에 '李麟佐(영조를 반대한 소론)의 亂' 이 일어난 뒤에 더욱 탕평
책이 절실해 졌다.이때의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緩論:완론)를 중심으로 양당의 인사들을 고루 등용
하는가 하면,처벌 할때도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또한 소론 온건파의 손으로 '辛壬士禍' 의 노론인사들의
죄를 하나씩 풀어주게 함으로서,자신이 국왕에 오른 명분을 합리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영조원년
(1725)에 '辛壬옥사(1721~1722)' 를 조작된 사건이라고 규정한 조치로 부터 많은 사건들에 완화조치를
내렸다.
4, 이를 위해 영조는 치세 전반기에는 소론 탕평을 실시했고,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노론탕평을 실시해 노론
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키는 데는 어느정도 성공은 했으나,새로운
'탕평당을 키워 그들이 외척권신' 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18세기 이후 지방세력의 중앙정계 진출이 사
실상 봉쇄된 상황에서 형성된 '京華閥閱(남경과 강동의 華州<江華>지역의 사림 가문)' 들이 탕평정국 하에
서 왕권의 보호자를 자처했다.결국 왕이 경기와 강남 귀족들의 보호를 받음으로서,후에 왕권이 '閥閱' 들에
매몰되어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영조는 궁궐을 수비하는 禁軍을 '龍虎營' 으로 승격시켜 병조판서에 직속시
켰고 도성의 수비체제를 강화해 왕권을 튼튼히 하는 군권을 확립했다.영조는 성군의 자질을 과시하기 위해
유교경전 연구에 관심과 열의를 보였으며,均役法등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해 왕권을 강화했다.
5, 영조 25년(1749년) 정월 56세라는 나이에 15살의 세자에게 '인사,형정,군정' 에 관한 업무를 제외하고 일체
의 정무를 세자에게 맡겼다.이는 영조가 노론이 주장한 '辛壬義理' 를 '國是' 로 밝힘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변명
하고 탕평을 완수해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영조 32년(1756)에 노론인 '송시열과 송준길' 을,
영조 40년(1764)에 소론인 '朴世采' 를 성균관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서 마침내 완결되었다고 볼수있다.그 와중
에 영조 38년(1762년)윤 5월 세자(思悼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하는 사건(壬午禍變)이 발생했다.세자는 영
조의 위압에 눌려 홧병이 심했고,이로 인해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그의 행적 때문에 죽었다고 보기
는 어렵다.세자의 직접적인 죽음 원인은 노론의 집정기에 '세자 주변에 소론계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는
이유가 산정된다.영조의 '임오화변' 은 정조때 중요한 정국변수가 된어,사도세자를 동정하는 '時派' 와 동정하지
않은 '僻派' 간의 대립이 가시화 되었고,정조는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데 그의 재임기간을 다보냈다.특
히 영조가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도록 못을박아 놓았기 때문에 신원회복이 어려웠다.
6, 정조(1776~1800)는 세손으로 있을때 부터 영조의 두번째 왕비(정순왕후)의 오빠인 金漢耉(김한구),동생인
金龜柱 등 벽파의 계략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이들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했다.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인 '洪麟漢' 조차 세손(정조)을 모해하려 했다.정조는 영조 51년(1775) 12월에 세손
으로 대리청정을 맡았다가 2달 후에 왕위에 올랐다.그는 신변의 위협 때문에 세손때부터 '세자시강원 說書'로
서 그를 보호하던 洪國榮을 왕의 비서인 승지로 발탁했다.그로 하여금 '수어사,총융사,금위대장,宿衛所' 의 책
임을 모두 맡게해 경호를 튼튼히 하고 규장각을 설치해 개혁세력들을 불러 모았다.바로 이때부터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홍국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이(원빈 홍씨)를 정조에게 바쳤다.그러나
원빈이 소생없이 죽자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고,그때문에 정조 3년(1779) 9월에 축출 되었다.그런후 정조는
소론의 時派인 徐命善을 중용해,소론과 노론의 탕평책을 실시 했다.그리고 '蔡濟恭,李家煥,丁若鏞' 등 '기호남
인(남경과 장강 일대의 남쪽지방 남인들)' 세력들을 끌어들여 '노론,소론,남인 3黨' 의 연립정권을 세웠다.
7, 바로 이때가 반도가 아닌 대륙의 남방지역과 장강및 호남지방에 카토릭(천주교)이 들어와 서양의 실학이자
실용주의를 퍼뜨리고 있던 시기다.여기서 실용주의 학파들인 '이가환,정약용' 남인 집안사람들이 서학의 실용
주의및 천주교와 연결된다.이러한 실학의 대두는 삶의 실용과 무관하게 노론의 반대가 심하여 좌초되기 일수
였다.여기에 정조는 노론을 무마하기 위해 효종의 능이 있는 여주에 '大老祠' 를 지어주고 그 비문을 손수 쓰는
가 하면,송시열의 개인문집 을 '宋子大典' 이라고 추켜올려 붙여주는 아부도 했다.이는 송시열을 '주자대전' 의
주자의 반열로 올려주는 효과를 노렸다.정조 5년(1781)에 규장각에 문신들을 끌어모아 중요한 실학 서책들을
베끼게 한후 소장케 하고 8년(1784년) 9월 에는 사도세자를 '莊獻세자' 로 추존하고 이날을 기념해 과거시험까
지 치룬다.사도세자의 무덤인 '顯隆園' 을 수원으로 이장하고,수원을 '華城(장강의 江浦,강동의 중간지점의
江都<華城>)' 으로 승격시켜 유수를 두었으며,수원에 성을쌓아 규모를 확대했다.정조 20년(1796년)화성이
완공된 이후 정조는 그곳에 번번히 행차하게 되었다.이에 노론은 정조가 장차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고 친위
쿠테타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8, 정조는 시대가 변한 것을 모르는 유교 관념세력들에게 '山林無用論' 을 내세워 노론의 이념적 기초를 무너뜨
리는가 하면, '君主道統論'을 내세워 자기의 말에 거스르는 사람을 엄격히 통제했다.군주도통론은 이미 송과 명
나라 시대에 '천자도통론,황제도통론' 으로 회자된바 있다.그리고 정조는 정쟁보다는 실학의 실용주의에 기초하
여 개혁정치에 뜻을 두어 서얼들의 벼슬길을 열어주고,품팔이를 하는 하층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雇工法' 을 제
정 했으며,노비제 혁파의 틀도 마련했다고 역사서는 쓰나,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서인과 노론 양반들의 횡포로
실행된적은 없다.또한 어용상인들의 상업 독점권을 제한하고 일반 평민들의 상행위를 보장해 주었다.이또한 이
또한 실천되기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정조는 재위 24년(1800) 5월 말일에 교서를 발표했는데,교서 내용은 노론
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내용이었다.그러나 그일이 있은지 12일 만에 정조
는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왕이 죽은후 종친부에서 묘호를 '英祖나 正祖 또는 肅宗이나 孝宗' 으로 정하는
묘호 규정은 정삭과 년호를 제정해 제후국에 반포하는 황제국의 황제는 해당되나,제후국은 해당이 않된다.따라
서 영조나 정조가 '敎書나 敎旨' 를 내렸다는 기록은 황제가 했다는 뜻이며,반도가 아닌 대륙조선국 황제의 '교서
,교지,묘호' 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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