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김영삼이기에 가능했던 하나회 숙청 작전
1993년 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김영삼의 당선은 3당 합당의 결과였다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는 끝났지만 하나회는 여전히 건재했다
하나회는 안심했다
“지가 누구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우리를 어쩌겠어?”
노태우 퇴임 1년 전, 노태우가 임명한 주요 군장성은 다음과 같았다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영 육참총장, 조남풍 1군 사령관(8월 임명), 김연각 2군사령관,
구창회 3군 사령관, 김동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김진선 육참차장, 서완수
기무사령관, 안병호 수방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
모두 하나회이거나 노태우의 측근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취임 전부터 하나회를 제거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권영해 당시 국방차관은 김영삼이 국방장관으로 염두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권영해는 김영삼이 취임 전, “하나회를 제거해야합니다”고 간청해왔다.
권영해는 비 하나회 출신이었다.
김영삼은 비밀리에 하나회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의 작전은 소수의 인원만이 알고 있어야 했다.
청와대에서도 김영삼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들로 비밀 TF를 만들었다.
하나회를 대놓고 치는건 위험했다. 그들은 군대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3의 쿠테타가 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한번 서울의 봄이 없어질 수 있었다. 김영삼은 하나회를 속였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하나회의 수장인 김진영 육군 참모 총장의 친구였다.
박관용은 김영삼에게 “하나회를 제거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라고 말했고
김영삼은 ”그냥 입다물고 있어라“ 라고 말했다.
하나회는 생각했다. “김영삼은 하나회를 두려워하고 아무것도 못할거다”
하나회는 만족스러웠다. 1993년 3월 3일 김영삼은 육해공 3성 장군 이상이
모인 보고 회의에서 군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나회는 안심했다.
하나회 숙청이 일어나기 5일 전의 일이었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육사 49기 졸업식에 참석한 김영삼은 위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하나회 숙청이 일어나기 3일 전의 일이었다.
3월 8일. 김영삼은 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군인들은 그만둘때 사표를 냅니까?” 김영삼이 물었다. “군대에서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있습니다”
권영해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라모 됐구마는“ 김영삼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꿀라캅니다.”
김영삼은 그 자리에서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해임했다.
김영삼은 4시간 후 비 하나회 출신으로 빈 자리를 채웠다
두 사람은 모두 전두환계였다. 김진영은 물러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물러났으니 이제 쿠테타 위험은 없다“ 섬뜩한 말이었다.
그렇게 3월 8일, 7개의 별이 떨어졌다.
김영삼이 취임하고 불과 11일만의 일이었다.
놀랬제? 다음날 김영삼은 특유의 말투로 참모들과 만났다.
참모들은 물론이고 하나회, 언론, 국민들도 충격받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여유로웠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회는 완전히 정신을 차린게 아니었다 “둘 다 전두환계잖아? 우린 괜찮겠지“
노태우계인 하나회는 김영삼이 단지 전두환계를 날렸다고 믿었다. 오히려 ROTC계를
날리기 위한 빌드업으로 봤다.
4월 2일.
군장성 회의가 있었는데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이 불참했다.
회의 시작 1시간이 지나서야 둘이 경질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 사람은 노태우계의 리더였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권영해 장관도 전날에 알았을만큼 극비의 내용이었다.
육군참모총장,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하나회는 이렇게 4개의 보직을 잃었다.
웃긴건 김형선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야"
라며 사령부 헬기장에서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병호도 미래를 예상하고
YS 측근들에게 줄을 서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2차 숙청까지 총 13개의 별이 내려왔다. 이제 쿠테타의 위험은 없어졌다.
수방사와 특전사가 날라간 4월 2일 백승도 교육사 지원처장이 군인 아파트에 하나회
명단을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 하나회 군인들은 이 명단을 보고 경악했다.순식간에
군 전체에 명단이 퍼졌고 하나회가 다 해먹고 있었다는 사실든 비 하나회 군인들을
분노케 했다.군내부에서 하나회를 용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4월 8일. 3차 숙청이 일어났다.
2군사령관 김연각(17기) 대장과 3군 사령관 구창회(18기) 대장이 인사 조치로
인해 전역 처리 되었다. 이제까지 21개의 별이 떨어졌다. 일주일 후인 4월 15일. 4차
숙청이 있었다. 군단장과 사단장 라인의 교체였다.이제 셀수도 없는 별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김영삼이 처음부터 하나회를 완전히 학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수장급 정도를 손보는 것이 주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권영해 장관과 김동진 육군
참모총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회에게 당한게 많았다.
그런데... 하나회 출신인 이충석 합참작전부장이 사고를 치고 만다.
7월 9일.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기념 회식 자리에서 이충석은 급흥분해서 이런 말을 한다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 이충석의 말은 청와대까지 들어간다
청와대와 이양호 합참의장은 분노했고 하나회 대숙청이 다시 시작된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전설로 남은 말을 남긴 김영삼 사고를 친 이충석은 바로
전역처리되었고 장성급 하나회 회원들도 모두 모가지가 날라갔다.
다음으로 영관급이 날라가거나 주요 보직에서 제외되었댜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은
94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하나회가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 비
하나회 출신 군인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임명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권력과 특권은 누릴 수 없었다.
웃긴건 96년 김영삼은 김진영을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려 했었다. 하지만 당시 12.12
쿠테타를 다룬 다큐에서 김진영이 너무 안 좋게 그려져서 영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훗날 김영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회를 숙청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하나회 청산은 김영삼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인사교체만 한것 같지만 김영삼도 목숨을 걸고 하나회의 목을 날렸다.
그의 말대로 또다른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김영삼이 그때 하나회를 제거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군대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가져도 경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2의 전두환, 노태우가 언제든지 나올수 있었다.
김영삼이 그때 하나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군대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가져도 경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2의 전두환, 노태우가 언제든지 나올수 있었다.
서울의 봄 12 12 군사 쿠테타 주역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