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신면 왕고개를 넘어 도착한 왕온의 묘... (물론 왕고개, 왕무덤재라는 이름도 왕온묘와 관련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숙연해진다
묘지로 올라가는 길... 한 백여미터 되나?? 숨이 차다. 1271년 고려후기 그당시 피비린내가 천지를 가득했을 그 와중에도 우리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높은곳까지 왕온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다니 우리 백성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
"왕을 칭하였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왕으로 추증되지 못한 자의 무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백골이 진토되어 넋 또한 오래전에 사라진 죽은 왕이여, 살아생전의 한을 씻으시라. 그대를 기억하는 자들이 진도에 있고,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하는 객도 있으니. 나는 그대를 영원히 삼별초의 왕으로 기억하리라"
진도 읍내쪽에 진도의 동쪽 근처에 있는 근세의 화가들이 대를 이어 배출된 운림산방으로 가는 도중에 "왕온의 묘"가 있었다. 왕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용장산성 기념관에서 용장산성에 대한 내력을 20분 안내 동영상에서 알았다. 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만해도 삼별초는 알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누군가 중심인물이 었었겠지만 그사람이 누구인줄은 정확히는 몰랐었다. 더구나 그에 대한 최후의 역사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는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자 삼별초군은 고려 왕씨중에 종친으로 원나라와 싸울만한 기상이 있는 인물인 왕온을 원종대신 왕으로 옹립하였고, 왕온은 삼별초군과 함께 싸우다가 용장산성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가 패퇴하아 당시궁궐이었던 용장산성이 불타자 정거름재길을 지나 운림산방 못미쳐서 몽고군과 조우하여 여기서 왕온이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 한밤중에 왕온의 시신을 몰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묻었다고한다
역사의 기록은 이긴자의 것이기에 패한자는 그나마 이런 흔적이라도 남은 것도 대단한 호사요 영광이다. 그가 만일 삼별초군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한사람의 왕족으로 편안한 삶을 살던지, 아니면 삼별초군과 함께 군인의 한사람으로 싸우다 죽었다면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별초군은 고려 원종이 이끄는 정부군과 원나라 기마병에 패하여 진도 남쪽에서 급하게 배를 타고 추자도를 거쳐 제주로 또 다시 피난정부를 차렸으니 그 기상이 끈질기다 해야할지 가련하다 해야할지 역사를 뒤쫓는 나그네는 심정이 묘하기 그지 없었다.
국가의 융성과 백성의 삶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왕과 그 왕의 주변에서 권력을 잡은 자들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도 모자라 권력을 잡은자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서로가 다툼하는 사이에 국가는 쇠약해지고, 내부에서는 화합대신 암투와 모함이 판을 친다. 그러니 외적이 처들어와도 그에 대한 대처는 하지 못하고, 그 틈에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자신의나라를 침공한 외적에 빌붙어서 그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었으니, 인간의 헛된 욕심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리 원나라에 충성하면서 고려인을 종부리듯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부원배라 부르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의 귀족출신의 기철이 바로 그 인물이다
기철같은 인물은 비유하자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매국노들이고 지금도 그런 인물들이 보이는것이 한스럽다
<<왕온의 길을 예상해보면>> 1 강화도에서 삼별초와 같이 출발 2 진도의 용장산성에 대궐을 짓고 3 오랑국왕으로 추대 4 정부군과 3년간 싸우다 5 여몽연합군에게 패퇴 6 정거름재 유래 ㅡ피신한던 왕온이 잠시 정거(정지)했다해서 정거름재가 되다 7 정거름재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가다가 운림산방쪽에서 몽고군과 만나 싸우다 사망(아마 제주도 쪽 배를 타기위해서 간것으로 추정..,) 8 이근방 사람들이 왕온이 사망하자 왕고개에다 시신을 몰래묻었는데 왕온의 묘옆에는 왕온의 말무덤도 같이 있음 9 왕온을 따르던 궁녀들은 왕고개를 더 지나서 피신하다가 궁녀둠벙에 몸은 던져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참고 삼별초의 지휘관들>> 강화도에서 처음 거병하여 배중손을 중심으로 해서 진도로 이동 • 배중손(裵仲孫) : 강화도에서 삼별초 봉기를 일으킨 장본인, 승화후 왕온(溫)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진도 용장산성에 삼별초 정부 수립 • 노영희(盧永禧) : 강화도에서 삼별초 봉기를 일으킬 때 배중손과 함께 합심한 인물 • 유존혁(劉存奕) : 강화도에서 배중손과 함께 했고, 진도 삼별초 정부에서 남해 지역에서 항몽활동을 전개, 진도 용장산성의 함락 뒤에는 8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제주도로 이동해 김통정과 합침 • 이신손(李信孫) : 강화도에서 배중손과 함께한 인물
진도가 함락된 이후 삼별초 무리는 제주도로 이동하게 됩니다. • 김통정(金通精) : 진도 삼별초의 용장산성 함락된 이후, 잔여 삼별초 무리를 이끌고, 제주로 이동, 삼별초의 대몽항쟁 진행 • 이문경(李文京) : 진도 삼별초 정부가 제주를 배후지로 확보하기 위해 파견, 제주에 상륙한 뒤 고려 개경 정부의 관군과 송담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 • 곽연수(郭延壽) : 이문경 부대의 소속, 삼별초군으로 송담천 전투에서 개경정부의 관군에 속한 진자화(陳子和)와 전투에서 전사
첫댓글 왕족인 왕온의 처참한 결과!!!!
이런 비극이 안생겨야 하는데..
자주정신은 기리어야할 중요한 정신세계!!!
정거름재에서 진짜 쉬다가 가서 정거름재가 되었을까?:?
민족의 자주정신은 기려얄듯...
슬픈 왕손 왕온 왕고개 지날때마 생각나게해요
문정권권 최항이 만전이라는 이름으로 진도에서 승려생활했다지요 이때부터 나중에 피신처 마련했다해요
바삐 가야하는디 가다가 힘들어서 왕온 일행이 정거했다는 정거름재!!! 쉬어갈 이무렵 불안했겠지만 잠시후 죽을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정거름재에서는 나중에 긍녀둠벙에 몸을 던진 궁녀들도 정거름재와 왕고개까지는 같이 있었을까?
자신이 택한길....
누굴 탓할까? 무서운 삼별초군대에 반강압적으로 오기도했겠지요??
궁녀둠벙도 가보세요 슬퍼요
이들의 한은 누가??
그들의 강인한 정신은 길이 남아요..
시대를 거스르다가.....
가고면 궁녀둠벙이 얕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