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김태련씨(71).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서울 동대문 지역을 무대로 조직 폭력배 생활을 한 그는 한국 건달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큰형님’으로 통한다. 서울 경동고를 나오고 서울상대를 졸업해 인텔리 깡패로 통했던 김씨가 낙화유수라고 불린 데에는 사연이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잘 배운 사람이 깡패의 길로 접어들자 친척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정치 깡패로 지목되어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처형된 이정재씨의 행동대장이기도 했던 김씨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 ‘보스 이정재’를 회고하며 그때 그 자리에 사재를 털어 사무실을 냈다. 서울 종로 4가의 귀금속 상가 골목에 자리한 아담한 2층집. 지난 3월18일 ‘대한연합상사’라는 간판을 내건 김씨의 사무실 개소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 하는 건달들이 몰려들어 ‘큰형님’의 새출발을 축하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동대문 사단’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냐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동대문 사단이란 자유당 시절 이정재씨가 이끌던 정치 깡패 집단을 말한다.
김태련씨와 그의 후배들은 동대문 사단 부활이라는 말에 손사래부터 쳤다. 김씨는 보스(이정재)와 자신의 추억이 묻힌 터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소박한 뜻으로 사무실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무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당 말기 활동했던 깡패 출신들이다.
당시 경찰과 자유당 실세들에 의해 각종 정치 행사에서 반대파를 제압하는 해결사로 동원되었던 이들의 운명을 가른 날은 1960년 4월18일, 4·19혁명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다. 경찰이 경무대 앞에서 발포하면서 비화한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이었다. 김태련씨는 당시 행동대장 격으로 고대생 시위대와 충돌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나간 건달 세월을 회고한다면?
후회는 없다. 다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우리 전철은 밟지 말아 달라는 뜻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일반 국민은 우리를 부랑아로 본다. 역대 최고 권력자들이 불러들여 애국심을 부추기며 이 일 저 일에 써먹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정권은 바뀔 때마다 우리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가뒀다.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잘못된 길로 빠진 젊은 건달들을 선도하고, 나이 들어 불쌍한 건달들을 돕자는 취지로 사무실을 냈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때 현장에 있었다는데.
그 날 오전 종로경찰서 김태홍 사찰계장이 3·15 선거 결과를 지지한다는 데모를 하라고 우리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종로 4가에 있던 경기도청 앞에 우리가 흰 장갑을 끼고 지지 데모를 하려고 모였는데, 시내에서 시위하다 안암동에 있는 학교로 되돌아가던 고대생 데모대와 맞닥뜨렸다. 깡패들이 벌인 3·15 선거 지지 시위는 경찰 지시로 계획된 일이었지만, 학생들과 충돌한 것은 사전 각본에 없었던 우발적 사건이다. 고대생들이 그때 반공청년단 사무실이 있던 종로 4가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우리 깡패들과 충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학생 3백여 명과 우리쪽 20명 정도가 충돌했다. 그때만 해도 청계천변에 벽돌이 많아서 닥치는 대로 휘둘렀던 것이지 사전에 무기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이정재씨가 사형당했는데.
이제야 밝히지만 이정재씨에게는 4·18 사건의 책임이 없다. 다른 쪽에서 뒤집어씌운 것이다. 자유당 말기에 당내 강경파는 이정재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반공청년당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임화수씨를 내세웠다. 4·18 깡패 동원은 임화수씨와 신도환씨가 주도했다. 이정재 회장은 그때 집에 있었다. 유지광씨도 현장에 없었다. 이정재·임화수 씨가 사형당한 것도 죽을 죄를 지어서라기보다는 당시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5·16 군부는 민심 수습용으로 자유당 곽영주, 민족일보 조용수, 정치 깡패 이정재·임화수 등을 끼워넣기 식으로 죽였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후 개인적으로는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습격이 아니라 우발적 충돌이다. 그 날은 도망갔지만 이튿날 4·19 데모가 확산되고 나서 동대문경찰서에 붙들려갔다가 자유당 곽영주가 풀어주라고 지시해 모두 풀려나왔다. 그뒤 이박사(이승만 대통령)가 하야한 직후 다시 잡혀 들어가 1년6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 내가 서울대 상대를 나온 덕을 많이 봤다. 나중에 처형된 이정재·임화수 씨랑 같이 미결수로 옥살이를 했는데 검찰과 재판부에 서울대 출신 동문이 많았다.
그 전에도 자유당 정치 집회에 동원되었는가?
1957년 장충단에서 민주당 조병옥 박사가 유세할 때 우리가 가서 집회를 방해했다. 정재선 자유당 선전부장이 우리를 불러 지시했는데, 그때는 야당 집회장에 가서 방해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 대가로 우리는 정부에서 밀가루 15만 부대를 받을 수 있는 티켓을 얻었다.
5·16 쿠데타 이후 풀려나와서도 정치 깡패 활동을 했는가?
5·16 직후에는 정치 깡패를 소탕한다면서 막 잡아들이는 바람에 한동안 활동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김종필씨가 우리를 불러 멋쟁이라고 격려해줬다. 이정재나 임화수가 사형된 것은 안된 일이라고 위로했다. 1965년 한일회담 때는 외무부장관이 나를 불러 협조를 부탁해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그 비밀 임무가 무엇이었는가?
한일회담을 반대해 국회에서 오물을 투척한 김두한 의원을 혼내주라는 지시였다. 김의원집 담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더니 가정부가 ‘의원님 없다’고 했는데, 어딘가에서 숨소리가 들려 뒤진 끝에 장롱문 뒤에 숨은 김두한 의원을 발견해 흠씬 두들겨패고 나왔다.
지금까지 사업을 해본 일이 있는가?
건달 조직 생활을 좋아해서 사업을 해본 적은 없다. 평생 깡패 인생을 걸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내가 호남 애들을 많이 거뒀다. 그래서 지금도 호남 건달들이 나를 좋아한다. 전국 어디를 가나 20대 건달들도 내 이름을 대면 다 안다. 내 아들 나이가 마흔이 넘었지만 요즘도 나는 젊은 건달들에게 ‘큰형님’ 소리를 들으며 산다.
고희를 넘긴 낙화유수 김태련씨는 평생 건달 외길을 걸었지만 슬하에 둔 1남2녀는 모두 반듯하게 성장했다. 아들은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한 제약회사에서 에이즈 백신 개발 연구팀장으로 근무하고, 두 사위는 국내에서 각각 의사와 무역회사 사장으로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말년을 세 손주의 재롱을 보며 지내기보다는 ‘영원한 큰형님’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