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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베소서 1:7-10
제목: “신앙생활” 하십니까?
일시: 2018. 1. 7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우리가 살아갈 때 "~로서“ 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어느 집안의 장남으로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런데 가만히 보면 ”믿는 사람“ 혹은 ”크리스챤“이라는 타이틀이 그 어떠한 이름보다 더 많이 강력하게 붙는 수식어이다. 신앙이 있는 남편, 믿음이 있는 부모, 예수 믿는 학생, 크리스챤 비즈니스맨, 더 넓게는 믿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다른 타이틀은 제한적으로 붙여질 수 있지만 믿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생활 전반에 걸쳐 늘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을 “신앙생활”한다고 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이자 올 한해의 표어는“신앙생활”하십니까? 이다. 우리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II.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먼저 뒷부분인 생활을 강조하고 싶다. 신앙은 있다고 하는데 생활은 영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지 안 그런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야기하는데 영 사랑의 모습이 없다. 헌신과 희생을 말하지만 조금도 양보하는 것 없이 손해 안보려고 한다. 감사를 말하면서도 언제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신앙은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어느 높은 한 산에서 변화된 주님의 모습과 함께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의 빛난 영광을 보고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신앙과 같다(마태복음 17장). 우리의 신앙은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산을 내려와 귀신들린 아이를 만나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경건” (야고보서1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건이란 성경책을 옆에 끼고 목소리를 거룩하게 낮추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팔을 걷어 부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삶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삶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하늘의 진리가 땅에 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것이 땅의 사람들로 이해되어질 수 있도록 땅의 눈높이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실 때는 “이처럼” 사랑하셨다. “이처럼”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거기 계시고 여기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할 것인데 이 땅에 우리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느끼고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웃 사랑에 대한 스토리이다. 주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랑의 가치와 사랑의 의미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신다. 질문하고 있는 사람은 이웃사랑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율법사였다. 그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맞았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거의 죽을 정도이다. 구원의 손길이 없는가? 처음 지나간 사람이 제사장이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이면 분명 이웃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씀도 많이 선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는 사랑이 표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은 레위인이다. 그들은 예배를 돕는 사람들이다. 그 역시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제사장과 같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잘 알고 있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그저 이론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돕지 않았다. 마지막에 지나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라. 무시받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수 있는 그는 오히려 강도맞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틑날 주막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한다. 사랑과 겸손과 용서와 진리의 말씀들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것들이 내 삶의 현장에 나오지 않으면 불완전한 것이다. 아직도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수도자는 누구인가? 두 명의 수도자가 있다. 그들이 함께 길을 가다가 냇가에 다다르게 된다. 물살이 제법 세다. 그들은 그 냇가를 건너기 위해 발을 걷어 붙었다. 그런데 한 쪽 편에서 한 아가씨가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때 한 수도자가 아가씨에게 다가가서는 “물살이 셉니다. 제게 업히시지요 제가 건너드리지요”라고 하면서 업고 건너 주었다. 모두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아가씨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져 가고 두 수도자는 계속 가던 길을 간다. 꽤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옆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한 수도자가 질문한다. “자네는 수도자이면서 어찌 그렇게 아가씨를 업어 건네줄 수 있는가? 유혹되지 않겠는가?” 이때 다른 수도자가 말을 한다. “나는 그 아가씨를 건너편 땅에 내려주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까지 업고 여기까지 왔구먼...” 재미있는 글이어서 늘 생각이 난다. 진정한 수도자는 수도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가씨를 업고 건네주면서도 끄떡없는 사람이 진정한 수도자이다. 모든 시련과 어려움과 유혹이 있는 곳에서도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자가 진정한 도통한 수도자이다. 실험실 수도자가 되는가? 무균실 수도자가 되는가? 온실 수도자가 되는가? 우리의 신앙은 생활의 현장인 삶속에서 드러나고 표현되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통제되고 규율이 엄격한 에어푸르트 아우구스투스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수도생활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결혼생활 속에서 경험한다. 결혼생활을 하게 된 루터는 “웬 결혼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서야”라고 한다. 수도원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결혼생활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욱 성숙한 수도사인 것이다. 은혜는 부흥회나 말씀성회에서 혹은 수련회장에서 혹은 오늘 주일과 같이 주일 예배에서 얻을 뿐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고 신앙은 모든 세팅이 갖추어져 있는 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속에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III. 신앙을 생활로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신앙이 우리 삶의 본질이요 궁극적인 종착역이 된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생활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우리의 삶은 아주 천박스러워질 것이다. 인생이 시시해져 버리고 무의미하고 무가가치하게 될 것이다. 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기에 신경을 더 많이 쓸 수 있다. 그렇게 멀리 나가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겉은 잘 꾸며져 있는데 속이 썩어가서는 안 된다. 겉은 회칠하여 깨끗한데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차서는 안된다. 외식이 아니요 내실이 있어야 한다.
신앙을 생활로 표현하고 생활 속에 믿는 모습이 보이는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다. 속과 겉이 같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 아이들을 보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들은 숨김이 없다. 그 전에 한 주일학교 아이가 텔레비전에 유재석이 나온 것을 보고 목사님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게 맞는 것이다. 강응복집사를 보고 뽀료르 같다고 한다. 세빈이가 그랬나? 그러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온갖 말로써 멋있다는 말이에요 좋다는 말이에요 친근하다는 말이에요라고 설명을 가하려고 해도 아이 눈에 그렇다면 해석이 필요없다. 속의 것이 그대로 나오는데. 아내를 할머니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가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앞머리가 희어서 그렇지 전혀 아니지요라고 해도 애 말이 맞는 것이다. 어른들은 있는대로 말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자꾸 교육을 받아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설문조사가 안된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를 다르게 한다. 어른들은 표정관리를 하기 때문에 속에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순수한 신앙이요 순수한 생활이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생활은 없고 신앙만 있거나 생활은 있는데 신앙이 없으면 이중생활을 하는 것이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러지 않았는가? 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드러난 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속과 겉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과 삶에 있어서 하나 되기를 바라셨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 구절은 에베소서 1장 10절의 말씀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과 땅은 어느 정도 차이인가? 하늘과 땅차이다. 그 경계선은 어느 정도인가?
철저한 분리이다. 하늘은 거룩하고 땅은 속되다. 하늘은 진리이고 땅은 거짓이다. 하늘은 의롭고 땅은 죄로 물들어 있다. 죽음의 성경적인 의미는 분리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고 나뉘어진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었기에 땅에 있는 우리는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된 것이다. 이제 땅의 것에 살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치하심으로 가치가 변했다. 삶이 변했다. 생활은 신앙으로 승화되어 삶의 어떠한 작은 일도 거룩하며 의미 있고 가치있는 일이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는 말씀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그 모든 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치심이 있고 tag가 붙어 있으면 우리의 인생은 명품인생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이 된 것이다.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침례의식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에 구분이 없다.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 거룩과 세속의 구분이 없다. 경계선의 갈등이 없다.
베를린 어느 교회 사모님은 트로트 복음가수 구자억목사님의 노래에 은혜를 받았다고 그런다.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하나님 인간이 되셔 이 땅에 오셨다고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하나님 날 위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이리저리 사방팔방 둘러봐도 어디가 이쁜 구석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그 목숨을 내 준단 말이여.“
그러면서 계속 그 가사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른다고 말한다. 트로트는 속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에 찬성할 수는 없고 해서 자꾸 가사가 복음적이고 은혜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못되게 이야기를 했다. ”사모님 가사에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곡에 은혜받으신 겁니다. 이미 그러한 내용은 함목사님이 늘 선포하시고 사모님도 이미 잘 아는데 단지 그것을 트로트로 부르니 은혜받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한 수 더 높은 것은 가사가 그렇지 않아도 은혜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칠갑산으로 은혜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지난 주에는 동행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예배순서 찬양 중 갑자기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를 했다. 해바라기의 노래이다. 유행가 가요이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까? 문제가 없다. 그 역시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주 약간은 좌절스럽게 하나 깨달은 것은 내가 알테만이라는 것이다.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IV. 우리는 오늘 신앙과 생활을 나누어서 보았다. 기계적으로 신앙만 하지 않고 생활도 한다. 기계적으로 생활만하지 않고 신앙도 한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이 그에 미치지 못할 때 “덕이 안된다”고 한다.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하면서 말이다. 또한 생활을 하면서 믿음으로 승화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증스럽다”고 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표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생활은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두 단어인 신앙과 생활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딱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늘과 같고 생활은 땅과 같다. 이 둘 사이가 분리가 되고 경계선이 있을 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과 땅, 신앙과 생활을 통일되게 만드셨다. 신앙만 해도 곤란하다. 생활만 해도 곤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앙과 생활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하십니까? 올 한해 우리의 삶이 균형 잡힌 삶이 되기를 바란다. 올 한해 우리의 삶의 영역이 하늘과 땅을 다 포괄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올 한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타치하심으로 신앙이 삶의 현장으로, 삶의 현장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드려질 산 제사가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