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10 설명절 신년메세지(이현래)
여러분 오늘은 우리 설날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얼굴 없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나는 얼굴을 내밀고 나는 신이 아니고 인간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을 지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에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전 세계 알립니다.” 이 방송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방송을 하겠습니까? “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창조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이제는 사탄이 틈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완전히 승리했다.”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예수와 살아계실 때, 우리는 아무도 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그 사람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어서 우리 앞에 보일 때, “이 사람이 참 사람이구나.” 이것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면으로 이분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많지만, 실체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얼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아담은 자기 얼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기 얼굴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대신 재물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얼굴이 생겼고 얼굴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얼굴을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사람은 위대해짐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위대해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덕적으로든지 종교적으로든지 정치적으로든지 어떤 면으로든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사람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바벨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를 앞에 세우고 ‘우리가 하늘에 이르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했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흙을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서 성을 쌓고 자기들의 영원한 나라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흙이 벽돌이 될 때 흙으로서의 운명은 끝난 것입니다. 흙은 생명을 위해서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벽돌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런데 농부가 와서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능력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문명은 날이 갈수록 인간이 필요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AI 시대가 자꾸 발전하면 인간은 완전히 나무 뒤에 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 앞에도 얼굴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했습니다. 이삭을 택했습니다. 야곱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여호수아를 다윗을 이렇게 해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아들이 오는 길을 놓게 됐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길을 타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또 무엇이 되리라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아니면 저주하고 다 떠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어떻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망령되게 부르냐?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냐?” 하고 조롱하고 떠났고, 제자들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하다가 완전히 실망하고 3년 전 고기 잡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어도 마지막 예수님이 떠나실 때 하는 말은 여전히 똑같은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이때입니까?” 3년 전에 예수를 찾아왔던 그때 그 사람들은 그대로 한치도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써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는 부활했다.”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아무도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는지 아무도 안 사람이 없습니다.
30년 후에 사도 요한이 밤모섬에서 본 계시는 그렇습니다. 세상은 전부 다 영지주의로 흘렀구나. 하나님으로 세상에 왔다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갈라져 나와버렸다. 이런 논리와 같은 논리입니다.
요한1서 5장에서 말합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 그리스도 영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 이런 말을 쏟아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새로운 출발이 된 것입니다.
이 혼란 속에서 예수는 신화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화가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 나온 사람이 볼트만, 이 사람도 신화를 다 벗겨버린 예수를 보고 우리는 이 사건을 실존적으로 선택해야 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 무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사건이 내 사건이 될 때 그때 구원이 임한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논문을 쓰면서 다 신화일지라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은 신화일 수 없다. 그건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사건을 얘기했던 불트만 논문이 자기가 학위를 받았던 논문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알았지만 자기가 누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에 근거해서 신화라는 사람을 물리치기 위해서 역사적인 예수, 실체로서의 예수를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된 예수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예수와는 완전히 판이한 사람입니다.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나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닥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람 만나니까 나보다 헤아릴 수 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서 동병상련처럼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라오던 형제들 아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겠습니까?
그 예수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주님이라고 따르겠습니까? 그런 사람입니다. 저 사람 같이 되려면 누가 예수를 믿겠냐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런 사람으로 나를 창조했다면, 나는 하나님 떠나겠다. 그럴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입니다. 딴 사람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싫어도 보면 볼수록 그는 남이 아니고 나입니다.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예수입니다. 나와 여러분과 예수가 다 하나 아닙니까? 볼수록 나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를 싫어도 할 수 없습니다. 나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감추려고 하다가 우리는 평생 동안 거짓말만 하는 겁니다. 왜 거짓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를 감추기 때문이다.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알게 되면, 나는 나무 뒤에 숨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운명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지성소가 공개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면 쓴 인간과 대하지 않고, 진실로 자기가 창조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깜깜한 지성소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됐어요. 대낮 같은 낮에 자기가 지은 세계를 보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우리도 이 회복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얼굴 가리고 있을 사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합당히 여기는지 안 하는지 그것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자기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이제부터 새롭게 살아라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을 삶을 사시겠습니까? 살아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오늘 나는 이 메시지를 여러분과 나 그리고 예수님께 바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 내가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이 말을 꼭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12시 정각에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결국 시간이 맞추지 못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히로히토가 얼굴을 내밀고 나는 인간이다. 나는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우리는 대한민국으로 건국되었다. 정부를 수립했다.” 하는 말보다 더 확실한 말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앞으로 받을 구원이 아니고 이것이 현재적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는 사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