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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한창 군벌들이 혼전을 벌이던 1919년 만주군벌 장작림이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수대의 르노-17을 구입한 것이 중국이 처음 전차를 도입한 사례입니다. 장작림은 이후에도 20여대의 르노-17을 구입하여 1926년 8월 서북군벌 풍옥상과의 전쟁(이른바 "국봉전쟁")에 투입합니다. 장개석 역시 기계화부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으로부터 18량의 카텐로이드 경장갑차를 도입하여 재정부 세무경찰대에 배속시켰고 이들을 근간으로 전차연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중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였습니다.
중원대전후 군벌들을 제압한 장개석은 군벌들이 보유한 해공군과 기갑전력을 모두 중앙에 반납토록 하였고 중앙군관학교(구 황포군관학교) 산하에 "경중과"를 신설하여 기갑병을 훈련시킵니다. 36년 7월에는 남경에 정식으로 기계화학교가 설립되었고 잡다한 전차와 장갑차를 모아 제200사단을 편성합니다. 자동차화 보병 1개 연대, 전차 1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다시 1개 연대는 각각 4개 대대, 1개 대대는 3개 중대식의 편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독일제 1호 전차와 함께 돌격중인 중국군 보병들.
이들은 상해공방전, 남경전투, 남녕전투 등에 투입되었으나 훈련수준이 낮아 이렇다할 전과를 내지는 못했고 일본 전차들과 직접 전차전을 벌인 사례는 없습니다. 태평양전쟁발발후에는 버마전선에 보내져 M-3스튜어트 경전차를 공여받고 미제식으로 무장되어 버마 탈환전에서 활약합니다. |
어쨌든, 남녕이 함락되자 장개석은 당초 반격계획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당초 무한 방면에 주공을 두었던 것을 남녕 탈환을 위해 병력을 대거 전용합니다. 이때문에 결과적으로 공격력이 상당히 분산될 수 밖에 없었죠. 제9전구에서 중앙군 14개사단 10만을 빼내어 광서방면으로 남하시켰고 사천, 귀주 등 다른 전구에서도 병력이 수송됩니다. 이중에는 전략예비대이자 중국군 최강부대인 제5군(제1사단, 제200사단, 신편 22사단)도 있었습니다. 12월 17일까지 남녕 동북부지구에 집결한 병력은 10개군 25개사단 15만 4천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제200사단의 기계화부대 외에도 100여대의 항공기가 계림과 유주에 전개하여 이들을 공중지원합니다. 이들은 남녕 북방 50km에 있는 요충지인 곤륜관을 공격하였는데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은 겨우 1개 대대에 불과했으니 당장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죠.
이런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는 일본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 중앙부는 단기간에 중국 전토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데다 노몬한에서의 패배로 대소전비의 강화가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중국전선을 일부 축소하고 주둔병력을 85만에서 50만으로 감축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병력을 축소하여도 중국군의 공격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중국군의 "동계 공세"는 일본군의 이런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고 근본적으로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녕에서의 반격을 비롯해 12월초부터 중국 대륙 전역에서 중국군은 총공세에 나섭니다. 공격에 나서는 중국군은 잘 훈련된데다 사기가 매우 왕성했으며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야간에 일본군 진지 부근까지 은밀히 접근한후 압도적인 숫적 우세를 활용해 배후를 차단하고 사면에서 포위하여 근접공격과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병참선을 공격하고 후방에서 증원하는 일본군을 기습합니다. 일본군은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을 믿고 광범위한 지역에 병력을 소규모로 분산 배치시켰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죠.
최초의 공세는 제1전구에서 시작되었는데, 화북전선에서 주공을 맡은 제2전구의 공세에 선행하여 일본군의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12월 1일 제3집단군의 유격대가 하남성 남부에서 농해철도와 주요 도로를 파괴하여 일본군의 기동로를 차단함과 함께 제81사단이 개봉-난주지구에 주둔한 일본군 제35사단과 제4기병여단을 공격합니다. 제81사단은 12월 16일 개봉성에 진입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제35사단 지휘부를 괴멸시켜 개봉을 탈환합니다. 또한 제2기병군단이 일본군 제4기병여단을 격파했고 황화강 북쪽에서도 신편 제5군과 제9군, 제36군이 하남성 남부에서 일본군 제35사단을 격파하고 안양을 탈환했으며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였으며 제47군은 태행산(하남성 북부, 산서성의 경계에 있는 해발 2천미터의 산)을 탈환합니다.
제2전구의 공격은 12월 10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산서성을 관통하는 주요 철도인 정태철도(산서성 태원~호북성 정정을 연결하는 철도)와 동포철도(수원성 대동~남경 포구까지 연결하는 철도)를 차단하여 일본군 제1군을 고립시키는 한편 태원과 남부 산서성을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전인 12월 3일, 일본군 제37사단은 동포철도 남서쪽의 중조산방면에서 중국군 대부대가 집결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선제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도리어 대패당했고 1명의 대대장이 전사하고 3천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37사단의 선제공격을 격퇴한 제2전구는 주력부대인 제4, 제5, 제14집단군이 동쪽에서, 제34군과 제61군이 서쪽으로 이들을 포위 공격하는 한편, 제27군과 제40군이 산서성 남부 장지, 장치의 일본군 제36사단을 공격합니다. 12월말까지 제4집단군과 제5집단군은 남부산서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괴멸시키고 탈환했으나 일본군 제37사단은 반격하였고 쌍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한달간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일본군은 제41사단 예하 5천명과 포병, 항공부대를 증원하였으나 격퇴되었고 40년 1월초에도 병력을 1만명이상 추가 증원하여 반격합니다.
주소량의 제8전구는 12월 18일부터 수원성 서쪽에서 공격을 개시합니다. 제35군이 포두를, 제81군이 안북을 공격하였고 이슬람 기병대가 포두를 관통하는 평수철도를 파괴하여 일본군의 증원을 차단합니다. 19일 포두를 포위한 중국군과 포두성으로 진입하여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증원군으로 오던 일본군 2개 기병연대(제13연대, 제14연대)를 격파하여 제14기병연대장 고바야시 카즈오 대좌가 전사합니다. 일본군은 제1기병여단과 주몽군 2개 대대를 증원하여 반격하였고 23일 중국군은 퇴각합니다. 일본군은 포두 서쪽의 중국군 거점인 오원에 대해 40년 1월말 공격을 개시하여 일시 점령했으나 3월 20일 중국군 제35군은 반격하여 2일간의 전투끝에 미즈카와 코레오 중장을 비롯해 4천명의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오원을 탈환하였습니다.
다음 화중방면을 본다면, 고축동의 제3전구는 12월 16일 일본군 제13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여 제32집단군이 남창을, 제10집단군이 항주를 공격합니다. 고축동은 "장강방면공격군"으로 14개 사단을 편성하여 일본군 제116사단을 공격하였고 치열한 백병전끝에 장강 하류 일대의 주요 진지를 점령합니다. 또한 소부대로 분산 침투한 중국군은 대전차포를 설치하고 기뢰를 살포하여 일본군 수송선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 제116사단은 12월 23일 반격했으나 중국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막혀 3일만에 공격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남쪽에서는 제10집단군의 제62사단과 제192사단이 항주의 일본군 창고와 괴뢰정권(중화민국 유신정부)의 기관을 습격하여 불태웁니다. 쌍방의 전투는 4월까지 이어져 일본은 2개 사단(제101사단과 제106사단)을 증원한후 4월 22일부터 반격하여 중국군을 격퇴합니다.
화중전선에서 중국군의 주력이 집중된 곳은 역시 무한방면이었는데 따라서 "동계공세"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제5전구와 제9전구 최대 71개 사단 50만명이 투입되어 무한의 일본군 제11군에 대해 사방에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던 제11군의 4개사단(제3사단, 제6사단, 제13사단, 제40사단)은 숫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전차와 포병, 항공지원으로 간신히 방어할 수 있었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냅니다.
화남방면에서는 남녕 탈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제4전구의 중국군 25개사단은 12월 17일 곤륜관에 대해 전차와 중포를 앞세워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일본군 제5사단은 제21보병연대를 곤륜관으로 급파합니다. 이어서 나카무라지대를 증원 파견했으나 중국군 유격대에 의해 남녕과 곤륜관의 도로가 차단되었고 나카무라지대도 중국군에 의해 포위당합니다. 12월 30일 일본군은 곤륜관을 포기하고 남녕으로 후퇴합니다. 이때문에 제5사단은 전사자만도 전체병력의 30%에 달하는 1만명이상에 달하였고 전멸의 위기에 처합니다. 따라서 제21군 사령관은 제5사단에게 남녕을 버리고 후퇴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사단장인 이마무라 킨 중장은 오히려 "사수"를 외치며 이를 거부합니다.
당시 제21군 주력은 광주 점령후 광주에 대한 중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11월말부터 광동성 북부의 중국군 제12집단군을 공격하고 있었으나("옹영작전") 제5사단이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12월 20일 이를 중지하고 광주로 후퇴하는 한편, 제18사단과 근위혼성여단을 남녕으로 급파합니다. 장개석은 남녕 탈환에 사활을 걸고 19개 사단을 증원하는 한편 직접 광서성 천강(남녕 북쪽 130km 떨어진 도시)까지 내려와 직접 지휘합니다.
전 전선에 걸친 중국군의 공세는 유례없이 맹렬하였고 40여일동안 대소 전투는 총 1,340회에 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창과 포두, 남녕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도시를 비롯해 빼앗긴 영토 일부를 탈환하거나 또한 탈환직전까지 밀어붙이기도 했으나 결국 중국군의 공세는 한계에 직면하였고 1월말부터 일본군은 점차 반격으로 전환합니다.
광서, 광동방면의 일본군 제21군은 "빈양작전"을 발동하여 남녕에서의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 남녕 동북쪽 80km에 있는 빈양의 점령을 목표로 합니다. 제18사단과 근위혼성여단이 남녕남쪽의 흠주로 해상수송되어 남녕주변에 집결한후 1월 28일부터 일제히 반격을 개시합니다. 일본군은 중국군 제99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중국군의 배후로 진출한후 남녕을 공격중인 중국군을 포위하려고 하지만 중국군 역시 5개사단 3만명으로 반격합니다.
그러나 남녕과 빈양 상공의 제공권을 제압한 일본군은 2월 1일 제90전대 비행대가 빈양을 폭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제38집단군 사령부가 폭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지휘계통이 마비됩니다. 게다가 제21독립비행단 소속의 79대에 달하는 대규모 편대가 출격하여 중국군 후방을 폭격하고 25개 사단의 퇴로를 차단합니다. 이것은 중국군에게 치명적이었고 다음날 오후 6시 근위혼성여단이 빈양에 돌입하고 제18사단도 빈양 동북쪽에 진출하여 중국군을 포위하려고 합니다. 결국 3일 중국군은 남녕공략을 포기하고 전면적인 퇴각을 개시합니다. 일본군 포위망안에는 무려 25개사단에 달하는 중국군이 있었으나 2개사단과 1개 여단에 불과한 일본군의 병력으로는 이들을 포위 섬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이들은 점령했던 빈양을 포기하고 2월 13일 남녕으로 도로 철수합니다.
이어서 40년 5월부터 무한지구에서도 일본군은 "의창작전"을 발동하여 반격을 개시합니다. 의창은 한구 서쪽 300km지점에 있었고 중경방어의 최일선이자 중국군 제5전구의 병참기지였습니다. 지나파견군 산하 제11군(군사령관 소노베 와이치로) 4개 사단(제3, 제13, 제39사단, 제40사단)을 비롯해 수개 독립여단과 2개 전차연대, 중포병 1개 여단, 2개 비행단, 포함 수척 등 총 8만의 병력을 동원됩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은 제5전구 산하 6개 집단군(제2, 제11, 제22, 제29, 제31, 제33집단군, 13개군 약 50개 사단 35만명)이었습니다.
5월 1일부터 일본군은 공세를 시작하여, 양자강 중류의 지류인 한수를 따라 제3사단이 필양으로, 제39사단은 다수의 토치카에 의존하여 저항하는 중국군 최일선을 돌파한후 조양을 공략하고 반전하여 기지로 돌아갑니다. 중국군은 강력하게 저항하기보다 지연전술을 펼치며 일본군 진격로 측방으로 일단 물러나면서 반격을 준비합니다.
5월 10일 장자충의 제33집단군은 병력을 양분하여 의성에서 한수 동안으로 도하한후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이들의 병참선을 위협합니다. 또한 탕은백의 제31집단군(중앙직계군)도 북쪽의 일본군 제3사단을 사면에서 포위합니다. 그런데 중국군의 무선통신을 사전에 캐치한(중국군은 통신보안에 개념이 없었기에.. 일본군도 크게 다를바 없었지만) 일본군은 제33집단군 사령부가 장가집 부근의 고지에 있음을 파악하고 제39사단 231보병연대가 이들이 위치한 고지를 포위 기습합니다.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장자충은 직접 선두에 서서 진두 지휘를 했으나 일본군의 총탄 5발을 맞고 전사합니다.
장자충(1891~1940) : 최종계급은 이급상장(사후 일급상장으로 추서). 군벌전쟁시절에는 풍옥상의 "13태보"중 하나라는 석우삼의 제6군에서 여단장을 지냈고 북벌전쟁, 이후 중원대전 등에서 싸웁니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군이 화북까지 노리자 찰합이성과 만리장성, 수원성에서 이들과 여러차례 싸워 격퇴시키는 등 항일명장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중일전쟁 직전에는 찰합이성 주석과 천진시장을 지냅니다.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 당시 그는 제38사단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선전합니다. 이후 이종인휘하 제5전구에 배속되어 제59군(풍옥상의 서북계열)을 지휘합니다. 그리고 38년 3월 태아장전투과 서주회전에 참가하는 등 화북의 주요전투마다 참전하여 큰 활약을 합니다. 그는 중일전쟁기간 전사한 중국군 최고위 장성중 하나였는데, 총 8명의 이급상장(3성장군)이 전사하였습니다.
제5전구의 우익을 맡고 있던 장자충의 전사는 제33집단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중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손연중의 제2집단군, 탕은백의 제31집단군 등 타 부대의 공세도 일본군의 반격으로 큰 희생만 치루고 격퇴당합니다. 이종인은 잔존부대를 수습해 양양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를 일본군 제3사단이 추격하여 5월 19일 양양 부근에서 대파하고 이종인의 사령부가 있는 노하구 인근까지 진격합니다.
한편, 제39사단도 후퇴하는 중국군을 맹추격해 백하강까지 진격한후 20일 백하강 서쪽으로 도하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도하를 마치자 사전에 매복해 있던 중국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고 제233보병 연대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합니다. 또한 병참선이 한계에 직면하고 워낙 더운 날씨에서 강행군으로 공세 한계점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제11군 사령관은 당초 도쿄의 대본영에서도 제한된 공세만을 허가했다는 명분으로 이쯤에서 작전을 종료할 것을 명령했으나 공명심에 눈이 먼 일부 참모들이 작전의 강행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결국 이들의 고집으로 공세는 재차 시작되지만, 당시 직속사령관조차 참모들에게 휘둘리는 일본군 지휘부의 나약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죠.
한수를 따라 의창으로 진격중인 일본군 제3사단 ※ 사진출처 : 위키백과
5월 31일, 양양성의 중국군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제3사단, 제39사단은 한수서안으로 도하를 시작합니다. 다음날 양양성을 점령한후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장자충이 전사한데다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은 중국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한채 후퇴합니다. 더욱이 중앙군과 군벌군의 혼성군대라는 약점으로 서로간의 협조가 결여되어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이종인 역시 전구사령관을 맡고 있지만 장개석 직계가 아닌 광서군벌출신이다보니 현지부대에 명령과 지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고 전황 보고도 제대로 되지 않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제13사단이 의창을 향해 서진하여 중국군에 대해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호북성의 방어선이 붕괴되면 당장 중경과 사천까지 위협받는지라 장개석은 급히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인 진성과 중앙직계군인 제18군을 증원하여 의창으로 급파합니다.
6월 9일 제13사단은 당양의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나, 북쪽에서 남하하던 제3사단은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힙니다. 따라서 제11군 사령부는 제13사단에게 의창 공격을 명령하지만, 여기에 대해 제3사단과 제39사단이 강력 반발하자 타협책으로 이들의 병력 일부를 빼내 제13사단과 함께 의창을 공격토록 하죠. 그리고 6월 11일 저녁부터 공격이 개시되어 의창은 그동안의 폭격과 이들의 공격으로 만하루만에 함락됩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5전구에 대한 소탕작전이 6월말까지 계속됩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중국군 피해는 전사자만 63,127명에 달했고, 총탄 1,200만발, 쌀 1만7415섬을 비롯해 막대한 연료와 탄약을 노획합니다. 이종인의 제5전구는 동계공세의 피해까지 합하여 50%이상의 손실을 입어 사실상 파멸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403명, 부상자 4,639명에 불과했습니다.(반면, 중국측 기록으로는 중국군 37,000명, 일본군 7,000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고 장개석은 "항전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한탄합니다.
의창의 함락으로 일본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으나, 이를 계속 확보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당초계획은 수비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지의 노획 물자를 약탈한후 점령지를 포기한채 무한방면으로 도로 철수하는 것이었으나, 일부 참모들이 중경을 비롯한 중국 내륙에 대한 전략 폭격의 거점으로서 의창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의창에서 철수중 다시 반전하여 6월 24일 재점령합니다. 장개석은 진성에게 명령을 내려 호북서부지역을 제6전구로 편성하고 중앙군과 사천군, 서북군을 동원해 의창 탈환을 명령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군 역시 중국군을 포위섬멸하지는 못하여 전선은 다시 교착상태가 됩니다.
장개석은 1940년 2월 유주에서 열린 군사회의에서 "각 전구가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함으로서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고 이때문에 한개의 현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다"라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특히 고축동의 제3전구에 대해서는 14개사단으로 적 1개사단을 공격했음에도 3일만에 공격을 중단했다며 지휘관들의 적극성과 전투의지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사실 중국군의 동계공세는 44년 6월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이었던 "바그라티온작전"처럼 힘의 균형이 소련측에게 기운 상태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일본군의 공세가 한계에 직면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중국전선에서 우세한 것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장개석이 "전의가 부족하다"고 질책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철도를 빼앗긴데다 물자와 예비병력이 부족했던 중국군으로서는 전 전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할수도, 장기간 공세를 지속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병력을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배치시킴으로서 초반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철도를 통해 후방에서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증원하여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철도를 벗어나면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제한된 반격 이외에 퇴각하는 중국군을 지속적으로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의창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전선은 전체적으로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2년 2월 스탈린의 성급한 반격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장개석의 무모한 모험"이라고 비판하는 것 또한 정당한 평가는 아닙니다. 장개석은 제2차 남악군사회의에서 "지금의 우리가 가진 무기와 장비로는 여전히 철저한 대규모 공세작전을 취할 수 없지만 적의 허점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타격을 가한다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3 즉, 그가 단 한번의 공세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기보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모전을 통해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상징적인 효과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패배에다 왕정위의 배신으로 국민정부는 패배주의가 만연한 상태였습니다. 장개석은 이런 비관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고 대내, 대외적으로 중국군이 여전히 싸울 역량이 있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병력 감축 계획을 중단하였으나 결정적인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집니다. 대미개전을 앞두고도 중국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중국전선에서 병력을 빼낼 수 없었고 태평양전쟁이후 남방전선이 점차 악화되어감에도 여전히 육군의 대부분을 중국전선에 묶어 두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계공세 그 자체는 전술적으로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중일전쟁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중화민국이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싸웠네요. 저는 장개석은 일본군에게 그냥 당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역할과 그다지 다른 것 같지도 않고.
그게 승자들의 역사 기술인거죠.
소련 못지않게 처절하군요. 게다가 소련처럼 영미 랜드리스 버프도 못 받고, 소련처럼 공업지대를 통채로 뜯어다가 옮기지도 못한 채...
연재 덕분에 중화민국의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의외로 한방이있었군요...
슬슬 중국이 일본의 머리끄덩이를 잡기 시작했군요
공산군도 병력이 만만찮았을텐데 뭐하고 있었을까요?
저렇게 중국전선에서 공세가 한계점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괌, 사이판, 인도네시아 홍콩,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버마 전선에도 병력을파견한 것 보면 정말 웃긴 놈들이네요..일본놈들은.
뉴기니아에도 전선을 형성하고 호주군과싸우고 ..더욱이 태평양전선에서미국과 맞짱뜨고참..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그냥 어려더래도, 중국전선에 더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마무리도 못하면서 더 크게 판을 벌이는거 히로히토도 지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