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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역시 엘리사시대에 일어난 기적 이야기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군대를 보라"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묵상해보겠다.
오늘 핵심 단어는 "눈"(시력)이다.
본문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어중 하나가 "눈"이라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세 구절을 살펴보자(17,18,20)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17)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17)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18)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20)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이 다섯 가지의 감각을 오감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시각은 인간의 감각 중 약80% 가까이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표현중에 "시청각"이라는 관용구가 있다.
"시"가 가장 먼저 나온다. 볼 "시"자이다.
보는 것이 사람의 의사결정과 판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감각기관보다 눈이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도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도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라는 의미이다.
여러분은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 눈으로 무엇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떤 눈을 가져야만 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묵상해 보시기 바란다.
이스라엘의 지정학적인 위치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이스라엘이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중 하나가 시리아이다.
본문에서는 <아람>이라고 부른다.
구약성경에서는 시리아를 앗시리아 혹은 수리아라고 부르기도한다.
대한민국도 과거 역사속에서는 고구려 혹은 신라. 백세, 고려, 조선으로 불리웠다.
수도는 다메섹이다. 사도 바울이 회심한 도시이기도 하다.
아람은 교역을 통해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다.
그 당시 근동지역 패권국가는 애굽이었다.
그래서 모든 국가들이 애굽과 교역을 하기 원했다. 아람도 마찬가지였다.
아람이 애굽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발판으로 삼아야만했다.
지정학적인 관계로 인해 아람은 이스라엘을 거치지않고서는 육로로 애굽과 교역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람은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배경하에서 묵상하시면 된다.
본문을 보자.
어느날 아람의 왕 벤하닷2세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아람의 이스라엘 침투작전계획이 매번 이스라엘에 사전 노출되었기 때문이다(8-10)
아람왕은 매우 불안했다(11)
‘불안하다’는 히브리어로 ‘폭풍이 일다’라는 뜻이다.
불안해지면 부정적인 증세가 나타난다. ‘화를 자주 내고 격분한다’
불안한 사람들이 자주 화를 낸다. 화를 낸다는 말은 불안하다는 의미이다.
불안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열을 낸다.
혹시 주변에서 이런 분들을 보시면 놀라지 마시고 "아 이 사람이 지금 많이 불안해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라.
아람 왕은 자신의 계획이 여러 차례 차질을 빚자, 우리 중에 간첩이 있어 회의 내용을 이스엘 측에 전달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심하게 분노하였다.
아람 왕은 내부 첩자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 사이에 있는 첩자를 색출해야한다고 주장했다(11)
이때 아람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우리 계획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라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가장 은밀한 곳인 왕의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도 알 수 있고, 그 말을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해준다고 보고했다(12)
이 말을 듣자 마자 아람 왕은 엘리사 체포작전에 돌입했다.
아람 왕도 엘리사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그가 도단에 있다고 보고했다.
"도단"?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방문했다.
형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졌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린 곳이다.
도단 지역은 높이 60m의 둥근 언덕지역이었다. 고지대였다.
총면적은 3만평(25에이커) 정도이다.
천혜의 요새로서 정상에 주거 유적이 빽빽하고, 성 입구는 가팔랐다.
외부에서 접근하기가 까다로운 지형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엘리사가 서구 아미동 고지대에 거주했던 것같다.
이 말을 들은 아람 왕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한밤중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을 보내 도단성을 포위했다(14)
아람 왕이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군대를 보낸 것은 엘리사와 엘리사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엘리사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엘리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편이 그들보다 훨씬 많다" "우리 군대가 저들 군대보다도 더 많다"(16)
오늘 요절 말씀이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의 사횐은 어리둥절했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밖에는 아람 군대만 보이는데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의 군대가 더 많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엘리사의 눈에는 이 실상이 보였지만 엘리사 사환의 눈에는 이 실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는 안타까웠다.
자신이 보는 실상을 자신의 사환도 보게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우리도 좋은 것 보면 가족들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이 자리에 가족이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에 꼭 한 번 같이 와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도했다.
사환의 눈으로도 이 실상을 볼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다.
엘리사의 사환도 엘리사가 보았던 것과 같은 동일한 실상을 보게되었다(17)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게되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부부가 같은 것을 보아야한다. 부모와 자식이 같은 것을 보아야한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살면 자주 다투게된다. "내 눈에는 이게 보이는데 당신 눈에는 안 보여"
이런 말을 하게된다.
그런 후에 엘리사가 또 한 번 기도를 한다.
이번에는 자기 집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했다(18)
그러자 아람 군사들의 눈이 어둡게되었다.
잠시 앞이 안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 엘리사는 아람군대를 사마리아로 안내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고 도단에서 남쪽으로 약 18km정도에 위치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다.
악당들이 인질로 잡힌 주인공의 눈을 가리챈 자신들의 아지터로 데리고 가는 장면같다.
아람군사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할때쯤 엘리사가 이제는 이들의 눈을 뜨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고, 그렇게 되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눈이 가려진채 도단에서 사마리아로 끌려왔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는 이들 모두를 살려서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냈다(23)
이상이 본문의 줄거리였다.
오늘 핵심단어가 눈이었다. 세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1. 우리 모두는 엘리사의 눈으로 살아야한다.
오늘 본문에 세 종류의 눈이 소개되었다.
1) 아람 군사들의 눈이다. 육적인 눈으로 사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은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육의 눈과 영의 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영의 눈을 사용할 줄 모른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채 살아간다.
그래서 평생 육신의 눈만 사용한다.
영적인 눈을 사용하지 못한다.
영적인 눈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살아간다(18-20)
"눈을 어둡게 하였다"? 히) ‘싼 웨림’은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를 뜻한다.
마치 술취한 운전자가 자신의 차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채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지금 이 세상에는 육적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다.
이들은 사람을 돈으로 외모로 성공으로 판단하고 차별하고 있다.
2) 엘리사의 사환이 가진 눈이다. 교회 안에 이런분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 교회 다니고 있다.
과거에는 육신의 눈만 사용하다가 이제는 영의 눈을 가지게 된 분들이다.
과거 우리는 눈에 보이는대로 살았다.
눈에 보이는대로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믿고 말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영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축하드린다.
그런데 마냥 축하만 할 일이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우리 자신이 영의 눈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을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의 눈으로 살아가는지 의문이다.
이유가 있다. 이런 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 있다.
타인의 도움으로만 영의 눈으로 살아갈 수 있다.
엘리사 사환의 경우가 이렇다.
그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엘리사의 사환이 될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육의 눈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도단에서 엘리사의 도움으로 영의 눈을 뜨게 되었다.
엘리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도 아람 군대처럼 육의 눈으로만 살았을 것이다.
저는 우리 미준교회가 도단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만드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영의 눈으로 살아갈수 있는 자들이 바로 엘리사 사환의 눈을 가진 자들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렇다.
주일날 교회와서 설교말씀을 듣게되면 일시적으로 영의 눈이 뜨여진다.
집에서도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수요기도회때 성도들이 함께 합심해서 기도하면 영의 눈을 가지게된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저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런 분들은 고난을 만나거나 마음에 안드는 일에 직면하면 이렇게 말한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나를 만드십니까?"라고 불평한다.
늘 신세타령, 이 핑계 저 핑계되고, 현실을 도피하려만 한다.
그렇게 살다가 주일날 교회와서는 은혜받아 하나님을 말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한다.
영의 눈을 가지게 되거죠.
이렇게 엘리사 사환의 눈을 가진 자들은 타인의 도움으로 영의 눈이 뜨여지게 된다.
3) 드물지만 엘리사의 눈을 가진 자들도 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눈을 가진 자를 말한다.
하나님처럼 보고 하나님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자신의 사환에게 그렇게 말할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편이 적들의 편보다 많다"
이 말은 추측이나 짐작이 아니다. 가능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왜냐하면 영의 눈을 가진 자들은 실상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현상 (現象)을 본 것이 아니라 실상 (實相)을 보았다(16)
현상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상은 참된 모습이다.
현상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도 이런 눈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실상이란?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다.
현상은 하드웨어이다. 컴퓨터 껍데기를 가리킨다. 눈에 보이는 컴퓨터 본체가 현상이다.
반면에 실상은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로 작동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본질은 현상이 아니라 실상이다.
철근, 시멘트, 모래가 섞여있다고해서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계도가 있어야 건물이 완성된다.
철근과 시멘트와 모래는 현상이고, 설계도가 실상이다.
플라톤이 이 실상을 이데아라고 말했다.
참고로, 현상은 가짜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독교인중에 정신나간 교인들이 있다.
현상을 가짜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짜라고 말한다.
육의 것은 부질없다고말한다.
"돈이 무슨 소용있나?"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필요없어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자신이 가난하게 살아야하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래서 늘 돈을 빌리면 산다. 채무자로 산다.
그리고 사람이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늘 외롭다고 말한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는가?
착각하지 마라.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가짜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은 가짜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현상을 보며 살아가지만 그 현상을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실상을 믿는사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을 가졌다. 실상을 보며 산다.
우리 모두 엘리사처럼 영의 눈으로 사시기를 축복한다.
2.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엘리사처럼 영적인 눈을 사용하며 살수 있을까?
도전적인 말씀을 드린다.
"기도하면 된다"라는 단순하고 원론적인이고 전통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을 읽고는 무조건 기도만하면 자신의 눈이 영적인 눈이 된다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는 그렇게 믿으며 살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누가 기도부탁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께라고 간단히 말한다. 너무 쉽고 간단하다.
그런 후에 기도할때도 있지만, 부탁을 잊어버리고는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하여 누군가에게 빌리려 간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다.
"기도해라"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라고 말한다.
주지도 않는다.
기도는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지니야 티비 켜" "지니야 넷플릭스 켜 줘"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이런 게념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기도만 하면 자신의 영의 눈이 열린다고 생각하고
기도한 후에 자신의 눈이 이제는 영의 눈이 되었다고 쉽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기도 한 시간 하고 나면 우리 눈이 영의 눈으로 변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해서 자신의 눈이 영적인 눈으로 변모할것이라고 생각지는 말라는 것이다.
제가 아주 현실적인 말씀을 드리려한다.
사업하는 사람의 눈에는 돈이 보인다고한다.
제가 아는 어느 40대 사업가는 자신은 어느 까페나 식당을 방문하면 이 업체의 한 달 수익이 어느 정도 되는지가 눈에 보인다고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현상에서 멜로디가 들린다고한다.
비발디의 사계 아시죠?
비발디가 사계절을 멜로디로 표현했다.
이들이 이렇게 한 분야에 정통할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기도했어 그런가?
앞에서 언급한 이 사업가는 사업이 너무 재미있다고한다.
그래서 그는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고 한다.
매일 매일이 너무 재미있고 보람차다고 말했다.
임윤찬이라는 피아니스트는 어느 유명한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후에 이런 소감을 남겼다고 하지 않는가?
"자기는 하루 24시간 피아노만 쳤으면 좋겠다고"
이들은 하루 종일 사업만 생각하고 피아노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분야의 정통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가질려면 우리도 하루 종일 하나님만 생각해야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뜨게 만들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라. "여호와께서"(17, 20)
엘리사가 기도 많이해서 영의 눈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에 없다.
그가 기도많이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그는 성령의 갑절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2:9)
쉽게 말하면 그는 하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제일 많이 생각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눈으로 살 수 있다.
3. 왜 우리가 영의 눈을 가져야만 하는가?
영의 눈을 가져야 하나님의 군대가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영의 눈을 가진 자에게는 실상이 보이고 본질이 보인다는 말이다.
육의 눈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군대를 볼수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못 본다.
엘리사 사환의 눈을 가진 성도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군대를 볼수 있다.
하나님의 군대가 보이다가 말다가 한다.
자립하지를 못한다.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살수 있다.
반면에 엘리사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언제든지 영의 눈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늘 하나님의 군대를 볼수 있었다.
이 사실이 바로 우리가 영의 눈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베드로가 잠시 물위로 걸었다. 하지만 오래동안 물위로 걷지못했다.
그 이유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가 현상을 보고 그 현상이 진짜인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도를 보고 놀랐다. 파도는 현상이다. 즉 세상이다.
여러분 세상을 보면 놀란다. 그리고 우리가 무기력해진다.
세상을 보면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세상은 우리를 주눅들게 만든다.
베드로가 그래서 무너진 것이다.
그는 파도 뒤에 계셨던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이 실상이시다.
그는 물위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하면 넘어진다. 주눅든다. 무기력해진다.
우리가 실망하고 실족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눈을 가져야한다. 영의 눈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을 가장 오래 묵상하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생각하라.
6일 동안 돈생각하다가 주일날 하루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엘리사 사환의 눈을 가진 자이다.
이런 분들은 자주 교회와서 도움 받아야 제대로 살수 있다.
하나님앞에 자신의 인생이 노출되어야한다. 그러면 영의 눈이 생긴다.
영의 눈이 생기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승리한다. 무혈입성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군대와 아람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가? 아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한다.
할렐루야!